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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포커스]-영웅을 만든 영웅들(中-감동의 전인교육)
시각장애 장벽 허문 미래 국가보물 뒤엔 현대판 설리번
전 세계에 감동 전하는 원진주-김지연 사제 환상의 국악하모니
오창영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0-05-11 00:05:19
▲ 원진주 명창(사진)은 2013년 임방울국악제에서 대통령상을 거머쥐기 전까지 수년에 걸쳐 도전했지만 준우승에 그치는 등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가장 힘든 시기였던 2012년 3월 원 명창은 제자 김지연 소리꾼을 만났고 이후 장애가 있는 제자를 위해 온몸을 던져 가르치면서 스스로도 배움을 얻었다. [사진=박미나 기자] ⓒ스카이데일리
  
 
▲ ⓒ스카이데일리
[특별취재팀=박선옥 부장|문용균 팀장·오창영·유환인 기자]  2001년에 개봉한 영화 ‘두사부일체’는 엄청난 흥행에 성공한 코미디 영화다. 당시 영화는 코미디라는 장르가 무색하게 몇몇 영화 속 상황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수업을 방해하고 교사에게 대드는 학생과 훈계하는 교사에게 폭력을 가하는 학부모의 모습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영화는 교권붕괴 연상을 영화에 고스란히 담아내 공론화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지금도 교육현장의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교사에게 행해지는 욕설, 폭언, 폭행, 성희롱 등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며 업무 시간 이후에 문자나 SNS 메신저를 통해 사생활 침해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교사는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심한 경우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위기에 처한 교육현장과 대조적으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귀감이 될 스승과 제자도 여럿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서로에 대한 두터운 신의를 바탕으로 스승은 제자가 느리게 성장하더라도 한결같이 기다려주고, 제자는 스승을 믿고 가르침을 받는다. 나아가 스승은 앞을 보지 못하는 제자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도록 천천히 가더라도 함께 가겠다고 다짐한다. 이러한 감동적인 이야기는 스승 원진주 명창과 제자 김지연 소리꾼의 뜻밖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경합 준비로 힘든 시기 겪던 명창, 시각장애인 제자 만난 후 제2의 인생 펼쳐
 
원 명창은 2013년 임방울국악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실력을 검증받은 소리꾼이다. 임방울국악제는 전주대사습놀이와 함께 전국의 판소리 명창들이 실력을 겨루는 국내에서 가장 큰 대회다. 해당 국악제에서 대통령상을 거머쥐기 전까지 원 명창은 수년에 걸쳐 도전했지만 준우승에 그치는 등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그랬던 그가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결정적 계기는 가장 힘들었던 시절 지금의 제자 김 소리꾼을 만나면서였다.
 
“2012년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의 전통음악아카데미에서 소리꾼이 되고 싶어하는 지연이를 우연한 계기로 소개받고 가르치게 됐어요.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던 지연이와 최고 권위의 대통령상을 준비하고 있던 저, 그렇게 가장 힘든 시기를 겪던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이죠.”
 
“막상 소리를 가르치기로 했지만 시각장애인이라는 지연이의 신체적 특성 때문에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처음엔 참 막막했어요. 선생의 욕심대로 했을 때 과연 따라올 수 있을지 아니면 아이에게 부담이 되는 것은 아닌지 매우 고민이 많았죠.”
 
하지만 막상 김 소리꾼을 가르치게 되면서 원 명창은 자신의 걱정이 괜한 기우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김 소리꾼은 어릴 때 우연히 읽게 된 점자책 “서편제”의 여주인공 송화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느끼고 스승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소리에 대한 애정을 내보였다. 원 명창은 그때 소리에 대한 김 소리꾼의 순수한 마음을 봤다고 말했다.
 
“대통령상이라는 목표만 몇 년간 좇다보니 스스로 잘하고 있는 건지, 이게 옳은 길인지 고민이 깊어지던 시기였어요. 제자를 가르칠 상황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죠. 그러나 지연이를 만나면서 소리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제가 배우게 됐어요. 욕심만 부리던 자신을 깨우치고 반성하는 계기가 됐던 거죠.”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닫힌 시야로 지연이를 대했더라고요. 가르치는 것에 있어서 제 스스로가 보이는 것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정작 소리에 대한 마음을 잊었던 것 같았어요. 지연이가 소리를 배우는 데 순수하게 임하는 것처럼 스승인 저도 순수하게 가르쳐야겠다고 다짐했죠.”
 
▲ 제자 김지연 소리꾼이 앞을 보지 못하는 탓에 원진주 명창(사진)은 일일이 손끝을 매만지고 수십, 수백 차례 고쳐가며 발림(부채질)을 가르쳤다. 원 명창은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해보자’는 일념으로 제자를 기다렸다고 한다 ⓒ스카이데일리
 
소리에 대한 순수한 열망으로 스승과 제자가 똘똘 뭉친 덕분에 김 소리꾼은 2013년 그토록 바라던 수원대학교 국악과에 입학하게 됐다. 장애 학생을 위한 특별전형도 아닌 비장애인 학생과 경쟁해야 하는 일반전형에서 오직 실력으로 겨뤄 이룬 값진 쾌거였다. 4년 내리 성적우수장학금을 받을 만큼 탄탄한 실력을 함양해온 김 소리꾼은 졸업과 동시에 문체부 산하 관현맹인전통예술단에 소속돼 소리꾼으로 활약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전 세계 예술인들의 꿈의 무대로 꼽히는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한국의 소리를 선보이기도 했다.
 
비장애인 못지않은 열정과 노력… 스승의 믿음과 제자의 신뢰가 만든 긍정의 에너지
 
물론 김 소리꾼이 지금의 실력을 갖추기까지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장애를 뛰어넘기 위해선 비장애인보다 배 이상의 시간과 노력이 수반됐다. 발림(부채질)은 손끝 하나하나에도 느낌이 미세하게 달라질 수 있어 비장애인도 어려운 동작인데 김 소리꾼은 앞을 보지 못하니 원 명창이 일일이 손끝을 매만지고 수십, 수백 차례 고쳐가며 가르쳤다. 이에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해보자’는 일념으로 한 번 가르칠 때마다 3~4시간씩 소요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어떤 날은 한 자세에서 발림(부채질)을 너무 오래 가르치다보니 나중엔 김 소리꾼이 움직이지 못하기도 했다며 당시를 추억했다.
 
원 명창은 “한때 김 소리꾼이 높은 음이 잘 나오지 않았다”며 “판소리에선 매끄러우면서도 강하게 높은 음을 내지르는 순간이 필요한데 제자가 그러지 못하다 보니 소리를 가르칠 목이 아닌건가 고민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어 “비장애인의 경우에는 안 되는 것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잘 하는 것을 더 부각시킬 수 있도록 가르쳤겠지만 김 소리꾼의 경우엔 그럴 수가 없었다”며 “하나씩 천천히 가르치고 올곧이 따라올 수 있게 기다려줬다”고 밝혔다.
 
“언젠가 해결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오랜 기간을 반복해서 가르쳐 오던 중 어느 날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어요. 갑자기 지연이의 목소리가 트이면서 높은 음이 터져 나온 거예요.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에 갑작스럽게 만난 그 순간의 환희는 너무도 가슴 벅찬 것이었죠. 어찌나 마음 뿌듯하고 보람되던지 그 순간을 행복이나 기쁨과 같은 단어로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마음 속에 뭉클한 감정이 벅차올랐어요.”
 
이제는 김 소리꾼의 표정과 소리만 보고 들어도 어떤 상태인지 다 알 수 있게 됐다는 원 명창은 사제지간에 깊고 끈끈한 믿음이 생겼다고 자부했다. 이러한 원 명창의 한결 같은 가르침 덕분에 김 소리꾼은 2016년 대한민국 장애인예술경연대회(스페셜 K) 국악 분야에서 1등에 올랐다. 장애인 간 실력을 겨루는 대회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는 소식에 힘들었던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더라는 원 명창은 그동안 함께 걸어온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받은 것 같아 무대에 오른 김 소리꾼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며 멋쩍게 웃었다.
 
이제 김 소리꾼은 판소리 완창을 목표로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유명 가수들이 콘서트를 하듯이 김 소리꾼은 흥부가, 심청가 등 3시간이 넘는 판소리 마당 하나를 오롯이 혼자서 완창해야 한다. 판소리 마당을 완창한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원 명창은 설명했다.
 
소리만 잘 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니리(내레이션), 재담(유머), 발림, 표정 등 갈고 닦아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특히 소리만 듣고서 깨우쳐야 하는 아니리·재담과 본 적 없는 것을 머리 속에 그려야 하는 발림·표정은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김 소리꾼에게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게 원 명창의 설명이다.
 
원 명창은 김 소리꾼이 직접 몸으로 느끼며 발림을 배울 수 있게끔 가르치고 있다. 표정을 가르칠 땐 김 소리꾼이 직접 만질 수 있게 자신의 얼굴을 기꺼이 내주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제자에게 직접 표정을 지어보도록 지시하곤 얼굴에 테이프를 붙여 이마를 찡그리는 표정, 웃는 표정 등 다양한 표정을 기억하도록 하고 있다.
 
불평 없이 모든 가르침을 묵묵히 따르는 제자, 제자를 보며 또 한 번 배우는 스승
 
 
▲ 소리, 동작, 표정, 심지어 마음가짐까지 원진주 명창(사진 오른쪽)의 것을 그대로 체화할 수밖에 없는 김지연 소리꾼은 원 명창의 거울과 다름 없다. ⓒ스카이데일리
 
원 명창에게 김 소리꾼은 ‘거울’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됐다. 소리, 동작, 표정, 심지어 마음가짐까지 원 명창의 것을 그대로 체화하도록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무대에서의 마음가짐을 가르치려고 김 소리꾼에게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해야 한다고 강조하던 중에 고칠 부분, 극대화해야 할 부분을 설명하다보니 정작 저의 모습을 얘기하는 꼴이에요. 저를 보고 고스란히 따라 배울 지연이를 위해 저 스스로도 소리꾼으로서 더욱 정진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잡게 되죠.”
 
김 소리꾼은 이토록 혼신을 다해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스승 원 명창이 헬렌 켈러의 스승 설리번 선생님과 같은 존재였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저에겐 헬렌 켈러를 키워낸 설리번 선생님과 다름 없는 분이에요. 헬렌 켈러가 물이 뭔지 모를 때 설리번 선생님은 수돗가로 데려가 물을 직접 느끼게 하곤 반대편 손바닥에 물(water)이라는 글자를 써줬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헬렌 켈러가 세상 모든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고 눈으로 보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새롭게 지각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설리번 선생님이 있었어요.”
 
“선생님은 저에게 바로 그런 스승이세요. 소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제게 소리뿐 아니라 아니리, 재담, 발림 그리고 표정까지 모든 것을 직접 느낄 수 있게 해주시고 제가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기다려 주셨어요. 저에게 소리의 세계를 열어주시고 즐길 수 있도록 가르쳐준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원 명창은 비장애인보다도 더 힘들 텐데도 불평 한번 한 적 없이 자신을 믿고 묵묵히 따르는 김 소리꾼이 오히려 고맙다며 칭찬과 감사를 표했다.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바라는 목표는 분명 높고 크지만 김 소리꾼이 이를 따르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 늘 생각해 왔어요. 만약 목표한 대로 따르지 못해 다그치거나 실망했다면 지금의 사제지간은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서로 알고 지낸 지 벌써 9년이네요. 그동안 지연이와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해 왔듯이 서로의 진심을 믿고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갈 거예요. 지연이를 ‘세상의 빛’으로 키워내 많은 장애인 후배, 동생들이 롤 모델로 삼고 귀감이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할 계획이죠. 앞으로도 지금처럼 한결 같은 마음으로 서로에게 끈끈한 스승과 제자의 길을 이어가고 싶어요.”
 
[오창영 기자 / 판단이 깊은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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