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㉜ ‘제2의 교도소 공격’ 정부 기록물 새로 발굴
[단독: 5·18 진실 찾기] <32> 화순경찰서 ‘유치인 빼내기’… 800명 습격 가담
“유치인 내놓으라” 경찰서 내부에 총 쏘며 무기탈취 시도
기결수·피의자 등 탈옥 지원은 反사회적… 정당성 의문
5·18조사위 ‘민주화 운동’ 잠정 결론 심각한 타격 예상
허겸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5-13 22:00:00
▲ 1980년 5월 전남도경찰국에 불에 탄 차량들이 있다. ‘사진으로 확인된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진실’(문화체육관광부·2024년 1월) 391쪽 한국일보 기증 사진 재촬영
  
1980년 5·18 당시 폭도 800여 명이 5월21일 ‘집단발포’ 이전에 경찰 유치장에 갇힌 이들을 빼내려고 총을 쏘며 경찰서를 습격했다는 정부 기록물이 새롭게 발굴돼 논란이 가중될 전망이다.
 
지금까지 시위대가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탈취한 사실은 널리 알려졌지만, 수감돼 있는 구금자를 빼내기 위해 총을 쏘며 경찰을 위협한 사실이 정부 문건으로 공식 확인되기는 처음이다. 
 
13일 문재인정부에서 출범해 지난해 12월 공식 조사 활동을 종료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5·18조사위’·위원장 송선태)가 공개한 ‘전남 일원 무기고 피습사건’ 보고서에 따르면 1980년 5월21일 오전 11시쯤 무장 폭도 800여 명이 ‘유치장에 있는 유치인을 내놓으라’며 화순 경찰서 내부에서 총을 쏘고 무기 탄약을 탈취 시도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제2의 교도소 습격’ 사건으로 5·18 연구가들은 해석한다. 5·18 당시 시위대는 간첩 및 비전향 장기수 약 170명이 수감된 교도소를 습격했다. 이 사건은 5·18이 순수 민주화운동으로 평가받는 데 적잖게 발목을 잡았고 여전히 논란의 불씨를 안고 있다. 악한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무기고를 찾아 총과 칼을 손에 쥐었다는 시위대의 주장과 교도소 습격이 어울리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 치안본부 ‘전남사태 관계기록2’ 무기 탄약 피탈 및 회수상황(1980년 6월1일)
전 세계적으로 교도소와 구치소·유치장 등 국가 교정시설에 구금된 양형 확정 기결수 또는 미결수나 피의자를 탈옥시키려는 시도는 필연적으로 반(反)사회성을 수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에 따라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직접적인 공격 행위에 대해선 강력하게 대응한다. 특히 총을 든 무장 습격이라면 더욱 강력한 사법적 제재가 뒤따른다. 
 
송선태 5·18 조사위 위원장이 대외적으로 공개를 승인한 공시 보고서(일련번호 직바-7)에 따르면 5·18 당시 시위대는 논란 속 교도소 공격뿐만 아니라 경찰 유치장에 대한 직접적인 무장 공격도 감행한 것으로 새롭게 밝혀졌다. 
 
‘화순경찰서 종합상황실 근무일지’ 등 총 4개 정부 기록물을 근거로 작성한 5·18조사위 보고서 135·136쪽에는 △10:40(오전 10시40분) 무장 폭도 50여 명이 CAR 및 각목 휴대하고 화순 이십곡리 검문소 피습 유리창 및 기물 파괴하고 △10:50 무장 폭도 110여 명이 칼빈 및 각목으로 무장하고 경찰서 기습 현관문을 파괴하고라고 기재돼 있다고 보고서는 기술했다. 
 
이어 △11:05 광주고속·화물차량 등 10대에 분승 2차 경찰서 기습 내부에 침입해 경무과 유치장에 칼빈을 난사하면서 유치인을 내놓으라고 하며 닥치는 대로 서장실과 각과 집기물·비품 등과 유리창을 파손하고 △11:50 무장 폭도 800여 명이 재차 기습 각과를 돌며 기물 파괴 및 라디오 등 절취하고 일부는 시위에 속하고 일부는 지역 각 방면 분산해 무기탄약 탈취 시도라고 수기(손 글씨)로 기록돼 있다고 조사위는 공개했다. 
 
보고서는 “내용들이 분 단위로 상세히 기록돼 있다”고 언급했다. 
 
▲ 군의 관점에서 작성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투병과교육사령부 ‘충정작전결과’ 보고서에는 이미 5월21일 오전 11시30분에 ‘시위 군중 330명이 전(남)대 지역 3공수여단 공격’ ‘차량 12대로 돌진공격 감행’이라고 적시됐다. 전교사 자료집
  
정부 조사위원 3인 “이전 공개 안 된 신규 발굴 자료” 밝혀
 
자료의 정확성을 담보하기 위해 5·18조사위 상임위원 등 위원 3명은 또 다른 정부 기록물에도 동일한 상황 설명이 있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조사위는 화순경찰서 종합상황실 근무일지에 기록돼 있는 위 내용들은 당시 근무일지를 작성했던 △심동섭의 자술서(1980년 6월4일) △화순경찰서 경무과장의 징계의결서(전라남도경찰국 경찰관 보통징계위원회 1980년 6월14일) △당시 화순경찰서에서 작성한 서류인 ‘경찰관서 피습상황’ 이상 3건의 서류에도 모두 동일한 내용들이 기록돼 있다고 확인했다. 
 
그러면서 “즉 4건의 서류에 적힌 내용들이 모두 동일한 것이고 종합상황실 근무일지 작성자가 심동섭인 데다 심동섭의 ‘자술서’와 종합상황실 근무일지의 필체가 같으며 내용도 같다”며 “당시 화순경찰서 경무과장의 ‘징계의결서’ 내용을 보면 종합상황실 근무일지에 적혀 있는 내용과 동일하고 당시 화순경찰서에서 작성한 ‘경찰관서 피습상황’에 적혀 있는 내용도 동일하다. 이 4건의 서류에 적힌 내용들이 모두 동일하다”고 밝혔다. 
 
이번 정부 기록물의 발굴은 우파적 관점에서 5·18을 조사해 온 연구가들에겐 의외의 소득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애초 5·18조사위는 당시 공소 기록상 ‘무기고 피습’ 죄명으로 처벌된 63명의 신원이 확인됐기 때문에 ‘북한군 등 외부 세력’의 개입은 있을 수 없고, 오후 1시 이후에 무기고를 탈취한 기록물을 제시하며 ‘민주화운동’이 맞는다는 잠정 결론을 내리면서 이번 ‘무기고 습격’ 직권조사 과제에 대해 ‘진상이 규명됐다’고 전원위원회에 의견을 제출했다. 
 
하지만 새로운 기록물에 담긴 사실관계 등을 근거로 조사위원 3인이 ‘오전에도 무기 탈취가 있었기 때문에 진상이 규명됐다고 보기에 어렵다’고 소수의견을 내 결국 조사위가 출범 무렵인 2020년 5월 제10차 전원위에서 5·18특별법 3조에 근거해 조사 개시를 결정하고 공을 들여온 ‘전남 일원 무기고 탈취’ 과제는 ‘진상규명 불능’으로 최종 처리됐다. 
 
‘화순경찰서 유치인 탈옥 시도’ 사건은 이 같은 결론이 도출되기까지 주효한 사례이자 조사위 전원위 결과물을 반박하는 결정적인 하나의 증거가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위원 9명 중 이종협 상임위원과 이동욱·차기환 비상임위원은 보고서에서 조사의 부정확성과 부실함을 탓하며 “진상 규명으로 결정해선 안 된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민병로·김희송·오승용·서애련 위원은 지난해 12월26일 제116차 전원위원회에서 ‘전남 일원 무기고 피습’ 보고서에 대해 “일관성과 체계성이 없는 조사보고서이고 (작년) 9월17일까지만 해도 무기 피탈 시간을 밝혔음에도, 그 이후 무기 피탈 시간의 신빙성이 낮은 주장을 근거로 시간을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고 보고서가 바뀌었다”고 소수의견과는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 전남도청 정문 옆 민원실 내에 회수한 총기들. ‘사진으로 확인된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진실(문화체육관광부·2024년 1월)’ 183쪽 이창성 기자 기증 사진 재촬영
 
‘뜨거운 감자’ 시민 선제 무장과 무기고 습격 시점 
 
5·18조사위는 출범부터 직권조사 과제로 삼은 ‘무기고 습격’ 안건 보고서에서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2008년)’ 등 지만원 박사의 저서들에 언급된 북한군 침투 의혹을 반박하는 데 절대적 분량을 할애했다. 
 
지 박사의 최초 의혹 제기에서 출발한 시위대의 선제 무장 논란은 무기고 습격이 5월21일 오후 1시 이전인지, 이후인지로 요약된다. 
 
5·18이 민주화운동이라 주장하는 측에선 이날 오후 1시 계엄군이 일제히 선제사격을 가해 무고한 시민을 집단 살해했기 때문에 시위대가 전남 각처로 흩어져 무기고를 습격하고 무기를 빼내 와 ‘악마’ 같은 진압군에 맞섰다는 논리를 편다. 
 
이에 대해 우파 관점의 5·18 연구가들은 도청 앞 계엄군이 선제사격했다는 이른바 ‘집단발포’는 명백한 허위이자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입장이 명확하다. 직접적인 시위대 목격 기록물이 없는 데다 광주·호남 출신 장병 등이 상당수 포함된 국군의 성정(性情)과도 맞지 않는다고 본다. 
 
하루 전날인 20일 밤 시위가 격화되는 가운데 계엄군 최초 사망자인 3공수여단 정관철 중사가 광주역에서 차에 깔려 죽었고 비슷한 시각 전경 4명이 시위대 차량에 깔려 죽어 격앙된 계엄군이 수위 높은 폭행을 가했을 순 있어도 가만히 일렬횡대로 모여 있는 시민을 향해 일제히 총을 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는 논지다. 
 
옥상 하향 사격도 알려진 실체와 다르며 KBS 다큐멘터리 등에 등장한 예비역 중위 광주시민의 수협 옥상 군복 사격도 시점이 불명확하다고 본다. 당시 군 관련 기록에도 시위대와 장갑차의 선제 돌진 공격이 있자 대응 사격을 했다는 기록은 존재한다. 집단 발포의 직접 증언으로 쓰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특히 ‘포(砲)’를 쏜 것이 아니므로 ‘발포’라는 표현 자체도 북한식 선전·선동과 유언비어에 속은 결과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이 같은 관점을 임시로 배제하더라도, 21일 오후 1시 집단발포보다 먼저 무기고를 습격한 사례가 있다면 민주화운동으로서 명분을 유지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란이 끊임없이 계속돼 왔다. 
 
이 때문에 시위대의 무기고 습격 시점은 2000년대 들어 꾸준히 ‘뜨거운 감자’였지만 이번에 새롭게 발굴된 정부 문건으로 우파 중심의 추가 조사의 여지가 확대됐다. 
 
5·18 정부 조사위원들이 ‘화순경찰서 습격 및 유치인 탈출 총격 시도’ 사건을 근거로 시위대 선제 무장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진상규명 가능’에서 ‘불가능’으로 결론이 180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문재인 조사위의 한계를 드러내고 우파 중심의 조사위 구성이 절실하다는 새로운 시사점을 던지며 마무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5·18조사위)가 낸 ‘전남 일원 무기고 피습사건(직바-7)’ 보고서 표지. ❷❸ 5·18조사위 소속 위원 3인은 ‘무기고 피습사건’의 진상이 규명됐다는 전원위원회 보고서에 반박하기 위해 뜨거운 논란인 ‘5월21일 오후 1시 집단발포’ 이전인 이날 오전 11시쯤 폭도 800여 명이 화순경찰서 유치인을 빼내기 위해 총을 쐈다’는 내용이 동일하게 적시된 새 기록물 4건을 발굴한 사실을 보고서 136·137쪽(가운데)에 공개했다. 전남대 정문 앞 5·18 조형물. 남충수 기자 ©스카이데일리
  
“진압군 발포보다 무기고 먼저 습격” 논란 가열 
 
시민 선제 무장·무기고 습격시점 기존관점에 변수 
조사위 3인 “다른 기록물에도 화순상황 동일” 확인 
문재인정부 조사위 한계… 우파 중심 진상규명 필요 
 
정부 기록에 드러난 ‘폭도 800여 명’... 지만원 제기 600명보다 많아 
 
이번에 새롭게 발굴돼 일반에 공개된 ‘화순경찰서 종합상황실 근무일지’ 등 정부 기록물 4건에는 ‘폭도 800여 명’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한다. 
 
이는 지금까지 전남 일대의 무기고를 습격한 폭도 또는 시위대의 규모로는 가장 큰 것이다. 
 
일찍이 북한군 침투 의혹을 제기한 지 박사는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2008년)’에서 습격 주체의 규모를 ‘600명’으로 표현했다. 5·18조사위도 이번 보고서에서 “지 박사가 무기를 탈취한 주체를 시위대 600명이라고 했다”고 6쪽에서 적시했다. 
 
이에 대해 조사위 보고서 132쪽은 “5·18 당시 기소자 중 63명이 전남 일원의 무기 탈취에 직접 관련돼 처벌받았음이 확인됐다”고 했다. 
 
끝내 ‘규명 불능’으로 분류돼 사실관계가 불분명함을 전제로 조사위 전원위에 상정된 조사 결과물에 따르면 “이 63명은 주거지에 따라 광주에서 혹은 지역에서 시위대에 합류하고 시위 과정에서 무기고 습격에 가담한 사실이 이들에 대한 수사기록 등에서 확인됐고 공수부대의 폭력을 자신의 가족과 공동체에 가해지는 것으로 인식하고 주저 없이 시위대에 합류했으며 (중략) 도청 발포 소식을 접한 이후 본격적인 무장을 시도했던 것이 군과 정보기관의 시위대 동향 보고와 위원회 조사 결과 등에서 확인됐다”고 보고서는 기술했다. 
 
이로써 조사위는 규명 불능으로 폐기되기 전에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발포 이전에 시위대가 무장했다는 시위대 선제 무장 여부 문제는 전남 일원으로 진출한 시위대에 의한 무기고 피습 시간대 또한 남평지서 피탈 시간인 오후 1시30분쯤을 시작으로 모두 오후 시간대임이 확인됐다”며 “전남 일원으로 진출해 무장한 시위대의 선제 무장설은 사실이 아님이 확인됐다”고 결론 내렸다. 
 
조사위는 또 보고서에서 “5월21일 오후 1시 이전 피탈 현황을 조사한 결과, 5월19~21일 기간 중 계엄군의 총기 분실 및 피탈 사례는 총 7건으로 이중 총기와 함께 실탄이 분실된 사례는 5월19일 1건으로 당일 회수했고, 실탄 분실은 5월21일 오전 8시10분쯤 광주공단 입구에서 20사단 지휘차량 탄약(실탄 200발) 피탈 단 1건이었다”고 근거를 제시했다. 
 
▲ 무기류 피탈 현황이 기재된 보안사령부 존엄 문서.
  
그러면서도 그간 공개된 정부 기록물에 따른 21일 오후 1시 이전 습격 사례들도 열거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88년 국방부 ‘국회특위부록I’은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작전상황일지와 전교사·특전사·20사단·31사단 전투상보를 근거로 ‘21일 오전 11시 나주금성동파출소 무기 피탈(칼빈 650정·칼빈 실탄 3만9000여 발) 치안본부/전남도경 보고자료’라고 기록하고 있다"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또한 “육군본부가 치안본부에 기록을 요청하기 전에 작성했던 ‘현안문제 관련자료’(1988년 5월19일 발송)는 금성파출소 습격 무기 탈취 시간을 5월21일 낮 12시~12시20분으로 정리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1985년 국가안전기획부가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상황(1985년 5월)’에서 ‘5월21일 오전 9시~낮 12시 나주서 금성파출소 습격 무기 탈취·총기 773정·실탄 10만8806발·수류탄 182개’ 피탈로 정리한 사실도 소개했다. 조사위가 인용한 보안사의 존안문서(전남도경 상황일지 21·22쪽)에 반남지서와 남평지서의 피탈 시각을 각각 5월21일 오전 8시와 9시로 기록한 점도 기술했다. 
 
반박의 재반박 끝내 ‘규명 불가’… 4년간 예산만 낭비한 조사위
 
‘63명이 집단발포에 반발해 오후 1시 이후에 무기고를 습격했다’는 조사위의 다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조사위 내부 반론, 즉 ‘소수의견’은 논리와 근거가 탄탄해 보인다.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추천 몫으로 5·18조사위에 참여한 이종협 상임위원은 지난해 조사위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 “아직 (내부) 견해차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보고서를 채택할 때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합의가 이뤄지거나 표결이 이뤄질 것으로 본다”고 했다. 또 한기호 당시 국회 국방위 상임위원장이 “(소수의견을) 같이 기술해달라”고 재차 요구하자 이 위원은 “예”라고 약속했다. <본지 2023년 10월13일자 “하나회-발포명령 엮지 말라”… 혼쭐 난 5·18조사위원장 보도 참조> 
 
이에 따라 이 위원 등 3인은 이번 보고서 133쪽에서 “남평지서·금성동파출소·영산포지서 무기고는 5월21일 오전 무렵 시민들에 의해 총기가 탈취됐다는 사실이 징계 기록 등 우리가 배척하기 힘든 공적 서류에 기록돼 있다”며 시민 선제 무장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기 힘든 사유를 제시했다. 
 
또한 “총기 피탈 현장에 있었던 경찰관 등의 인원들 중에서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사람 일부가 총기가 피탈된 시간이 ‘1980년 5월21일 오전’이라고 여전히 진술하고 있다”고도 거론했다. 
 
이들은 1980년 사건 직후 작성된 징계 기록 등 공적 서류 작성에 신군부의 입김이 개입되지도 않아 자료의 신빙성이 크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 위원 등은 “당시 공적 서류가 신군부의 입김이 개입된 조작되고 의도됐다면 신군부가 1988년 국회 청문회와 각종 5·18 관련 법적 다툼 과정에 이 자료들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면서 “이 자료는 조사위가 발굴한 것으로 지금까지 공개된 바가 없기 때문”이라고 전례 없는 최초 공개 자료임을 역설했다. 
 
전원위원회 속기록에도 조사 결과를 불신하는 의견들이 속출했다. 보고서 116~120쪽은 ‘남평지서는 오후 1시30분으로 확인됐다’고 밝혔지만 전원위는 나주경찰서 경무계장·남평지서장·남평면 예비군 전투소대장 등 생존자 3명은 아직도 “총기 피탈 시간은 오전”이라고 진술한다고 반박했다. 
 
나주경찰서 경무과장의 징계의결서에도 ‘(21일) 오전 9시50분쯤 무장 폭도들이 침입 무기를 탈취하고’라고 기록됐다는 반론이 제시됐다. 
 
‘금성동 파출소 오후 2시’ 결론을 내린 보고서 118~120쪽에 대해서도 금성동파출소 김종빈 경장의 계고장에는 ‘오전 11시30분 총기를 난사하며 난입한 폭도들에게 (중략) 피탈 당한 비위 사실에 대해’라고 기록됐다는 사실을 들어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한 보고서 67쪽은 영산포지서는 시점을 확정하지 못했다고 기술했으나 위원 3인은 ‘나주경찰서 수기 작성 서류는 21일 오전 11시 약 60명·피탈 총기 CAR 1정·무기 탄약고 자물쇠를 총으로 난사 파괴’로 기록된 점을 꼽아 반박했다. 
 
역시 조사 결과물로써 전원위에 ‘규명’으로 올라간 보고서 71쪽에 대해서도 ‘화순경찰서 종합상황실 근무일지’ 등 4건의 신규 발굴 기록물을 근거로 강력하게 ‘규명된 것으로 합의에 이르러선 안 된다’는 의견을 보고서 135·136쪽에서 피력한 결과 전체 보고서가 ‘규명 불능’으로 종결됐다. 
 
▲ 불에 탄 광주 임동파출소. ‘사진으로 확인된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진실’(문화체육관광부·2024년 1월) 450쪽 이창성 기자 기증 사진 재촬영
 
“우파 중심 새 조사위 꾸려 진상 철저 규명해야” 
 
이 밖에도 소수의견은 보고서 112쪽에 ‘표17’은 21일 오후 1시 이전 ‘광주지역 계엄군의 무기 분실 및 피탈 현황’이 제시돼 있는데도 “미회수 총기 최소 26정과 M60기관총의 실탄 200발에 대해 별도의 설명이 없어서 아쉽다”고 의견을 냈다. 
 
또한 ‘5월21일 오전 3시30분쯤 광주세무서 칼빈 17정 분실’로 표현된 것과 관련해 위원 3인은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분실’이라는 표현보다는 ‘피탈’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하다”고 했다. 그 이유로 “31사단 김영해 상병의 경우 CBS 방송국으로 진입한 시위대가 김 상병의 총을 빼앗아 건물 아래로 던져버렸고, 11공수여단 김 하사의 경우 양림다리 근처에서 시위대에게 구타를 당했으며, 광주세무서의 경우 시위대가 세무서 방화 후 침입해 무기고 속에 보관 중이던 칼빈을 가져간 것”이라며 “당시 계엄군 기록에 ‘분실’이라고 (표현된 것은) 총기 보관 책임을 경감하기 위해 잘못 기록된 것이고 우리 보고서는 당시 상황을 정확히 평가해 ‘분실’됐다는 표현보다는 ‘피탈’됐다는 표현이 더 타당하다”고 적합한 용어 채택·사용을 조사위에 주문하기도 했다. 
 
그동안 민간 5·18 연구가들은 정부 자료에 대한 접근이 어려웠다. 특히 기밀자료는 열람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5·18특별법’상 막강한 권한이 주어지는 정부 조사위는 당시 자료에 대한 광범위한 열람·복사·요구 등의 권한으로 기밀에 대한 접근이 가능했다. 
 
특히 5·18의 진상을 알만한 관계자에 대해선 계엄군 또는 시위대 출신 인사, 당시 정부 당직자 등에 대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제 대면 조사까지 가능하다. 
 
따라서 우파적 관점에서 정부 조사위를 새롭게 구성해 그동안 숨겨진 정부 문건을 다시 확인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계엄군 중대장 출신의 최종원 민간5·18진상조사위원회 위원은 본지에 “5·18 당시 있었던 사건들을 유불리에 의한 인간 법칙의 적용이 아니라, 있었던 그대로의 실체를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자연 법칙으로 정부에 숨겨진 문서들에 의해 규명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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