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178] 걸시승 원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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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 대신 시를 외웠다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9-19 06:30:20

창수는 바로 승낙하지 않았다.

“소승이 지금 주지승보다 더 낫다는 보장이 있겠습니까?”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제가 사람 볼 줄 압니다. 대사께서 허락하셨으면 합니다.”

깔끔한 선비 최재학은 창수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는 전효순 노인에게 평양부 서윤에게 가서 방주 임명장을 받아오게 하였고, 전효순은 바로 서윤을 만나 원종을 영천암 방주로 임명한다는 첩지를 받아왔다.

창수 입장에서는 참으로 좋은 제안이었다. 숨어 지내는 처지에 주지승만큼 좋은 자리가 없었다. 최재학과 같은 학자와 교유하는 것도 즐겁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걱정 없이 부모님을 모시고 살 수도 있었다. 창수는 혜정 스님과 함께 영천암을 정돈하고는 방 하나를 정해 부모님과 함께 지냈다. 영천암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전효순 노인의 아들과 외손자 외에도 몇 명 더 있었다. 전효순 노인은 매일 정성껏 상을 차려 보내 주었다.

창수는 산 아래 푸줏간에서 고기를 가져다가 먹었다. 평양성에 내려가서 최재학 등 선비들과 어울려 종종 시를 지으며 놀았다. 평양 기생들이 창수가 지은 시에 곡조를 붙여 노래를 하기도 했다. 밤에는 대동문 옆에서 면을 먹었는데 처음에는 소면을 먹다가 나중에는 고기가 들어간 육면을 먹었다. 창수는 승복을 입은 채 드러내놓고 고기를 먹었고 염불 대신 시를 외웠다. 그런 그에게 ‘걸시승(乞詩僧) 원종’이란 별명이 붙었다.

어느 날 참다못한 혜정 스님이 창수에게 충고했다.

“원종 대사, 영천암 주지가 되셨는데 고기와 술을 하신다면 이전 주지와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대사와 동행한 것은 금강산에서 불도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말씀에 감복해서였습니다.”

“혜정 스님, 나는 목숨을 부지하려고 잠시 부처님 슬하에 머물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 원종이란 중은 세상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게다가 지금 강한 나라들이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눈을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광무황제께서는 새 나라 대한제국을 만드셨지만 아직은 서양의 제국들 같은 힘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소승은 불정토보다는 대한제국에 마음이 갑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혜정 스님께서 나를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창수는 혜정에게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하지만 창수가 불심에서 멀어지는 것을 그저 손 놓고 보고 있는 혜정의 마음은 갈수록 아수라가 되었다. 그는 조용히 창수의 곁을 떠나려 하다가는 되돌아오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힘들어했다. 창수는 혜정 스님을 놓아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는 노잣돈을 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어려울 때 우연히 만나 힘이 되어 준 혜정 스님이지만 이제 헤어질 때가 된 것이다.

창수는 영천암에 온 후 더 이상 머리를 깎지 않았다. 아버지가 삭발을 반대하셔서였다. 그러다 보니 머리가 길게 자라 장발승이 되었다. ‘손에는 돼지머리를 들고 입으로는 거룩하게 경전을 외우는 장발승 원종’의 모습은 위선 그 자체였다. 자신의 편의와 생존을 위해 이렇게 사는 것은 창수의 마음에 해로웠다. 그해 가을 창수는 승복을 벗고 상투를 틀고 영천암을 떠나 부모님과 함께 해주 텃골로 향했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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