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5·18 당시 무장 폭도가 계엄군 병사를 로프로 묶고 트럭에 매달아 끌고 다닌 충격적인 사실이 복수의 군 내부 문건을 통해 처음 확인됐다. 이 병사는 숨진 채 발견돼 뒤늦게 계엄군 측에 시신이 인계됐다.
광주사태에서 순수한 시민과 구분되는 불순세력이나 무장 폭도가 계엄군의 시신 훼손에 가담한 정황 또는 무용담은 있었지만 우리 군 당국이 계엄군의 직접적인 목격 증언을 문서 기록으로 보관해 온 사실이 언론에 공개되기는 처음이다. 이들 문건은 일반의 접근이 극히 제한돼 그동안 국민 대부분은 이처럼 끔찍한 기록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특히 이 사건은 계엄군뿐 아니라 복수의 시민에 의해서도 동일하게 목격됐지만 오월단체 측에선 폐기하라고 요구한 정황이 드러났다. 정부 공식 기록의 존재와 역사 해석의 다양성을 외면한 채 오로지 ‘민주화운동’으로만 일의적으로 해석하려 해 온 그간의 정부 조사 방식이 합당했는지 논란이 가열될 전망이다.
12일 스카이데일리가 단독으로 입수한 육군 제20사단 작전참모 함덕선(육사 20기) 중령의 육군본부 군사연구실 자필 진술서에는 비극의 현장에 투입된 계엄군 장병들로서는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법한 흉측한 만행이 자행된 과정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무장 폭도 선제사격에 계엄군 9명 사상… 죽음의 탈출
증언 시점에 육군 준장이었고 이후 26사단장(소장)과 11군단장(중장)을 지낸 함 중령은 자술서에서 무장 폭도의 선제 사격으로 계엄군 사상자가 발생한 상황을 먼저 기술한다.
1980년 5월21일은 ‘집단발포’ 논란이 촉발된 당일이다.(※본지는 '집단발포'가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입장을 공식 견지하나 국민에게 널리 인식된 용어인 만큼 사건의 앞뒤 맥락에 관한 이해를 돕고자 제한적으로 사용한다.)
흥분한 시위대의 기세에 밀려 전남도청으로 밀려난 계엄군은 조선대로 황급히 퇴각한 뒤 이날 일몰 직전에 다시 조선대에서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함 중령의 진술은 안전지대로 꼽히는 저수지가 있는 제2수원지로 향하기 위해 차를 타고 조선대를 빠져나오면서 겪은 일에 기초한다. <7공수·11공수 조선대~주답 철수경로 그래픽 참조>
그는 구체적으로 “조선대에 주둔하고 있던 공수 계엄군이 차량 30대를 이용해 화순 방향으로 이동하기 위해 조선대 정문으로부터 멀지 않은 광주 시내를 통과 중 민가 2층 옥상에 배치됐던 무장 불순분자들이 차량에 탑승 노출된 상태로 이동하는 공수 계엄군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해와 6명이 다치고 차량 3대가 전복됐다”고 적었다.
그가 진술한 상황은 다수의 군 기록과도 일치한다. 본지가 익명의 5·18 연구가로부터 입수한 ‘차량 행군부대 기습상황’ 보고 반전지 차트 원본에도 7공수35대대는 21일 오후 4시쯤 조선대에서 화순 방향으로 가던 중 도로 양편 좌우 건물로부터 총격을 받은 것으로 기재됐다.
상황 보고 차트는 4km에 걸쳐 피습 상황이 이어졌다고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조선대를 빠져나와 화순 쪽으로 이동하던 중 양쪽 민가에서 공수대원을 향해 가해진 무차별 총격이 계엄군 차량이 무려 4km를 주행하는 동안 계속됐다는 증언이다.
이는 본지가 입수한 생존 장병의 직접 증언과도 동일하다. 퇴각 차량을 인솔했던 고OO 지역대장(당시 육군 대위)은 지난해 국군명예회복운동본부(명본)의 한 이사와 통화에서 “양측 민가 2·3층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해와 차에 탄 우리 장병들이 속수무책으로 사격에 노출됐다”며 “창문이 열린 곳으로 대응 사격하라고 외쳤지만 피해자가 속출하는 아비규환의 상황이 계속됐다”고 일관되게 당시 참상을 증언했다.
공수부대 공식 기록에도 폭도의 선제 사격에 의한 피습 상황으로 적혀 있다.
제7공수·11공수 전투상보 등에 따르면 이날 오후 7시40분쯤 OO제대가 전남대병원·남광주시장·숭의실고 부근을 지나면서 최소한 도로 양측의 7군데 건물에서 시위대의 사격과 차량 돌진 공격을 받아 군 차량 3대가 전복되고 그 과정에서 장교 1명과 사병 1명이 사망하고 6명이 중상을 당했다고 기록돼 있다.

추가 피해 막으려 사상자 수습 포기… 울분 속 탈출
그러나 군은 곧바로 피습 차량에 대한 복구 및 수습 작업에 나설 수 없었다고 한다. 함 중령 자술서에 따르면 피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차에서 내려 사고 현장으로 다가가면 무차별 선제 사격을 가한 무장 폭도와 대치가 불가피하고 군인 또는 민간인이 추가 피해에 노출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함 중령은 “도로 양쪽으로부터 불의의 사격으로 피해를 봤으나 부대를 정지시켜 대응 시 선량한 시민의 피해가 있을 것으로 판단한 지휘관은 전복차량과 사망 운전병을 그대로 둔 채 화순으로 철수했던 것”이라고 진술했다.
육군의 ‘차량 행군부대 기습상황’ 보고 차트 원본에도 도로 양쪽 건물로부터 불의의 사격으로 희생을 입었으나 대응 시 더 큰 피해 발생을 우려해 전복 차량과 운전수 1명을 실종한 채 주답(광주남방 4km)으로 이동했다고 대응 조치로 군은 기재했다.
빗발치는 총알을 피해 탈출하던 계엄군은 곧이어 무장 폭도에 의해 저질러진 반(反)인륜적인 인권 유린의 현장을 목격한다.
함 중령은 “그 뒤 사망 운전병은 불순분자들이 로프로 목을 묶어 추럭(트럭)에 매달아 시내로 끌고 다니는 것을 광주적십자 부녀회에서 시신을 수거한 것을 해당 부대에서 인수했다”고 자필로 상세하게 기술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군인에게 잘못이 있었다 한들 군인도 국민의 자식인데 차량 운전한 것이 무슨 잘못이라고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참혹한 짓을 보고 많은 시민들이 얼굴을 돌리며 치를 떠는 지경이었다”고 참혹했던 실상을 전했다.
그는 계엄군을 농락한 괴한들의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고 진술서에 당부했다. 함 중령은 “‘불순분자여 그대들은 누구냐’ 탈을 벗고 진상을 밝힐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한탄하며 자술서에 글씨를 눌러 썼다.
함 중령은 1988년 3월10일 자필 진술서 작성 시점엔 육본 군수참모부 장비정비처장으로 복무하던 준장이었다. 육본 군사연구실은 3월24일 자필서에 소인을 찍은 뒤 기록을 보관했다. 이후 해당 문건은 비공개됐다. 이런 문건이 있는지조차 국민에게 잊히게 된 과정이다.

민간 목격자들 “차량 뒤쪽에 매달아 끌고 와”
이 일병은 21일 실종된 뒤 뒤늦게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돼 26일 계엄군 측에 시신이 인도됐다. 이 때문에 군 문건에는 사망 일자가 21일과 26일로 혼입돼 있다.
복수의 정부 문건 등에 따르면 시민 4명은 22일 숨진 이 일병의 시신을 목격했다. 시민 박모씨는 22일 오전 11시쯤 광주공원에서 군용 지프에 탑승한 시위대가 공수부대원 시신을 차량 뒤쪽에 매달고 사직공원에서 광주공원으로 끌고 오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김모씨는 적십자병원에서 시신들이 도청으로 운구돼 왔는데 시신 중 한 구를 가리키며 ‘이건 공수부대원인데 우리 시민들한테 두들겨 맞은 시신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으나 정확한 날짜는 22일인지 23일인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관형 일병의 구체적 사인에 관해선 정밀한 추가 조사가 요구된다. 일단 묶인 채로 트럭에 끌려다닌 건 정부 문건과 복수의 증언으로 미뤄 사실로 파악된다.
다만 죽은 계엄군 시신을 묶은 채로 폭도 차량이 질주한 것인지, 숨이 붙은 계엄군을 트럭에 묶어 끌고 가다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인지는 합리적 의문이 제기된다. 이는 당시 가해자가 순수한 시민이었는지, 외부 세력은 아니었는지 가늠할 또 하나의 열쇠다.

시신에 잔혹한 상처… 순수한 시민 짓 맞는지 의문
“총알 날아오자 軍 대응 사격”… 선제공격에 의한 교전 분명
정부 기록물 “유치인 빼내려 폭도들이 경찰서 습격” 명시
계엄군이 먼저 총 쏴 시민이 무장했다는 주장 설득력 없어
가짜·위선 가득한 ‘광주’… 가려진 역사의 진실 벗겨내야
산 채로 묶여 끌려가다 죽었나… 李 일병 구체적 사인 조사 필요
호남 출신의 우파 5·18 연구가들은 문재인정부가 만든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5·18조사위’·위원장 송선태)가 외부 세력의 개입을 철저하게 배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도저히 광주시민의 온화한 ‘성정(性情)’에서 비롯된 행위로 보기 힘든 잔혹하고 끔찍한 행위까지 광주시민이 범한 것으로 결론 내리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한다.
일단 함 중령은 “최 후미 예비 차량 운전병은 운전 중 즉사해 차량으로 민가를 들이받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자필 진술서에 적고 있다.
반면 다른 군 내부 문건인 육군 20사단 ‘차량 행군부대 기습상황’ 보고 원본에는 ‘실종 운전수는 폭도들에 의해 피살됨’으로 적혀 있어 정확한 사인과 관련해 의문을 품게 한다.
오월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에는 “운전수가 (중략) 시민들에 잡혀 칼로 난자당했다”는 증언이 발견된다. 이 내용은 계엄군 군의관의 진술을 인용한 전집에 담겨 있다. 서두에 ‘정OO’로 기술하다 마지막 부분에 ‘다만 이OO 일병의 성명을 ‘정관현’이라고 잘못 기재했다’고 정정한 것으로 미뤄 이관형 일병의 사망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진술인 것이다.
이 문헌에서 7공수 군의관 위OO 대위는 이 일병의 사망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내 앰뷸런스 운전수도 그때 죽었다. 운전수가 총에 맞아 차가 서자 같이 타고 있던 병장 한 명은 영리해 총을 가지고 지프차 밑에 숨어 있었고, 또 한 사람(정OO-뒤에 정OO은 이관형 일병으로 정정)은 다급한 나머지 총을 드르륵드르륵 쏘아대어 총알이 떨어지자 시민군들에게 잡혀가 버렸다고 한다. 정OO(이관형 일병)의 시체는 후에 적십자병원에서 연락이 와서 찾았다. 칼로 난자당해 있었고, 약이 오른 시민들이 끌고 다녔는지 등의 살가죽이 모두 벗겨져 있었다. 서로 총을 들어 이미 전쟁으로 돌입돼 버리자 서로가 잔인해질 대로 잔인해져 자제를 못 한 것 같았다. 나는 그를 화장시켜 줬다.”
위 대위는 또 조선대에서 주남마을로 철수 간에 OO제대에 편성돼 운전병으로 임무 수행하다 행방불명된 정OO 일병이 나중에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인계됐을 때 시민군에 의해 훼손된 시신 상태를 목격했고, 후에 정OO 일병을 화장했다고 진술했다. 이어 위OO은 이OO(이관형) 일병의 성명을 ‘정관현’이라고 잘못 기재했다고 오월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은 뒷부분에서 밝힌다.
“진압군 발포보다 무기고 먼저 습격”… 명분 잃은 시위대 무장

5·18을 순수 민주화운동으로 보는 쪽에선 계엄군이 21일 선제사격을 가해 무고한 시민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맞서 시위대가 전남 각처로 흩어져 무기고를 습격하고 무기를 훔쳐 와 ‘악마’ 같은 진압군에 맞섰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우파 연구가들은 계엄군에 의한 이른바 ‘집단발포’는 명백한 허위이자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하루 전날인 20일 밤 시위가 격화되는 가운데 계엄군 최초 사망자이자 만삭의 아내를 둔 3공수여단 정관철 중사가 광주역에서 폭도의 차에 깔려 죽었고 비슷한 시각 전경 4명이 시위대 차량에 깔려 죽어 격앙된 계엄군이 수위 높은 폭행을 가했을 순 있어도 가만히 일렬횡대로 모여 있는 시민을 향해 일제히 총을 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는 논지다.
특히 광주·호남 출신 장병 등이 상당수 포함된 국군의 성정과도 맞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올해 6월 해단한 정부 5·18조사위는 1980년 5·18 당시 폭도 800여 명이 5월21일 ‘집단발포’ 이전에 경찰 유치장에 갇힌 이들을 빼내려고 총을 쏘며 경찰서를 습격하고 무기 탄약을 탈취 시도한 사실이 담긴 정부 기록물을 발굴해 공개했다. <본지 5월14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 <32> 화순경찰서 유치인 빼내기… 800명 습격 가담' 보도 참조>
이로써 계엄군이 먼저 총을 쏴 시민들이 무장하게 됐다는 주장은 명분을 잃게 됐다. 5·18조사위 내부에서는 자료 공개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일부 위원의 노력으로 문건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다.
시민의 분노가 얼마나 극에 달했으면 계엄군을 향해 총을 쏘고 군인의 시신까지 훼손했겠냐는 그동안 국민이 가진 보편적인 생각은, 누군가의 고의적인 정보 은폐 또는 적극적인 기망행위에 따른 착각이라는 관점에 힘이 실리게 된 것이다.
“등가죽 벗겨진 계엄군”… 순수한 광주시민 성정에 맞지 않는 잔혹성
순수하고 선량한 광주 시민의 행위로는 차마 간주할 수 없는 무장 폭도의 잔혹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21일 조선대 철수 작전에선 계엄군 장병(장교+사병) 3명이 숨졌다. 이 일병 외에도 변상진 대위는 탈출 초기인 오후 7시쯤 조선대 학내에서 총격을 받아 즉사했고 역시 운전병인 11공수 이상수 상병은 전남대병원-남광주시장-숭의실고를 지나다 폭도가 쏜 총알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군 문헌은 기록한다.
민간인 정모씨는 21일 이전 불로동 다리 밑에서 낙오된 계엄군이 시민들의 돌멩이 투척으로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내용은 유사하나 목격 시점이 20일인 진술도 있다. 민간인 목격자가 이 일병을 보고도 날짜를 혼동한 것이거나, 날짜가 맞는다면 이 일병이 아닌 또 다른 계엄군 피해자일 수 있다.
적십자병원 기사 김모씨와 남모씨도 20일의 상황을 동일하게 묘사했다. 이들은 공수부대원 사망자가 있다는 얘기는 직접 듣지도 목격하지도 못했다고 일치된 진술을 하면서도 낙오된 공수대원을 목격한 상황은 똑같게 기술했다.
김씨는 “계엄군이 광주 천변 좌·우측에 있던 시위대로부터 돌멩이로 공격을 받고 쓰러지자 (중략)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후송해 병원 정문에서 신병을 인계해 줬다”고 진술했다. 남씨도 “계엄군이 시위대에 포위돼 돌멩이 공격으로 인해 상해당했는데도 저항하지도 않고 웅크리고 앉아 있어서 (중략) 김씨와 함께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인계해 줬다”고 같은 상황에 대해 유사하게 증언했다.
국군광주통합병원 일반보급과장 우모 대위는 “5월26일 시민군이 국군광주통합병원에 두고 간 계엄군 시신 관련해 시신이 영안실에 도착했을 때 나무관 위에 태극기가 덮여 있었고 관 안에 이OO 일병 시신에는 목에 자상이 있었으며 옆구리 쪽이 많이 훼손된 상태로 목과 옆구리에 구더기가 많아 소독약으로 제거한 후에 염을 했던 기억이 있으며 당시에는 누구인지 몰랐다”고 진술했다.
고구마 줄기 캐듯 나오는 무장 폭도의 잔혹성… 오월단체 “보고서 폐기하라”

5·18조사위는 6월 종합보고서에서 이 일병 사건을 ‘진상규명 불능’으로 처리했다.
비록 구체적인 사인을 확인함으로써 폭도의 잔혹성을 규명할 실체적 진실 접근은 가로막혔지만 5·18조사위가 군경의 피해 상황 보고서를 공식 문서로 처음 남겼다는 데 의의를 두는 우파 5·18 연구가들도 많다.
폭도의 선제사격에 대해 명시하지 않은 데다 피격 후 대응사격을 ‘교전’으로 표기한 부분은 아쉽다는 의견이 있지만 보고서가 “직접 사인을 확인할 사망진단서가 없기 때문에 당시 매화장보고서 및 계엄군이 주장하는 흉기에 의한 사망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고 일부 적시한 것은 괄목할 만하다는 관점이 있다. 한 5·18 연구가는 “총알이 날아오는 데 대응사격을 하지 않을 군인은 단언컨대 한 명도 없다”며 “‘폭도의 선제사격에 의한 교전’이라고 표기했다면 더 정확했을 것”이라고 본지에 밝혔다.
이에 대해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해석하는 쪽은 종합보고서에 강하게 반발했다. 요컨대 암매장 사건 보고서는 54쪽인 반면 조사위 출범 초기에는 계획에 없던 군경 피해 보고서가 514쪽에 달한 데 대한 불만으로 풀이된다.
김정호 민변 광주전남지부의 전 지부장은 3월 광주MBC ‘시사용광로’에 출연해 “가장 문제는 암매장 보고서는 54페이지밖에 안 된다”며 “그런데 지금 가장 왜곡의 절정판이라고 하는 군경 피해 보고서는 514페이지”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전두환 회고록 민·형사 법률대리인이라고 광주MBC가 자막으로 소개한 김 전 지부장은 이어 “10배 분량을 내놨는데 이 514페이지에 이르는 군경 피해 보고서는 그냥 저는 진상 규명과는 아주 거리가 있기 때문에 부실이 아니라 왜곡 보고서”라며 “저는 그냥 폐기해야 한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가 당초에는 진상규명 과제에 들어 있지 않았다. 2019년 출범할 때는 (중략)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태생적 한계가 있다. 처음부터 군경 피해에 대한 조사를 하는 게 5·18진상규명은 아니죠”라며 우파 5·18 연구가들과 극명한 시각차를 드러냈다.

“폭도 선제사격엔 침묵… 일방적 민간인 학살 주장 대가 치러야”
이에 대해 한 5·18 연구가는 “5·18조사위가 그 많은 계엄군, 특히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계엄군들을 조사하고서도 광주사태에서 발생한 민간인 집단학살이라고 주장한 사건들에서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 선제사격의 예를 특정하게 발표하지 않는 것은 철저한 진상규명의 조사 결과라고 할 수 없다”고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계엄군은 ‘경고하라’ ‘접근하지 마라’ ‘사격 해오면 대응사격 하되 하반신을 쏘라’는 3가지 원칙으로 임무를 수행했다”며 “계엄군이 민간인에게 먼저 총을 쐈다면, 이는 명령 불복종으로 군형법 적용 대상으로 그에 대한 처벌을 받게 되고 명령 위반 시에는 심지어는 현장에서 즉결처분을 받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군의 속성을 모르고 군대가 시민에게 총을 마구 쏜 것으로 국민을 인식시킨 것은 군에 대한 모략과 이간질로 볼 수밖에 없다”며 “계엄군이 폭도의 선제사격으로 피해를 당한 조사 결과를 5·18조사위가 특정하게 구체적으로 공개하지 않은 채로 그냥 계엄군이 일방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 책임과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광주=허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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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공산당이싫어
2025-04-01 19:25
수정 삭제
진실은 밝혀지는것이 맞겠죠 정쟁의도구로만 이용말고 전부다 밝혀 판단은 개개인들이하도록합시다~북한의 만행은 끝이없죠경북의 한마을의 남자들의 손발을 자른사건도있답니다 죽창으로도륙한사실도 모든국민은 알아야합니다
정신나간친일파
2024-12-19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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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대는 말을 그대로 믿는다고? 대단들 하네 가짜를 놓고 믿고싶은대로 쓰고있는 뉴라이트 친일간첩들이 하는말을 믿는놈이 비정상 아닌가?
조정아
2025-03-31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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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하신 분이 말한거고 당시 목격자가 있다고 하잖아. 넌 현장에 있었냐? 그것도 아니면서 가짜네 뭐네 뭔 말이 많아. 남은 증거와 증인들 얘기를 다 듣고, 판단하는거지. 니가 아는 건 뭐 절대적인거야? 제일 비정상은 너 같은 애들이야
SUN
2024-09-21 13:29
수정 삭제
비극적인 광주 5.18에 대하여,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의 편향된 정치 논리를 배제하고,공정하고 중립적인 기관을 선정하여 광주5ㆍ18 전반에 대하여,정확한 사실규명을 하여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것이다.
추풍도사
2024-09-15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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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중대한 사실을 빠뜨린채 이걸 민주화운동이라고 포장하고 당시 사상자에게 많은 연금과 일시포상금지급 모두회수하고 공무원 판검사 경찰시험에 가점주는 잘못된 법 파기하고 가짜5.18유공자 행세한자 밝히고 적법한 처벌을 윤석열 정부는 신속히 하시기 바란다.
김형정
2024-09-14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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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입니다 군부가 광주시민에게 무차별사격으로 죄를짓고 물타기용으로 조작한 내맘대로 기록한조작글입니다 국민들이 깨어나셔야 진정한 민주주의 나라를 만들것입니다
파란낙엽
2024-09-13 22:02
수정 삭제
전두환 대통령이 제일 잘못한게 5.18때 북한군이 참여한것을 밝히지 못한것과 당시 폭도들한테 피해를 본군인들의 패해상항을 적극적으로 언론에 알렸어야 함에도 소홀했던게 과오다
금정산
2024-09-13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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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데도 5.18 진상을 정확히 규명 못하는 이유가 빨갱이 판사들 때문인가? 이전에 공주사태 관련 참석했던 판새 새끼들 거의가 전라도 새끼들인갑다. 공주사태 바로 잡지 못하는 윤석열도 대통령이라고
국민
2024-09-13 07:22
수정 삭제
이런 폭도들을 사형을 시켜도 션찮을 판국에 유공자랍시고 세금으로 연금을지급하고 또한 각종 혜택을 누리고있다. 과연 이것이 옳은일인가?
DK
2024-09-13 06:56
수정 삭제
5.18 진실찾기에 혼신을 다하는 허겸 사회부장께 찬사를 보냅니다.암흑속에 가려진 5.18의 실체가 반드시 가려질 것을 확신합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