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2.6º
미세먼지 좋음
강릉 15.2º
미세먼지 보통
)
농구와 배구 등 구기 종목에서 한국이 세계를 제패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서양인들에 비해 신장이나 몸의 유연성과 순발력 등에서 크게 뒤지기 때문이다.
한국 남자 농구의 경우 1988년 서울올림픽에는 개최국 자격으로,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는 지역 예선을 거쳐 출전할 수 있었다. 한국 남자 농구가 올림픽에 나간 것은 애틀랜타 경기가 마지막이었다. 그것도 조별리그 3전 전패였다. 그만큼 세계 무대의 벽이 높다는 걸 보여 주고 있다.
여자 농구는 1988년 서울 올림픽,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 출전한 데 이어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4위를 했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2008년 베이징 올림픽·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조별 경기 탈락을 겪었다. 그래도 남자 농구보다는 성적이 훨씬 나은 편이다. 꾸준히 올림픽 무대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 외에도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따냈으니 말이다. 당시 구기 종목으로서는 최고의 성적이었다.
1984 LA올림픽 은메달의 주역으로 한국 여자 농구의 ‘전설’로 불리는 박찬숙이 오랜 만에 코트로 돌아왔다.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서다. 최근 창단한 서울 서대문구 여자농구단의 초대 사령탑에 선임된 것이다. 여자 실업농구단 서대문구는 엄격한 입단 테스트를 거쳐 여자 프로농구 출신 4명과 고교·대학 출신 4명으로 구성됐고, 다섯 번째 여자 실업 농구팀이다.
박 감독은 서울 숭의여고 1학년 때인 1975년 당시 국내 최연소 여자 농구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1m90cm의 장신으로 골 밑에서 오펜스와 디펜스를 하며 몸 싸움이 가장 많은 포지션인 센터를 맡았다. 신장과 체격이 큰 선수가 센터를 맡는 것은 당연했지만 농구 경기에서는 승패가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는 센터 하기 나름이라고 할 정도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박 감독은 197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은메달과 1984년 LA올림픽 은메달 획득을 이끈 한국 여자농구의 간판스타였다. 화려한 선수 경력을 자랑하는 박 감독은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적은 있지만 달리 국내에서 여자 프로팀이나 단일 구단의 사령탑을 맡은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농구 곁을 떠나지 않는 ‘영원한 농구인’이라고 할 만하다. 최연소 국가대표를 비롯해 최초의 주부 선수 등 수많은 수식어를 보유한 그다. 1970년대·1980년대를 대한민국 여자 농구 전성기로 물들인 박 감독이 한국 여자 농구의 유망주로 거듭나게 된 계기는 중학교 3학년이던 1974년 전국소년체육대회였다. 소속팀인 숭의여중을 우승으로 이끈 유망주 박 감독의 꿈은 처음부터 농구 선수가 아니었다. 친구들 머리카락 땋아 주는 걸 좋아해 헤어 디자이너를 꿈꿨던 그에게는 농구의 ‘농’ 자도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농구를 처음 접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다른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니까 체육 선생님 눈에 띈 게 농구 인생의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고1 때 국가대표로 첫 출전한 1975년 콜롬비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농구 선수를 선정한다는 ‘미스 월드 바스켓’으로 이름을 올렸고, 이로써 한국 여자 농구에 실력은 물론 미모까지 갖춘 불세출의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바로 위 대표팀 선배들하고는 나이가 거의 10살 이상 차이 났다. 그러니 대표팀에 들어가서도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선후배 간에 위계질서가 엄했던 시절이었다.
국내에서 최고의 실력을 뽐내던 박 감독은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면서 실력이 급격히 늘어 한국 여자 농구의 주축으로 성장했다. 한 번도 출전하기 힘든 세계선수권대회에 박 감독은 세 번이나 출전해 세계 무대를 밟았다. 농구대잔치의 인기 속에 고교 졸업후 태평양화학에 입단한 그는 당시 업계 라이벌 팀이던 한국화장품의 거인 센터 김영희와 경쟁을 하게 됐지만 장신에다 순발력과 유연성에서 앞서 적수가 되지는 않았다. 홍영순·홍혜란 등 숭의여고 선배들과 함께 태평양화학의 ‘무적 함대’ 시기를 이끌었다. 박찬숙이 활약하던 1980년대까지 한국 여자농구가 국제 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센터 박찬숙이 외국 선수들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박 감독은 LA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뒤 젊은 나이에 돌연 은퇴를 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똑같은 생활이 반복돼 심신이 지쳐 결혼을 하면 농구를 잊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은퇴 후 결혼을 했지만 정작 농구와 헤어질 수는 없었다. 주위의 요청에 방송사 농구 해설도 했고, 대만의 백금 보석팀에서 플레잉코치로도 활약했고, 농구교실도 운영했다. 국내에 복귀한 뒤에도 코치 겸 선수·주부 선수 등으로 늦게까지 선수 생활을 하면서 귀감이 되었고, 여자프로농구연맹(WKBL) 경기운영본부장으로도 활약했다. 송충이는 역시 솔잎을 먹어야 했던 것이다.
농구 인생을 50년 넘게 살아온 박 감독이 백지 상태의 신생팀에 자신만의 농구 색깔을 어떻게 입혀 나갈지 자못 궁금하다. 박 감독의 선전을 기원한다.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좋아요
감동이에요
화나요
슬퍼요
추천해요0
좋아요1
감동이에요0
화나요0
슬퍼요0
연재기획 ‘반대세의 비밀’ 
연재소설 ‘최초의 당신’
기사제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