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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시도 세 번 당한 독재자 진시황제

장자방과 창해역사, 진시황제 암살 실패…정치적 원한 많아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기사입력 2017-11-27 12:44:55

 
▲ 성헌식 역사 칼럼니스트(고구리역사저널 편집인)
독재를 하는 절대 권력자에게는 항상 암살과 쿠데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 이유는 정적을 많이 제거하고 경쟁자를 숙청하기에 항상 불만세력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또 언론을 통제하고 언로를 차단하기에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측근들의 비판 없는 아부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져 독단으로 비정상적인 정치를 하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절대 권력자였던 시황제에게는 역사상 3건의 암살시도가 기록돼 있다. 이렇듯 암살 시도가 이어졌다는 것은 절대 권력자였던 시황제에게 정치적으로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의미이다.
 
첫 번째 시도는 앞서 다뤘던 형가에 의한 암살 실패다. 이번 편에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암살시도라고 할 수 있는 고점리와 창해역사 여홍성의 암살 시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고점리의 암살 실패
 
형가의 암살이 실패로 끝나자 친한 친구였던 고점리는 성명을 바꾸고는 숨어 살았다. 동쪽을 순행하던 시황제가 낭야에 이르렀다. 그곳에 축(筑)이라는 악기를 신기에 가깝도록 잘 타는 명장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시황제는 고점리가 형가의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나 설마하고 방심하고는 그의 축 연주를 들어보기로 했다.
 
행궁에서 축을 연주할 때 시황제를 암살하기로 결심한 고점리는 납을 넣은 축을 이용해 특수한 흉기까지 고안했다. 연주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고점리는 음악에 도취되어 있는 시황제에게 납이 든 축을 집어 던졌으나 빗나가고 말았다.
 
고점리는 그 자리에서 붙잡혀 극형을 당했다. 이 암살 미수사건 이후 시황제는 죽을 때까지 외지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 축을 연주하던 고점리가 시황제에게 축을 던지는 장면[사진=필자 제공]
 
시황제를 저격한 창해역사와 장량
 
강단사학계에서 위서(僞書)라고 주장하고 있는 ‘환단고기 북부여기’에는 “시조 해모수 단군 22년 계미년(기원전 219년) 창해역사 여홍성이 한나라 사람 장량(張良)과 함께 진시황을 박랑사 가운데서 저격했으나 빗나가 신하들이 탄 수레를 박살냈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은 박랑사에 대해 “박랑사는 고대지명으로 현재 지명은 고박랑사이다”며 “역사문화의 명지로 하남성 원양(原阳)현 성 동쪽 교외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역사적으로 한나라 승상의 후예인 장량이 사람을 보내 이곳에서 진시황제를 죽이려했으나 미수에 그쳐 천하에 그 이름을 얻게 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환단고기 북부여기’의 기록과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설명이 일치한다는 것은 ‘환단고기’의 내용이 위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중국자료에서는 장량과 함께 시황제를 저격했던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해 밝혀 놓지 않았으나 오히려 ‘북부여기’에서 그는 성명이 여홍성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다.
 
▲ 황제만이 탈 수 있는 6필 마차(좌), 대신들이 타는 4필 마차(우)[사진=필자 제공]
 
소설 ‘초한지’ 제37장 창해공(滄海公)편에 의하면 시황제에게 망국의 원한을 풀려던 장량은 창해역사를 만난 자리에서 시황제 저격계획을 밝혔다. 그러자 그는 장량에게 “저의 성은 여(黎)이며 바닷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창해공이라 부릅니다”며 “저에게는 다른 재주는 없고 오직 백 근 정도의 철추(鐵鎚)만은 마음대로 휘두를 자신이 있습니다”고 말했다. 이어 “오늘 우연히 귀하와 같은 분을 만났으니 무슨 임무나 맡겨 주십시오”라고 말한 문구가 있다.
 
전국시대 한나라 승상의 후예인 장량은 자신의 조국이 시황제에게 멸망 당하자 원수를 갚기 위해 사재를 털어 시황제를 저격할 자객을 찾았다. 120근의 철퇴로 동순하던 시황제를 박랑사에서 저격했으나 빗나가 부거(副車)만 박살내고 말았다.
 
이 자객이 바로 창해역사 여홍성이다. 시황제의 암살미수로 수배된 장량은 몸을 숨겼다가 훗날 한왕 유방의 일등 책사가 돼 항우를 무너뜨리고 한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소하·한신과 함께 한나라 창업공신 삼걸로 꼽힌다. 오히려 이름인 장량보다 자를 쓴 장자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장량과 여홍성이 진시황을 저격하려다 실패한 박랑사에서 벌어진 상세한 상황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208년 장량은 창해의 임금을 배알하고는 공동으로 진시황 암살계획을 세웠다.
 
이후 대역사를 찾고 120근 대철추를 제작하고는 시황제의 동순 길에 매복했다. 원래 규정에 의하면 황제는 6필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신하들은 4필 마차를 탄다. 자객의 목표는 당연히 6필 마차였다.
 
▲ 창해역사 여홍성이 장량의 지시대로 중간 마차를 박살내는 장면[사진=필자 제공]
 
장량은 시황제가 곧 무양현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대역사와 함께 무양현에서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목인 박랑사에 매복했다. 멀리서 36량의 마차가 박랑사로 오는 것을 보고는 장량과 대역사는 숨어서 시황제의 마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36량 모두가 4필 마차뿐이었다. 분명한 것은 그 중의 한 마차에 시황제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성공확률은 3% 이하였다.
 
어느 마차에 시황제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던 장량은 대역사에게 가장 호화롭게 보이는 중간 마차를 치라고 명했다. 120근 대철추 한방에 마차는 박살나고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으나, 부서진 마차에는 시황제가 타고 있지 않았다. 장량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풀숲에 숨었다가 현장을 떠나 몸을 피했다. 참고로 대철추에 맞은 마차를 부거(副車)라고 한다.
 
진시황은 자객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기 때문에 아침에 예방준비를 했다. 수레를 모두 4필마로 바꾸고 수시로 바꿔 탔기 때문에 장량이 어느 마차에 시황제가 타고 있는지 판단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시황제는 행운으로 죽음을 면했고 전국에 10일 내로 관련자를 체포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고박랑사는 이 일로 단번에 유명해졌다.
 
 
▲ 원래 하남성에 있던 창해군(예)을 지명 이동시킨 강릉시 ‘창해역사유허비’[사진=필자 제공]
 
장량과 창해역사 여홍성의 거사가 실패한 박랑사는 황하 북부 하남성에 있는 지명이다. 실제로 시황제를 저격한 여홍성은 박랑사의 지형을 손바닥 꿰듯이 잘 알고 있어야 저격이 가능했을 것이다.
 
즉 여홍성은 그 부근에 살고 있던 사람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식민사학계는 이러한 창해(滄海)를 강원도 강릉으로 비정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강릉 출신 여홍성이 어떻게 지리도 모르는 하남성 박랑사에 가서 시황제를 저격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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