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가 비록 범행을 저지르긴 했지만 피해자를 20년 이상 돌봐온 어머니이자, 가장 가까운 유족으로서 피해자의 사망을 누구보다 슬퍼하고 아픔도 가장 크게 받을 사람이다.” 지난달 20년 간 돌봐 온 지적장애 큰딸과 함께 자살하려다 딸만 죽게 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 어머니에게 판사가 한 말이다. 둘째딸도 백혈병을 앓고 있다. 판사는 “딱한 사정이 있다. 첫째 딸에게 못다 준 사랑을 둘째 딸에게 베풀라”며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지난해에는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형을 14년간 간병하던 동생이 형의 부탁으로 자살 도구를 전해줘 재판에 회부됐으나 판사는 동생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선처한 것이다. 10년 이상 고통에 시달리던 형이 “너무 힘들다. 이제 그만 하고 싶다”며 간청했고, 동생은 긴 세월 형을 간병한 게 참작됐다. 법에도 눈물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두 명판결이다.
병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코를 통해 호수로 음식물을 넣어줘야 했던 아버지를 간병하다 방치해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된 아들 강모 씨에게 ‘존속 살해’가 인정돼 1심과 항소심에서 모두 징역 4년이 선고돼 ‘영케어러(가족돌봄청소년)’에 대해 사회적 이슈를 던지고 있다. 2014년 영국에서 만들어진 신조어 영케어러는 한창 학업에 열중해야 할 나이에 부양 의무를 떠안게 돼 생활고에 시달리는 청년을 일컫는다.
50대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22살인 오 씨는 지난해 9월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으나 병원비와 간병비를 마련하기 어렵자 의사의 만류에도 퇴원시켰다. 아버지 약값에 밀린 월세도 내야하고 생활비도 벌어야 했기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돈을 못 내 전화·가스·인터넷·휴대전화가 끊기고 쌀마저 떨어졌다.
아버지는 욕창 방지를 위해 2시간마다 자세를 바꿔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놓인 오 씨는 “너의 삶을 살아라”라는 아버지의 어렴풋한 말을 듣고, 아버지가 누워계신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약은 물론 영양 공급이 중단돼 아버지는 퇴원 보름 만에 사망했다. 검찰은 강력한 의무 책임이 있는 사람이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때 적용하는 ‘부작위 살인’으로 기소했고, 법원은 유죄를 선고한 것이다.
사건이 처음 보도됐을 땐 ‘젊은 사람이 아버지를 굶겨 죽였다’며 단순 패륜으로만 알려졌지만, 한 매체의 탐사보도로 영케어러 사건임이 밝혀졌다. 정의당 심상정 의원은 “한 청년의 삶을 통째로 내던져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비극 앞에서 우리 공동체는 왜 그를 돕지 못했나” 하고 한탄했다. 2년 전 탈북인 모자가 서울 관악구에서 아사한 뒤 두어 달 뒤에 시신이 발견됐을 때도 재발 방지를 다짐했지만 복지사각 지대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고령화와 핵가족 사회를 먼저 겪은 영국과 일본은 이미 영케어러에 대한 지원 방안을 확립해 시행하고 있다. ‘아동가족법’을 제정한 영국은 영케어러의 법적 정의를 명시하고 2019년부터 보조금·학업·직업훈련 지원은 물론 언제든 사회복지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 일본도 영케어러 가정에 가사노동 지원, 간병, 온라인 상담 등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지 체계를 구축했다.
‘긴 병에 효자·효부 없고, 간병엔 돌부처도 돌아눕는다’는 말이 있다. 요즘엔 청년의 노인 간병뿐만 아니라 대가족 제도 붕괴로 노인의 노인 부양, 노인의 자녀 부양문제까지 부각되고 있다. 선거 때만 되면 출마자들은 ‘그물망·촘촘한·찾아가는 복지’를 공약하지만 말 뿐이다. 정치권은 재벌까지도 혜택을 받는 전 국민 지원금을 거론하기 전에 진짜 꼭 필요로 하는 곳의 맞춤형 복지에나 신경 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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