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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1차 전쟁(598)
양량의 말 속에는 가시가 있었다. 연자유와 같은 하찮은 자를 상대하는 일은 왕세적에게 맡기고 수장인 자신은 좀 더 중요한 일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한왕은 문제가 자신을 믿지 못하고 왕세적을 딸려 보낸 일을 내내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둘째 형 양광이었다면 이처럼 어린애 취급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불만은 왕세적에 대한 경원(敬遠)으로 나타났다. 주도권을 의식하는 양량의 귀에 부원수의 조언은 잔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요택은 요하 하구의 낮은 지대로 강물이 범람하여 조성된 습지였다. 대부분 땅이 진흙탕이나 습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찍부터 이 지역을 오가던 사람들은 흙과 돌을 부어서 길을 닦았다.
석양이 지는 요하는 아름다웠다. 핏빛으로 물드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하늘이 피를 흘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강물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 있던 강이식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요택의 벌판을 바라보았다. 대지는 검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이제 곧 장마가 시작되면 이 땅은 무수히 많은 이의 피로 적셔지리라.
“길에 판석(板石)을 깔아 정비를 마쳤습니다. 곳곳에 아군만 알 수 있는 표식을 해 두었습니다. 여기 지도에 상세히 표시해 두었으니 길이 진흙에 묻혀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강이식은 부장 고중(高中)의 보고를 받고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날, 영주를 쳐서 수문제를 분노케 했던 것은 전략의 테두리 속에서 충분한 계산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치리라는 것은 명백했다. 다만, 그 시기가 문제일 뿐이었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그 시기를 아군에 유리하도록 조정해야 했다. 고구려의 선제공격으로 바라던 시기에 수나라 군대가 움직이도록 했으니 작전은 일단 성공이었다. 그들은 고구려군이 쳐놓은 함정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요동성과 안시성·건안성은 벌써 전투태세에 돌입했습니다.”
강이식은 부하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수군이 이곳을 지나려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이야. 저들에게는 왕세적이란 명장이 있으니 어떻게든 요택을 통과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 살아 돌아갈 수는 없으리라.”
도원수는 한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적수는 오로지 왕세적이었다. 그를 능가한다면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해로 쪽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부원수인 건무가 전열을 정비하고 물샐틈없이 경계하고 있었기에 수군 선단이 바다를 통과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게다가 천문을 보니 한동안은 일기가 심상치 않을 조짐이 보였다.
강이식이 생각을 정리하고 고중에게 말했다.
“이 길로 건무 장군에게 달려가 내 말을 전하라. 어제 하늘의 움직임을 보니 남두육성의 빛이 흐려지고 있었다. 이는 필시 용왕(龍王)의 진노가 일어날 징조다. 전선을 단속하여 바다로 나가는 일을 금해야 한다. 시급한 일이니 조금의 지체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말을 전한 후에는 그곳에 머물며 부원수를 돕도록 하라.”
용왕의 진노란 엄청난 태풍을 말하는 것이었다.
고중은 명을 받자마자 즉시 말을 달려 평양으로 향했다.
강이식은 건안성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이제 수군(隋軍)을 맞을 준비는 끝났다. 하늘이 돕는다면 이번 전쟁은 큰 피해 없이 승리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앞날은 변화무쌍하여 정확히 예측하기 어려웠다. 자신감도 좋지만, 변수에 대한 치밀한 대비가 있어야만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도원수는 초조한 마음을 떨쳐 내기 위해 말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말이 놀라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요동의 거센 바람이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다.
왕세적은 언덕에 올라 유성을 바라봤다. 성벽 위에서 펄럭이는 고구려의 백호기(白虎旗)가 눈길을 끌었다. 성벽을 지키는 군사들의 절도 있는 모습에서 군기가 정연함을 알 수 있었다. 공성전을 펼쳐 성을 함락시키기가 녹록지 않아 보였다. 지금으로서는 고구려군을 성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최선의 작전이었다. 유성을 그대로 놔두고 요하로 곧장 나아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성을 공략하는 데 자신을 보낼 것까지는 없었다. 왕세적은 몇 번이나 재고해 달라고 한왕에게 요청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유성으로 향하기는 했지만 행군 내내 양량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그에게 요택을 조심하라고 누누이 일렀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기색이었다.
왕세적은 한시라도 빨리 유성을 되찾고 한왕에게 달려가야 했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어느새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가득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듯했다.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졌다. 기나긴 장마의 개시를 알리는 전조였다.
얼굴에 빗방울이 닿자 왕세적은 뜨거운 촛농이라도 맞은 듯 흠칫 놀랐다. 평소에도 지나기 힘든 요택인데 비까지 쏟아져 진창길로 변하면 수군은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걱정을 떨쳐 버리려는 듯 휘하 군사들에게 진군을 재촉했다. 5만의 군대가 유성을 향해 쇄도해 갔다.
성 앞에 당도한 왕세적은 성벽 위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천자의 군대가 왔으니 연자유는 성문을 열고 항복하라! 지난날의 죄과는 묻지 않겠다!”
연자유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의 됨됨이로 볼 때 항복을 권유하는 말은 참기 힘든 모욕일 터였다.
성벽 위에 선 연자유는 아래를 굽어보며 대거리했다.
“웃기고들 있구나! 하늘의 아들이라 일컬을 수 있는 분은 오직 우리 대왕 폐하뿐이다! 천제께서 함부로 천자라 칭하는 너희에게 천벌을 내리실 것이다!”
연자유는 예상과 달리 움직이지 않았다.
거대한 방죽도 작은 구멍 탓에 무너져 내리는 법이었다. 왕세적의 충동질은 끈질기게 계속됐다. 이번에는 욕 잘하는 부하들을 뽑아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쏟아 냈다. 주변 사람들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심한 욕이었지만 연자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왕세적은 단순히 연자유의 성질을 자극해 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일단 성 앞에 진을 치고 군사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했다.
다음 날부터 세상은 온통 빗속에 갇혀 버렸다. 빗방울이 대지를 때리는 소리 때문에 군호조차 희미하게 들렸다.
수나라 군사들은 풀로 엮어 만든 도롱이를 걸치고 벌판에 집결했다. 이제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됐지만 그렇다고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왕세적은 가볍게 성을 공격하면서 고구려군의 허실을 탐색하기로 했다.
수나라 군대는 1만 명씩 대를 나누어 번갈아 유성을 공격했다.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수군의 공격은 고구려군의 기운을 빼기에 충분했다. 그 과정에서 수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왕세적은 개의치 않고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다 보면 고구려군의 피로가 쌓여 갈 것이고 연자유의 참을성도 바닥을 드러낼 것이었다.
한왕의 전령이 도착했을 때 유성에서의 공방전은 보름 동안이나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전령은 온몸이 진흙투성이였고, 군복은 해질 대로 해져서 본래 모양이 어땠든지 짐작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왕세적에게 아룄다.
“아군이 요택에서 고립됐습니다.”
왕세적이 걱정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자신만만하게 요택으로 향했던 한왕은 금방이라도 요하를 건너 요동성으로 내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구려군이 강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분오열한 소국들을 상대했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 앞에서는 호랑이 없는 산의 여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구려 장졸들에게 각인시켜 주고 싶었다. 이번 원정이야말로 둘째 형의 이름 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길 다시없는 기회였다.
욕심은 종종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한왕은 마음이 앞선 나머지 장마철에 요택을 건너는 무리수(無理數)를 뒀다. 비는 그치지 않고 몇 날 며칠을 내렸다. 어디가 늪이고, 어디가 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미지의 공간에 갇혀 버린 듯했다. 사방은 점차 광활한 진흙 수렁으로 변해 갔다.
수나라 군사는 방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마치 망망대해(茫茫大海)에서 풍랑을 만나 돛과 닻을 모두 잃고 표류하는 난파선 같은 신세였다. 많은 비로 불어난 요하가 범람하면서 요택의 수위가 점차 높아졌다. 군량미를 실은 수레는 진흙탕에 빠져 꼼짝하지 못했고, 지대가 낮은 곳에서는 군사의 허리까지 물이 차올랐다.
그래도 양량은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오랜 시간 차가운 비를 맞으며 진흙 구덩이를 헤쳐 오느라 지친 군사들을 채찍질하며 진군을 거듭했다. 기진맥진한 군사들은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군량미 수레도 진창길에 빠져 앞으로 쉬이 나갈 수 없었다. 결국 보급은 끊겼고 군사 개개인이 소지한 식량조차 바닥을 드러냈다.
배고픔과 무리한 행군, 그리고 비위생적인 환경이 지속되자 군사들 사이에 수인성 전염병이 돌았다. 병마는 삽시간에 수군을 덮쳤다. 많은 군사가 제대로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요택에 갇힌 지도 열흘이 지났다. 군사들은 물론이고 수장인 한왕까지도 극도로 지친 상태였다. 이러다간 고구려군은 구경도 못 하고 전멸할지 몰랐다.
한왕은 왕식충을 불러 의논했다.
“아무래도 군대를 철수하고 훗날을 기약해야겠네. 이런 식이면 고구려군과 싸우기도 전에 모든 군사를 잃겠구나.”
“싸워 보지도 않고 철군한다면 폐하를 무슨 낯으로 뵙겠습니까. 게다가 일대가 모두 이런 진창이라면 회군도 쉽지 않습니다.”
왕식충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온 길을 다시 돌아가는 일도 만만치는 않았다.
“제가 아직 여력이 남아 있는 군사들을 모아 길을 열고 요하를 건너 교두보를 만들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이곳에 머물면서 몸을 추스르고 계시다가 제게서 연락이 오면 움직이십시오.”
한왕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미 군사의 수효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남은 군사들도 많이 지쳐 있었다.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군사 3만을 뽑아 왕식충에게 건넸다.
“내 오직 너만 믿겠다.”
양량은 솟구쳐 오르는 설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왕식충의 눈가도 불에 덴 듯 달아올랐다.
“소장만 믿으십시오. 결코 전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흙탕물이 흥건한 진지에서 얼마 남지 않은 식량으로 밥을 지어 먹은 왕식충과 선발된 군사들은 비장한 마음으로 길을 떠났다.
왕식충이 이끄는 선발대는 추위와 배고픔을 무릅쓰고 지옥 같은 진흙 길을 지나 요하에 다다랐다. 많은 비로 불어난 강물은 거칠게 강변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절대 도강(渡江)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세차게 꿈틀거리면서 흘러갔다. 군사들은 넋이 나간 채로 강물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 위로 차가운 빗방울이 그치지 않고 떨어졌다.
왕식충은 부하들을 다독여 주변의 나무를 구해다가 뗏목을 만들었다. 빗방울이 잦아들자 수나라 군사들은 강물 위에 뗏목을 띄웠다. 거센 물살을 이기지 못한 뗏목들이 하나둘씩 뒤집히면서 군사들이 강물에 쓸려 내려갔다. 그런 상황에서도 군사들은 장대로 강바닥을 밀면서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왕식충의 군대는 많은 대가를 치른 뒤에야 간신히 요하를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들이 겪은 고초는 파멸을 위한 전주곡에 불과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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