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5] 불편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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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2-12 06:20:00

작은 틈새조차 분양받지 못한 아침 지하철 통학보다 승연을 더 불편하게 만드는 게 있었다. 석진이다. 학력고사를 마치고 승연은 처음으로 소개팅이라는 걸 했다. 절친인 현주의 이란성 쌍둥이 현섭이 승연을 졸라 만들어진 자리였다. 석진은 첫눈에 호감 가는 타입이 아니었다. 전교에서 탑을 유지하는 우등생이라든가 아버지가 의사라든가 하는 정보는 승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석진이 의대 가라던 아버지 권유를 무시하고 토목공학과에 소신 지원했다는 얘길 들었을 때야 승연은 그가 조금 궁금했다. 대를 잇는 의사 집안의 안정된 삶을 거부하고 건설 현장 노가다가 되겠다니. 게다가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문학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할 정도로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이과 출신들은 대부분 대화가 수학 공식처럼 단순하고 간단했다. 보이지 않는 현상을 거론하기 싫어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감각에 깃든 의미들의 기호인 문학을 이해하다니, 이과 출신 문학청년이라니, 흥미로웠다. 둘은 문학으로 가까워졌다. 승연은 문학에 대해서만큼은 또래 누구보다 해박하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석진의 독서량과 기억력은 늘 승연의 자부심을 당황케 했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밤하늘의 별을 보던 승연이 알퐁스 도데 ‘별’의 한 장면을 기억하며 아는 척했다.

“비가 그친 하늘에는 별이 쏟아지고 소년은 별에 관한 얘기를 해 줘. 얘기를 듣다 소녀는 잠이 들고 곁에 누워 잠든 소녀를 두고 한숨도 못 자는 소년이 얼마나 순수한지.”

석진의 맞장구는 한결 우아했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은 한 편의 시 같아. 저 많은 별 중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 어깨에 기대 잠들고 있는 거라고. 이런 표현, 정말 끝내 주지? 나는 독자가 소설 읽다가 가슴에 꽂히는 한 구절만 건져도 소설가는 성공했다고 생각해.”

석진은 보란 듯이 서울대 토목공학과에 합격했고 승연은 보란 듯이 이화여대 영문과에 미끄러졌다. 석진 앞에서 한껏 부풀린 지적 자만이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그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순식간에 자격지심으로 바뀌었다. 재수를 핑계로 그에게 결별을 선언했다. 석진과 헤어질 생각이 조금도 없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었다. 궁색한 핑계로 그와 결별한 걸 후회했다. 치기 어린 변심을 자책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재수하겠다 해 놓고는 지하철 타고 후미진 경기도 어딘가로 통학하는 모습을 석진에게 보여 주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약간은 미안한 마음도 있었는데 다행히 석진의 한마디가 승연의 결심을 굳혀 주었다. 재수해도 기다릴 거고, 승연이 어느 대학에 가도 상관없다고. 예수처럼 통찰하고 부처처럼 인내하고 어른처럼 달래고 선배처럼 위로하는 동갑내기의 성숙함은 승연에게 패배감만 안겼다. 사랑의 본질이 언제나 온유하며 믿음과 소망을 담아 배려하고 참는 것이라면 지루해서 못 견딜 것이다. 감정에 본질이 어딨나. 못 믿는 게 감정인데. 변함없이 나를 만날 수 있다고? 지금은 그렇겠지. 시간이 지나면 너도 같아져. 석진이 매달리면 이렇게 얘기할 참이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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