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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용 감독(시베리안 타이거 프로텍션 소사이어티 공동대표) ⓒ스카이데일리
이번에는 예감이 빗나가지 않았다. ‘다복솔’ 밑에 뭔가 음영이 보인다. ‘꿈틀꿈틀’ 구렁이 같은 꼬리가 보이기 시작하더니 희미한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천지백’이다. 그녀의 아들 녀석이다. ‘월백’ ‘설백’ 까지 삼남매가 모여 말울음 소리를 내며 서로 비벼댄다.
‘뿌드득, 뿌드득’
그때였다. 등뒤에서 눈 밟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붕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머리 30cm 위에서 그녀가 삼남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흥분과 초조감이 교차한다. 그녀를 본 삼남매는 좋아들 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애로운 눈빛이 아니다. 뭔가 낌새를 챈 눈치다.
‘이렇게 하면 안되는데…’ 생각 뿐이다. 해선 안 되지만 카메라를 바짝 당겨 그녀를 따라 다녔다. 그녀의 푸른 안광과 마주쳤다.
블러디 메리(Bloody Mary). 사냥이 잔인하기로 소문이 나 16세기 수많은 신교도를 처형했던 영국의 여왕 메리1세를 따 붙여진 이름이다. 연해주 원주민인 여진족의 후예 ‘우데게’들이 블러디 메리가 사냥한 자리에는 늘 피가 흥건해 붙여 줬다. 하지만 그들도 흔적만 보았을 뿐 블러디 메리를 만난 적이 없었다.
▲ 시베리아 암호랑이 블러디 메리(Bloody Mary). 사냥이 잔인하기로 소문이 나 16세기 수많은 신교도를 처형했던 영국의 여왕 메리1세를 따 붙여진 이름이다. <사진=박수용 감독 제공>
시베리아 연해주 땅굴 속에서 그토록 보고 싶던 블러디 메리와 세 자식들을 만났다. 그러나 흥분도 잠시 카메라 렌즈를 향해 오는 블러디 메리. 시선을 고정시킨 채 걸어 갔던 그 흔적을 그대로 되돌아 밟아 온다. 뷰파인더에서 그녀가 사라졌다. 빅클로즈한 게 실수다. 민감한 렌즈를 만지기 위해 비트(잠복지) 위장 담요 사이로 나간 맨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렌즈를 걷어야 하나? 아니다. 그녀에게 들키고 만다. 그러면 그녀를 보기위한 수년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간다. 내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만다. 어찌한다. 지금 움직여도 방법이 없다. 시치미를 떼자’ 식은 땀이 흐른다.
뿌드득 눈을 밟는 호랑이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 이윽고 멈췄다. 뜨거운 콧김이 느껴지더니 호랑이의 뻣뻣한 수염 몇 가닥이 손등을 스쳐갔다. 손이 떨려 렌즈를 꽉 잡았지만 살이 떨린다.
▲ 머나먼 영역순례를 마친 호랑이들이 늘 향수를 느꼈던 고향에 돌와왔을 때 이런 표정을 지으며 냄새를 맡는다. <사진=박수용 감독 제공>
그녀가 렌즈를 걷어 차고 공격을 시작했다. 세 마리의 새끼들도 다가와 합세한다. 영하 30~40도의 추위에 얼어 붙은 흙들이 삽같은 호랑이의 손에 의해 덩어리째 떨어져 나갔다. 비트 위 송판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그 틈새로 호랑이의 거친 숨소리와 냄새가 2m 깊이의 갇힌 공간 속으로 퍼져갔다.
한 놈이 비트 지붕 위로 올라가 위장해 놓은 비닐과 낙엽들을 파헤쳤다. 새끼들의 몸무게는 약 200kg. 세 마리가 올라 와 부셔대니 견뎌낼 수가 없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비스듬히 무너진 송판과 함께 호랑이 뒷 발이 빠져 들어왔다. 그놈도 기겁을 했다. 앞발로는 당기고 뒷발로는 차면서 겨우 튀어나갔다.
‘만약 앞발이 빠졌다면 그 놈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날 해쳤을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적이 흐른다. 다시 30분 후 ‘뿌드득’ 소리가 들리더니 공격이 또 시작됐다. 새벽이 다 돼 그들은 갔다.
서둘러 무너진 송판을 카메라 삼각대로 받쳐 세우고 새벽에 다시 올 그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이미 비트안은 바깥 온도와 같아졌다. 요기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얼어 붙었다.
‘그런데 그들은 다시 올까?’ 그들을 맞닥뜨렸을 때의 공포감보다 내 흔적이 들통 나 오히려 오지 않을까 걱정이다.
설 잠이 들었을 때 오디오에서 ‘뿌드득’ 소리가 다시 들렸다. 또 공격은 시작되고….
공포와 흥분이 함께 했던 ‘블러디 메리’와의 첫 만남
▲ 2003년 연해주 동해안 블러디 메리 영역에서 찍은 모습. <사진=박수용 감독 제공>
“그렇게 5일을 땅속에 갇혀 버티고 그들의 의심이 사라졌다는 확신이 든 후 6일째 나왔습니다. 그게 1999년 크리스마스 때 블러디 메리와의 첫 만남이었죠”
박수용 감독(50)이 블러디 메리를 화면에 담기 전 까지 전 세계에 시베리아 호랑이를 촬영한 영상은 단 3분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마저도 올가미에 걸린 호랑이 영상이 전부였다. 그는 22년동안 자연 다큐멘터리만 찍었다. 그 중 17년을 호랑이만 추적, 시베리아 호랑이 야생 그대로의 모습을 1000시간이나 영상으로 담았다. 이 세상에서 야생 호랑이를 5000시간 이상 눈으로 직접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다.
“시베리아 호랑이가 움직이는 반경이 워낙 넓다보니 직접 촬영하지 못하고 올가미를 설치해 무선전파기를 달아 그들의 생태를 추적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1마리를 잡기 위해 7~8마리가 올가미에 걸려 사망을 하죠. 이는 야생을 촬영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 낸 방법이 호랑이가 다니는 길을 따라 땅굴을 파고 호랑이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방법이었다. 당연히 어렵고 힘든 고난의 과정이다. 지루한 시간과 내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 박수용 감독이 17년간 시베리아 호랑이를 추적해 그들의 야생을 담아 기록한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 <사진=박수용 감독 제공>
소몰이꾼이 시베리아 호랑이를 찾는 이유
경남 거창이 고향인 그는 소몰이꾼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그 일을 했다.
소를 우시장에 내다 놓으면 그날 팔리는 소가 있고 그렇지 않은 소가 있다. 그날 팔지 못하면 다음날 장이 열리는 곳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당시에는 차에 싣지 않고 소몰이꾼이 소를 몰아다 준다. 그렇게 해서 그가 번 돈은 당시 소 한마리에 60원, 좀 더 작은 소는 30원이었다.
“거창장, 합천장, 고령장, 무주장, 김천장 등지를 돌아 다녔죠. 다음 날 열리는 장에 도착하기 위해 새벽에 수도 없이 소백산맥을 따라 걸었습니다. 눈 내리는 벌판을 하염없이 걷다 보면 달 그림자, 부엉이 소리 등 오묘한 자연에 심취하게 되죠. 시장에서 보았던 인간군상의 느낌과 전혀 다릅니다”
그가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이 된 계기였다. 그는 장이 설 때쯤 시장판에서 돈 몇 푼 때문에 술 먹고 싸우는 모습, 욕하는 사람 등등의 시장과 소몰이꾼으로 새벽에 이동할 때 느낀 자연의 소리와 냄새는 전혀 달랐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은 자연을 담는 일을 하고 싶어 다큐멘터리 감독이 됐다. 어렸지만 자연이라는 미지의 세계가 너무 궁금했다고 한다.
“자연을 과학적 접근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영문학을 선택했죠”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그는 EBS에 PD로 입사했다. 입사하자마자 그는 자연 다큐멘터리만 찍었다.
부엉이, 물총새 등등부터 시작해 조금씩 난이도를 높여갔다. 당시 가장 어려운 것은 시베리아 호랑이의 촬영이었다.
▲ 무인카메라의 셔터에 연결된 낚시줄에 걸린 조선표범(위). 만약 카메라가 아니라 무인총이었다면 이 표범은 죽었을 것이다. 스라소니(아래)는 호랑이, 표범과 함께 큰고양잇과 동물로 그중 덩치는 제일 작지만 가장 독한 맹수다. <사진=박수용 감독 제공>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벵갈호랑이나 아프리카의 사자, 남극의 펭귄 등은 목장 안에 있는 소처럼 촬영할 수 있습니다. 아무나 가서 휴대폰으로 촬영할 수 있어요. 직접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화면속에 담긴 영상이 대단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렝게티 초원을 달리는 사자나 남극의 펭귄을 찍는 것은 ‘촬영할 수 있나 없나’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잘 찍느냐가 관건일 뿐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국제다큐시장에 가면 아프리카나 극지방에서 촬영한 수만편의 영상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시베리아 호랑이는 다릅니다. BBC가 올가미에 걸린 호랑이에 무선전파기를 달아 풀어주는 과정을 담은 3분짜리 영상이 여지껏 전부 였습니다. 그것도 진정한 야생 호랑이를 촬영한 것이 아니죠”
그는 외국의 유명 다큐멘터리 제작사들이 엄청난 자금력과 조직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왜 못 찍었을까’ 고민을 해 봤다. 시베리아 호랑이는 연해주와 만주 그리고 북한에 모두 400마리 밖에 없는데다 돌아다니는 영역이 무려 2000㎢(지리산 국립공원 넓이 472㎢의 4~5배 규모)에 달한다. 벵골호랑이 영역은 불과 20㎢다. 시베리아 호랑이 한 마리가 돌아 다니는 영역이 경상도 땅과 맞 먹는다.
그래서 그는 시베리아 호랑이를 영상에 담기 위해서는 인내력과 정신력으로 그를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했고 그의 판단은 옳았다.
▲ 야생의 수호랑이도 가끔씩 가족을 찾아와 부모 자식의 인연을 이어간다. <사진=박수용 감독 제공>
“시베리아 호랑이를 찍는 것은 산악인이 에베레스트 14좌를 오르는 것과 같은 자연 다큐멘터리의 ‘꿈’입니다. 저는 당시 도전과 정복의 대상으로 시베리아 호랑이를 선택했죠”
하지만 당시 주위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자신이 선택한 방법으로 시베리아 호랑이를 비롯해 한반도에서 사라져 가는 표범, 스라소니 등을 찍겠다고 했지만 모두 부정적이었다.
기획안이 수년동안 거절되고, 스카웃 제의도 받아 타 방송국으로 이직을 했다 다시 EBS로 돌아와, 1995년 첫 사전조사를 시작으로 1996년 연해주로 떠날 때까지 수많은 오해와 우여곡절이 있었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아무도 만들지 못한 컨텐츠를 만들기 위한 그의 신념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1년의 6개월은 촬영하고 싶은 호랑이의 사전조사를, 나머지 6개월은 땅 속에서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 과정을 담은 책이 바로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입니다”
그의 이런 노력으로 지난해 10월에는 미국의 공영방송 PBS와 독일의 테라마터(Terra Mater)사가 박 감독과 블러디 메리의 이야기를 담은 ‘시베리아 호랑이를 추적하다’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세계에 방영하기도 했다.
“멸종위기 시베리아 호랑이 관심 가져주길”
그는 2011년 PD를 그만 뒀다.
“도전과 정복의 대상으로 여겼던 시베리아 호랑이를 만나고 난 후 그들을 알게 되면서 멸종 위기에 처한 그들을 보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호랑이 연구를 하고 있는 갈리나 박사와 함께 ‘시베리안 타이거 프로텍션 소사이어티’를 설립했습니다”
▲ 연해주 군인들이 쳐놓은 무인총에 맞아 죽은 블러디 메리. 그녀는 눈 속을 헤매다 기력을 다해 이 자리에 이렇게 누웠다. <사진=박수용 감독 제공>
보호단체를 만든 것은 멸종위기에 처한 시베리아 호랑이가 생존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의 관심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혼자의 힘만으로 멸종 위기의 호랑이를 살려낼 수는 없다. 기업체나 뜻있는 사람들의 든든한 후원이 절실할 수 밖에 없다.
“북한에 15~20마리, 만주에 30~40마리, 연해주에 350마리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아요. 제가 블러디 메리를 좋아했던 이유는 인간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멸종 위기의 자기 새끼를 정말 잘 키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정작 인간에 의해 죽었습니다”
군인들이 설치한 무인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한 블러디 메리. 군인들이 발견하기 전 박 감독이 먼저 찾아 냈지만 이제 블러디 메리는 박 감독의 책과 영상에만 남게 됐다.
“우리 민족의 자연유산인 시베리아 호랑이를 보호하는 게 첫 번째고 미지의 커다란 흐름인 자연을 컨텐츠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두 번째 꿈입니다”
그는 올 하반기 다시 시베리아로 간다. 영국 BBC와의 공동 제작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블러디 메리는 이제 없지만 그의 후손인 월백, 설백, 천지백, 헨젤, 그레텔을 보고 싶고 그리고 아직 이름을 지어 주지 못한 그레텔 새끼들에게 이름을 지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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