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지금까지 환국과 배달국 역사를 중점적으로 살펴봤는데, 고대부터 도를 넘는 역사 도둑질을 하는 중국과 일본의 비열한 역사변조 왜곡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일제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나타난 “석유환국(昔有桓國)-옛날에 환국이 있었다”을 환인(桓因)으로 바꿔 고조선의 입국사실을 깎아버리고 환인(桓因)과 환웅(桓雄)의 신화적 존재로 조작했다. 불교가 지배세력이 되며 비사실적인 “옛날에 환인(桓因)이 있었다”는 것을 인용, ‘옛날에 환국(桓國)이 있었다’를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바꿔 변조시켰다.
그러나 환국(桓國)은 불교가 발생하기 이전의 역사임을 생각하면 제석(帝釋)이라고 해석되는 환인(桓因)이 변조된 기록이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일인들이 이를 결정적 빌미로 삼아 환국(桓國)으로 표기된 진본사서(眞本史書)까지 위조해가며 환국(桓國)을 없애고, 고조선까지도 해체하여 그 역사의 전부를 말살하려 했던 것이 모두 드러나고 있다. 환인(桓因)이란 ‘우리민족이 받드는 하느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시영(李始榮) 선생은 ‘감시만어(感時漫語)’에서 해설하고 있다. 또한 환웅(桓雄)은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전통적 존숭(尊崇)의 뜻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최태영 선생은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17~18면)에서 언급하고 있다. 환국이 실재한 것에 대해서는 조선영조 때 이종휘(李種徽)선생에 이어 일제 강점기에도 신채호, 최남선, 문정창 선생 등이 방증한데에서도 알 수 있다.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선생은 조선사편수회 제6회 위원회에서 삼국유사의 개찬을 지적, 천인망필(淺人妄筆)이라고 울분을 터뜨린다. 육당의 지적은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의 정본(正本)이 발견돼 이마니시 류(今西 龍) 등 일본인 학자들이 개찬한 것임을 확연하게 입증하게 됐다. 조선사편수회 촉탁위원으로 조선사편찬에 앞장섰던 이마니시 류(今西 龍)는 삼국유사 정덕본(正德本)을 영인(影印)해 단국고기(檀國古記)에 나오는 석유환국(昔有桓國)을 석유환인(昔有桓因)으로 개찬, 교토대영인본이라 이름을 붙여 각계에 배포했다. 지금까지도 학노들은 이 삼국유사해설 조작된 기사를 그대로 인용하며 우리 상고사를 말살하고 있다. 원문은 ‘석유환국(昔有桓國)<謂帝釋也>庶子桓雄’으로 돼 있다. “옛날에 환국이 있었다”의 환국 두 글자를 1902년과 1916년 일본 학자들이 온전하게 진본대로 표기하고 있었다.
또한 삼국유사에서는 단군(檀君)도 단군(壇君)으로 표기 돼 있다. 일제는 우리민족의 기원을 밝힌 개국사(開國史)는 한권도 남기지 않고 민족기원과 관련되는 사서(史書)들을 모조리 탈취 소각하고 인멸했다. 그들의 역사 왜곡에 이용될만한 고려시대의 사서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7언한시(七言漢詩)로 된 ‘제왕운기(帝王韻紀)’만 남겨뒀다. 삼국사기는 삼국이전의 상고사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고, 삼국유사는 단군을 불교 신화로 각색한 것이다. 삼국유사는 ‘석유환국(昔有桓國)<謂帝釋也>庶子桓雄’이라고 기록, 단군을 제석(帝釋)의 아들로 만들어 놓았다. 삼국유사는 단군을 불교 신화처럼 각색한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 불교의 꺼풀을 걷어내면 거기에 단군이 나타난다. 환국에서 단군에 대한 사서(史書)로는 북애(北崖)의 규원사화(揆園史話), 조대기(朝代記), 태백일사, 진역유지, 삼성기(三聖紀) 상·하, 신황기(神皇紀), 환단고기 등 많은 사료가 있는데 이번 칼럼부터 고조선(단군조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단군조선의 건국과 고조선시대의 역사
단군은 서기전 2333년 지금은 중국 땅이라는 요동에 (고)조선을 개국하고 2096년간 47대에 걸쳐 통치해온 임금들, 즉 배달왕검(배달은 박달나무, 왕검은 임금이라는 말의 이두)을 가리키는 한문 식 명칭이다. (고)조선은 여러 부족들을 하나로 통일해 최초의 단합된 민족국가를 이루었기에 우리 역사의 기원으로 중요시 되는 것이다. 단군은 아사달(阿斯達)에서 국민들의 추대로 천제자환검홍성제(天帝子桓儉弘聖帝)가 되니 이분이 초대 단군이 돼 대조선국을 개국한다.
단군의 내력을 보면,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아버지는 배달국18대 거불단천황(居弗檀天皇)이며 어머니는 웅씨족(熊氏族) 단국(檀國)의 왕녀이다. 서기전 2370년 5월2일 인시(寅時)에 탄생했다.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 태원(太源)을 아내로 맞아 네 아들을 두었는데 부루(扶婁), 부소(扶蘇), 부우(扶虞), 부여(夫餘)이다. 단군왕검은 신성한 인덕(仁德)이 있어 원근(遠近)의 모든 사람들이 감화하고 복종했다고 한다. 14세 되던 갑진년(서기전2357)에 웅씨족(熊氏族)의 왕은 그가 신성하다 함을 듣고 그를 비왕(裨王:副王)으로 삼고 대읍(大邑)의 정치를 대행하도록 했다. 이후 서기전 2333년에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阿斯達)의 단목(檀木)터에 이르니 온 나라사람들이 받들어 천제자(天帝子)로 추대했였다. 이에 구환(九桓)의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지성으로 복종해 하나로 뭉쳐서 통일됐고, 이 때 나라이름을 조선(朝鮮)이라고 했다.
단군조선의 건국에 대한 단군세기(檀君世紀), 단기고사(檀奇古史), 규원사화(揆園史話), 세가보(世家譜)를 보면 단군조선의 왕을 단군왕검 또는 환검홍성제(桓儉弘聖帝-세가보(世家譜:卷一)라 하니 비왕(裨王)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제위(帝位)에 있기를 93년이었다. 배달국 제1세 환웅천황의 개국으로부터 1566년(서기전 2333)이 되는 10월 상달(10월) 구환(九桓)의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천제자(天帝子), 곧 천자(天子)요 단군(檀君)이 됐다. 단군이라는 명칭은 이후 왕이라든가 하는 용어로 변화됐다.
오늘 날 단군을 두고 벌어지는 비극은 오랫동안 한국인들에게 단군이 누구인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주어지지 못한 때문이다. 일제가 환국과 배달국을 아예 역사에서 지우고 거론조차 않고 우리 역사 말살을 기도했다. 그들은 일본 역사는 없는 역사를 조작해 늘리고, 우리역사는 엄연히 실재한 환국과 배달국마저 빼어 버리고 우리의 장대한 역사를 절반 이하로 잘라버린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했다. 그들은 황당하게도 조작한 일본 황통사의 식민사관을 조선인들에게 그대로 교육하는 바람에 우리 조상들의 뿌리가 잘려나갔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사를 심도 있게 연구해 보면 위대한 환국과 배달국, 고조선의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알게 된다.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은 대대로 내려온 상식
오래전부터 환국과 배달국, (고)조선 임금들이 우리 조상이라는 것은 1만여년 동안 한국인에게 자자손손 전해내려 온 상식이었다. 중국인들은 역사를 자기들 뜻대로 재구성해 버렸지만 역사책과 달리 지리책만큼은 변조할 새가 없었다. 중국의 세계지리지인 산해경(山海經)에는 고조선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산해경에는 “(고)조선인들이 한문을 쓰게 된 뒤 나라이름을 아사달(阿斯達)에서 조선(朝鮮)이라 하고 배달임금을 단군이라고 했다”하는 내용이 있다. 이처럼 ‘조선의 음이 조선(潮仙)과 같다는 설명이 나온다. 여기의 조선(潮仙)이란 단순히 그 음을 차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강역은 동서가 3만리요 남북이 5만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고)조선의 단군들은 우리 조상의 실제 인물들이다. 우리는 그 중에서도 고조선을 개국한 대표 단군을 최고의 조상으로 섬겨왔고 역경 때마다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단군의 자손‘이라며 굳게 뭉칠 수 있었다. 또한 우리는 중국 중원(中原)과 요동(遼東)땅을 통치했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고조선말기에 이르러 화하족(華夏族)의 증가와 고조선이 힘이 미약해지면서 지금의 중국 대륙에서 밀려났으나 한반도 북부의 강력한 왕국 부여(夫餘)는 이 일대 한민족(韓民族) 가운데 가장 늦게까지 단군의 제위를 이어갔다. 우리는 부여(夫餘)와 가야(伽倻)역사도 소홀이 하는 경향이 있는데, 부여는 강력한 국가였으며 가야는 490년의 왕조였고 일본에 먼저 진출해 일본에 임나라는 식민분국을 세우고 일본을 깨우친 선조들이다. 일본 오카야마에 가야가 있다.
우리는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중국과 일본에 앞서 한민족(韓民族)이 중국대륙 중원과 만주, 한반도, 일본에 먼저 선주(先住)해 문명을 일으키고 문화를 일궈낸 선진국이며 주인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최태영 선생은 황해도 장련에 대해 “구월산이 뻗어 있는 곳인데 삼성사란 단군사당이 있었고 송관이란 곳에는 조선의 옛 이름을 딴 아사나루, 단군조상에게 제사를 올리고 민족제전을 펼치던 장소 소도(蘇塗)를 나타내는 솟대백이가 있었다”고 말했다. 외국의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가 사실임을 언급한 것이었다. 그리고 글자가 없을 때 제전(祭典)에는 오랜 역사와 역대 임금으로부터 교훈을 세년가(世年歌)라는 노래로 전승됐음이 ‘세종실록’에 나온 것을 언급했다.
일제는 조선을 침탈하면서 자신들보다 1만년 가까이 앞선 유구하고 우월한 역사를 가진 조선인들에게 그 옛날 “(고)조선이라는 강대하고 우수한 한민족(韓民族)이 광활한 영역을 가진 대국이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해서든지 잊어버리도록 해야만 통치가 수월했기 때문에 일본은 환국(桓國)의 3301년과 배달국환웅천황(倍達國桓雄天皇)이 1565년간 다스린 상고시대의 환국과 배달국은 물론 고조선도 단군도 모두 실재(實在)가 아닌 신화(神話)라는 사상을 퍼뜨리느라 환국이 기재된 삼국유사를 불태우거나 변조하고 일본이 일찍이 한국을 지배하기도 했다는 거짓말을 사실처럼 날조했다.
우리역사 제대로 알아야 한국인이다
지금 우리나라 기성인들은 일본의 날조되고 왜곡·변조된 역사밖에 모르는 참으로 비참한 역사비극을 낳고 있다. 중국대륙의 중원에서 5대문명은 물론 문물제도로 세계를 주도한 우리역사를 한국 고대사 왜곡의 앞잡이 이마니시(今西龍)의 부류가 망가뜨렸다. 그들은 ‘한국사는 신라 때부터 시작’이라는 말도 아니 되는 설을 ‘실증주의 사학’이라고 호도하며 신라이전 수천 년의 한국고대사를 못 믿을 것으로 돌려 버렸다. 그러나 어느 것이 진정한 실증주의 역사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당시의 적대국인 일본인들이 한국사를 질시해 조작한 사실을 한국인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신 나간 미친 짓이며, 그것이 얼마나 한국인들의 민족정기를 잃게 하고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을 키워 왔는가를 깨달아야 한다.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 아고기요히코(吾鄕淸彦)도 “중국사기(中國史記) 25권은 고대조선이 현 중국 중원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가지고 마치 중국이 고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작업을 한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 학자 푸틴은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이 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연(燕)나라나 주(周)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고 말하며 “중국과 일본은 없는 역사도 조작해 가는데 한국은 있는 역사도 제대로 말하고 있지 않다”고 한탄했다. 중국은 우리의 문물을 수입했으며 한자(漢字)도 우리가 창제했다.
중국의 저명한 임어당(林語堂)박사는 안호상 박사와의 대담에서 “중국은 한자도 빌려 쓴다”는 말에 안호상 박사는 역사공부의 계기가 됐다고 했다. 중화민국의 총통이었던 장개석 총통은 “나는 백제가 장악했던 절강성에서 낳았다”고 말하며 “당신들의 선조는 대륙의 주인이었는데 그것도 모르니 나라를 빼앗겼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 외의 중국학자들 왕동령(王棟齡), 임해상(林惠詳)교수며 필장박(畢長樸) 학자, 노간(勞幹-대만학자), 양관(楊寬) 등은 중국 한족이 들어오기 전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는 묘족(苗族=韓民族)의 영속지였다고 언급했다. 그 당시 배달국14대 치우천황(蚩尤天皇)=(慈烏支天皇 서기전 2707년 즉위)이 다스렸다고 한 것이다.
필자는 상고사에서 환국과 배달국에 대해 상세히 기술했다. 우리나라의 단군에 대한 사서로는 삼국유사보다 560년 전에 대조영의 아우가 대야발(大野勃)이 쓴 단기고사(檀奇古史)를 비롯해 조대기(朝代記), 단군세기(檀君世紀), 북애거사(北崖居士) 범장(范樟)이 편찬한 북부여기(北夫餘紀), 규원사화(揆園史話-檀君實史), 환단고기, 신단실기(神檀實記), 동사연표(東史年表), 조선사략(朝鮮史略), 대동사강(大東史綱), 조선역사,-(李昌煥著), 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 해동춘추(海東春秋), 민족정사(民族正史), 태백일사(太白逸史) 등이 있다. 이중 소각된 것도 있으나 존화사대주의(尊華 事大主義)로 단군격하풍조는 아직도 지속돼 우리나라에는 국사가 없다고 하리만큼 한국역사는 황폐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상고사에 대한 역사인식체계를 바로 한 규원사화(揆園史話)로 이병도 박사도 고대사와 단군은 실재(實在)한 사실을 고백했다.
1997년 김영삼 정부는 고시과목에서도 국사를 빼어버리는 무지를 범했다. 지금 우리는 역사를 바로 세워야만 나라가 변할 수 있는데, 바른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주 소수일 뿐만 아니라 역사 바로세우기에는 관심조차 없는 상태다. 1945년 조국 광복 후 올바른 우리역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은 우국지사와 재야사학자들에 의해서 꾸준히 연구되고 있을 뿐이다. 이들에 의해 올바른 역사가 펼쳐지고 있음은 그나마 불행 중 다행한 일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인간 단군을 찾아서’ ‘한국상고사’. 최인 ‘한국학강의’,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한창건 ‘환국, 배달, 조선사신론’,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한창호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 ‘조선민족사’,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김부식 ‘삼국사기’,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梶村秀樹 渡部學 編者 ‘日本に訴える シリ-ズ 日本と朝鮮’, 貝塚茂樹‘中國の歷史’,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西嶋定生·護雅夫·木村尙三郞·猿谷要 ‘世界歷史の基礎知識1·2’. 酒井忠夫· 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외 다수서책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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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며
2014-06-26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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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민족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는 아무래도 자기문화 우월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한민족의 개념이 언제 성립되었나요? 이것을 규명하지 않으면, 세계사의 모든 것을 한민족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각 민족마다 모든 세계사는 일본사요, 중국사요, 몽골사요, 스페인사요, 기타 등등 민족역사의 확대판이 됩니다. 각 민족은 자기가 세계에서 가장 우월한 민족이 되구요.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그 과거의 인식을 언제나 현재에 직면한 나의 태도나 입장에서 결정되기 마련입니다. 과거를 자기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면 끝 없이 왜곡하게 되는 방향을 걷게 되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정보를 찾게 됩니다. 그것을 내부적인 정당성을 획득해서 점차 그럴 듯하게 보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