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데일리

오늘 한글 울고싶다…무차별 외래어 뒤죽박죽

오늘 한글 울고싶다…무차별 외래어 뒤죽박죽
[진단]7100만명 쓰는 잡탕한글 순화에 1명 연 6600만원…국어원 ‘나홀로 투쟁’

김도현 기자(dhkim@skyedaily.com)

기사입력 2014-10-09 03:35:22

1443년(세종25년) 글을 몰라 어려움을 겪는 백성을 가엾게 여긴 세종대왕과 집현전학자들의 노력으로 책 한권이 완성됐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었다. 훈민정음의 반포로 고유 문자를 보유하게 된 우리민족은 점차 다양한 계층에서 문자사용이 가능해져 실생활에 큰 편의를 누릴 수 있게 됐다. 만든 목적과 만든 이가 명확한 유일한 문자인 한글은 오늘날 세계에서 13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부상했다. 동양철학에서 만물의 근간으로 삼는 ‘천지인(天地人, ㆍㅡㅣ)’을 이용해 모음을 만들고, 소리가 나는 모양에서 착안해 자음을 만든 한글은 ‘거의 모든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완벽에 가까운 표음문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자음과 모음의 결합 및 받침을 통해 완벽에 가까운 구성을 갖춘 한글은 그 우수성을 널리 인정받아 국보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이 지난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또 유네스코가 매년 문맹퇴치를 위해 힘쓴 개인이나 단체에게 ‘문해의 날(9월 8일)’에 수여하는 상 이름도 세종대왕의 이름을 따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UNESCO King Sejong Literacy Prize)’이라고 정할 만큼 한글의 위상은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추세다. 그러나 이처럼 우수한 언어를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한글의 위상이 점차 낮아지고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한 형편이다. 무분별한 외국어의 유입과 외래어 및 신조어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국립국어원’만이 외로이 우리말 순화사업에 애쓰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 한글은 우리들의 무관심과 방치 속에 그야말로 학대 수준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오늘(9일) 한글날에 한글이 울고 싶을 정도로 이른바 ‘잡탕 한글’이 되고 말았다는 자조섞인 한탄이 그래서 나온다. 스카이데일리가 한글 창제 571돌이자 한글 선포 568돌(세종 28년 1446년 훈민정음 반포)을 맞아 국립국어원 우리말 순화사업의 현 실태와 고충에 대해 긴급 점검해 봤다.

▲ 단 한명의 국립국어원 연구원이 전세계 7100만여명이 사용하는 국어 순화를 위해 개선부터 홍보까지 도맡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올 해 우리말다듬기 예산은 6600만원에 불과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진은 서울시 강서구 방화동의 국립국어원 전경 ⓒ스카이데일리

한국어 연구기관인 국립국어원이 국어순화사업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정부 및 지자체들이 이를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하는 실정이어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984년 당시 문교부 산하 국어연구소로 출발한 국립국어원은 1991년 국립국어연구원을 거쳐 2004년 국립국어원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국립국어원의 주요 업무는 한국어와 한글을 연구하며 이와 관련된 정책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국어순화’, ‘외래어 표기법 운용’, ‘국어사용 실태조사’, ‘간행물 발간’ 등 각종 사업을 진행하며 올바른 한국어 정착에 애쓰고 있다.

훼손된 국어의 품격을 높이고 올바른 표현을 하자는데 목적을 두는 국어순화의 경우 국민의 참여도와 관심이 높은 편이지만, 정작 이를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정부와 지자체의 영어남용은 심각한 수준이어서 엇박자를 내고 있는 모양새다.

인원·예산 부족…‘홍보’ 없는 국립국어원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남은 일본식표현과 무분별한 외국어 및 외래어 등을 순화하기 위해 국립국어원이 꾸준히 진행 중인 ‘국어순화’에 대한 정부 지원은 정말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 자료:국립국어원 ⓒ스카이데일리

현재 국립국어원에서 이 일을 담당하는 부서는 ‘공공언어과’ 내 ‘공공언어지원단’이다. 신문·방송·인터넷 언어 등 공공성에 관련된 언어사용과 올바른 국어 보급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는 공공언어과에서 공공언어지원단은 우리말 다듬기, 전문용어 표준화, 교과서 표현·표기 등의 검수를 맡고 있다.

국어순화는 순화가 필요한 단어를 선정해 참여와 심의의 단계를 밟아 이뤄진다. 단어선정은 국민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채택된다. 이후 국립국어원이 ‘순화가 필요한 단어’를 홈페이지 내 ‘우리말 다듬기’를 통해 공고하면 국민들이 직접 참여해 본래 뜻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국어의 정체성에 벗어나지 않는 이름을 건의한다. 건의된 내용은 ‘말 다듬기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 순화 단어가 선정되는 것이다.

최종 순화 단어가 선정되면 국립국어원 홈페이지 내 ‘이렇게 바꿨어요’를 통해 순화 단어를 공고하고 연합뉴스를 통해 보도 자료를 배포한다. 이밖에도 트위터, 자료집, 국어문화학교 및 각종 문화 강좌를 통해 홍보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립국어원의 순화단어는 널리 사용되지 않는 분위기다. 이를 두고 교육계에서는 제대로 된 홍보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현행 국립국어원의 홍보과정을 들여다보면 일반 국민들이 이를 알기 힘든 구조로 돼 있다는 단점이 있다. 순화된 단어를 알기 위해서는 관심을 두고 이를 직접 찾아봐야 하는 것이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다’고 말하는 것처럼 사회적 측면에서 보면 언어는 널리 사용돼야 정착될 수 있는데 현 상태로는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만 정보가 열려있는 것이다. 언론보도 역시 큰 뉴스로 부각될 확률이 적어 일각에서는 국립국어원의 홍보에 대해 “일반 대중들에게 가까이 갈 수 없는 홍보”라는 비난까지 제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 자료:국립국어원 ⓒ스카이데일리 <도표=최은숙>

하지만 스카이데일리 취재결과 국립국어원 현실상 그 이상의 홍보는 힘든 상황인 것으로 드러났다. 총원 6명의 공공언어지원단 중 국어순화를 담당하는 직원은 고작 한명 뿐이다. 단 한명의 직원이 전 세계 7100만여명이 사용하는 국어의 개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예산지원 역시 빈약하다. 올해 국립국어원에 책정된 전체예산(약 143억원)은 전년도(147억원)에 비해 2.9% 감소한 가운데 공공언어지원단에 책정된 금액은 5억원 수준이다. 이 중 국어순화만을 위해 책정된 예산은 겨우 6600만원 선에 불과했다.

지자체의 과도한 ‘영어사랑’…브랜드 슬로건’ 영어 일색

문제는 이처럼 열악한 상황에서 국어순화운동을 펼치는 국립국어원이 무색할 정도로 가장 모범을 보여야 할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과도한 영어사용을 남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17개 주요 지방자치단체들이 내세운 자체 ‘브랜드 슬로건’을 살펴보면 대다수가 영어로 만들어져 있다. 글로벌시대에 걸맞은 슬로건이란 평가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과하다는 지적이 많다.

지난 2002년 10월 공식 선포된 ‘Hi Seoul’은 서울시가 시민공모와 자문위원회의 심사 등을 거쳐 만든 자체 브랜드다. 같은 이름의 축제가 해마다 성공적으로 개최될 만큼 무사히 안착했단 평가를 받고 있는 서울시를 시작으로 각 지자체별로 브랜드 슬로건이 잇따라 제정됐다.

경쟁적으로 시작된 지자체들의 자체 브랜드 슬로건은 지역의 특징과 특성 및 정체성, 비전 등을 반영해 선정해 발표되지만 대부분 영어로 돼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 자료: 각 지자체 홈페이지 ⓒ스카이데일리

부산시와 제주도는 단어의 뜻을 자신들의 특징과 연결시켰다. 하지만 부산시의 ‘Dynamic Busan’, 제주도의 ‘Only Jeju’ 등 모두 ‘역동적인’, ‘오직’ 등 대체할 여지가 충분한 단어들을 굳이 영어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빈축을 사고 있다.

“천혜의 자연경관과 미래형 첨단산업이 조화를 이룬 경남의 매력과 역동성을 직접 느껴보세요”란 의미를 지닌 경상남도의 ‘Feel Gyeongnam’과 Interesting(재미와 풍요)·Tradition and culture(전통과 문화)·Science and technology(과학)의 앞 글자 I·T·S를 딴 대전시의 ‘It's Dajeon’은 설명을 듣지 않고서는 그 의미를 짐작하기조차 어려워 비난의 목소리가 높다.

지난 7월 8일 도민의 날을 맞아 ‘강원’의 모음 ㄱ과 ㅇ을 이용해 브랜드를 개정한 강원도는 새로운 브랜드의 출범 이전에 사용하던 슬로건 ‘Lively Gangwon’의 사용을 중단한 바 있다. 기획관실 관계자에 따르면 “과거 사용하던 슬로건의 경우 발음과 의미전달이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내외부로부터 숱한 지적을 받은 바 있어 새로운 브랜드 출범과 맞물려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한 언어학자는 “시·도 지자체 뿐만 아니라 각 구·군 별로 보유한 브랜드 슬로건을 살펴봐도 온통 영어 일색이어서 한국의 지자체가 맞나 의심이 될 정도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줄줄이 교체되는 공기업·정책이름…글로벌 지향 내세우지만 실상은 국내용

지난 2006년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선진 물 관리를 통해 고객 중심의 세계적 물 관리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의지와 함께 한국 수자원 공사는 ‘K-water’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세계적 물 관리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그들의 주요업무는 국내 수자원시설건설관리, 국내 상하수도건설관리, 국내 산업단지 및 신도시조성, 국내 친수구역 조성사업이다.

수자원공사와 같이 ‘글로벌’을 지향한다며 자체 브랜드를 교체한 공기업들은 셀 수 없이 많은 지경이다. Land(토지)와 House(주택)의 앞 글자를 따 ‘LH’로 변경한 토지주택공사를 비롯해 ‘KEPCO’로 변경한 한국전력공사 모두 한목소리로 글로벌을 외치지만 정작 하는 일은 이 땅위의 주택공급과 전력공급이다.

이밖에도 EX(한국도로공사), SH(서울시 산하 도시개발공사), aT(농산물유통공사), KORAIL(한국철도공사), 서울METRO(서울지하철공사) 등이 불필요한 브랜드 영어화에 세금을 낭비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각종 정책들 역시 영어표현이 과다하다. 대표적인 예가 ‘스크린도어’다. 지하철 승강장의 안전을 위해 고정벽과 자동문으로 구성된 스크린도어를 두고 국립국어원은 ‘안전문’으로의 순화를 권장하고 있지만 정책명은 여전히 ‘스크린도어’에서 변함이 없다.

이밖에도 마더세이프, 보육바우처, 유헬스, 드림스타트, 기업해피서포터즈, 희망드림론, 스마트워크센터 등 우리말로 순화가 가능하거나 이름만으로 의미전달이 불분명한 정책들이 다반사인 실정이다.

국립국어원 공공언어지원단 김문오 연구관은 “상시점검을 통해 정부의 정책명 등에 관한 점검은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면서 “다양한 부처의 많은 관심으로 개선되고는 있지만 국민들 체감에는 아직 미치지 못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해당부처 담당자들이 국민 체감을 염두에 두고 국민들 눈높이에 맞는 올바른 표현들을 쓰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