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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작가 중에는 요리를 참 잘하거나 노래·악기 등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많다. 또한 반대로 가수들 가운데 그림 잘 그리는 사람 역시 많다. 팔방미인이야 어느 집단에든 있기 마련이지만, 예술가들이 다양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무언가 생각해 볼 만한 것이다.
재능이나 감각은 아래 단계에서는 세분화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통합적으로 긴밀히 엮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술적 감각이나 재능은 서로 통해 있다는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 중세 혹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이 여러 장르에서 예술적 성취를 이룬 것만 봐도 그렇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거장들이 복합적인 조형활동을 당연시했다.
세분화 혹은 전문화는 효율성·생산성만을 위해 분업을 강조한 산업화의 산물이다. ‘한 우물만 파라’는 명제가 융복합 시대의 예술 영역에서는 설득력을 얻기가 어렵다. 할 수만 있으면 우물을 팔 때 여러 군데 파는 것이 시대의 상황에 맞다.
오늘의 세계는 과거 르네상스 시대의 마에스트로를 필요로 하고 있다. 여러 분야를 통합 조율하는 지휘자 혹은 설계자 말이다. 특히 오늘날 디지털 패러다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통합 혹은 융합이 필수적이다. 급변하는 세계, 다양성의 세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보다 유연하고 복합적인 역량과 안목이 필요하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평면과 입체가 서로 다른 류의 조형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이질적인 것들 간의 섞임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짙다. 물론 질료가 다르고 도구가 다르다는 점에서 평면과 입체가 상이한 커리큘럼을 갖는다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은 감각적으로 ‘다름’을 넘어선 상호보완적 관계성의 가치를 간과한 견해다.
이런 점에서 한 분야의 일가를 이루었던 작가들이 보이는 창작의 다변화는 개인적 일탈이나 변신으로 보기보다는 시대의 패러다임이라는 시각에서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오랜 세월 종사해온 장르의 조형에서 벗어나 다른 장르로 활동범위를 넓히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금속조형 작가 변건호(74)의 최근 활동이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변 작가는 얼마 전 홍갤러리에서 그림으로는 두 번째 개인전을 가져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그는 시대가 요구하는 융합과 상호작용, 상생의 미학을 실천하는 데 모든 역량을 쏟아부은 바 있다. 융합과 상생에 바쳐 온 다양한 활동 가운데 현재 그는 회화 창작의 지점에 이르러 있다. 그 회화도 단순히 어떤 우발적 충동에 따라 움직인 결과가 아니라, 오랜 추구의 연장선이자 한 과정으로 제시된 것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작가의 근작 그림 중에는 과거 그가 작업했던 조형들이 이미지로 소환되고 있다. 대개는 입체조형이거나 여러 도시에 설치했던 거대한 기념조형물 이미지들이다. 그 이미지들이 전사된 캔버스에 다양한 드로잉이나 페인팅이 수행되고 있다. 이는 과거 시간과 현재 시간의 만남이며, 또한 입체 조형에 대한 평면의 상호작용이다.
또한 정지된 것과 활기찬 행위의 만남이기도 하다. 다채롭고 감각적인 이 그림들을 보면 작가가 회화 표현의 충동을 어떻게 그리 오랜 세월 동안 억제하고 살아왔나 의아해질 정도다.
작가가 오랜 세월 일관되게 견지해 온 하나의 세계관 혹은 조형철학이 있다. 세계는 유전(流轉)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불변적‧고정적인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변증론적 세계관이다. 생성과 소멸, 구축과 해체 등은 현상적으로는 대립적이지만 본질적으로 원환적 동일의 관계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세계의 대립자들 역시 영원한 대립이나 배척으로 끝날 수는 없으며, 하나였던 것이 여럿일 수 있고, 여럿인 것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전통적 세계관에 충실한 것이며, 그것을 이모저모 다양한 조형으로 승화시키고 표현하는 작업이 작가에게 주어진 미션처럼 보인다.
작가의 이러한 미의식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연작. 굵은 금속선 드로잉으로 표현한 이 연작들 가운데 어항이나 통발을 연상케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러한 금속조형 이미지를 인용한 캔버스에 다시 몇 마리의 물고기 떼가 입체 이미지에 상응하여 자유롭게 유영하는 모습의 그림이 있다.
미국의 프래그마티즘 철학자 존 듀이는 자신의 철학적 완성을 위해 이론과 사회적 실천의 조화를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작가 역시 조형 창작을 다양화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보다 넓은 범주의 활동을 해 왔다.
그는 1990년대부터 시대적 요구와 새로운 패러다임에 직면한 공예와 디자인·미술 등을 융합한 개념인 ‘조형디자인’(Art & Design)을 적극적으로 확산시키는 운동을 펼쳐왔다. 그리하여 조형디자인학회와 사단법인 한국조형디자인협회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해 초대 이사장을 지낸 바 있다. 공예로부터 파생된 새로운 개념의 금속조형을 위해 작가 스스로 거대 모뉴멘트 창작의 역량을 선보여 여러 도시에 작품을 설치한 바 있다.
수많은 화제를 뿌렸던 전라남도 함평군 황금박쥐 서식을 기념한 ‘황금박쥐상’도 작가가 제안해 작품 제작까지 맡았다. 이로 인해 나비축제의 관람자가 폭증해 금 투자비용을 회수했을 뿐 아니라, 그 후 금값이 몇 배 올라 지자체의 자산가치가 크게 증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복을 가져온다는 전통 미의식에 근거한 예술창작임에도 작품이라는 시각은 실종되고, 오로지 금덩어리에 대한 관심으로만 보도되어 지탄받기도 했던 일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뿐 아니라 작가는 거대한 인류의 문명이 대전환점에 이른 현상을 통찰, 인류는 이제 ‘새로운 철기시대’에 접어들었음을 선언하고, 다양한 연구와 저술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런 활동을 통해 그는 억압과 폭력의 철이 아니라 평화와 생명을 구하는 철기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역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철을 기준으로 시대 구분을 한 것은 작가가 금속작업을 많이 해 온 인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처럼 철을 많이 소비하는 나라에서는 마땅히 철을 매개로 인류사를 성찰해야 한다는 입장이 더 강조되고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1인당 철 소비량이 압도적인 세계 1위를 차지하는 나라다. ‘도구로서의 철’에서 벗어나 ‘평화와 생명을 위한 철’의 문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반성과 논리는 우리가 앞장서서 실천하며 국가적 테제로 삼을 만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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