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가 ‘세계 외교의 중심’으로 변모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로런스 웡 싱가포르 총리 등 주요국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인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단순한 회의가 아니라, 새로운 국제질서 속 한국 외교의 시험장이었다. 이재명 대통령에게 이번 회의는 취임 이후 최대 외교 무대이자 한·미 관세협상,핵추진잠수함 도입,AI(인공지능) 협력,문화산업 확산 등 다층적 현안을 풀어내야 하는 ‘종합외교전’이었다.
2일 APEC정상회의가 성료한 가운데 이번 회담에서 가장 큰 시험대는 한·미 정상회담이었다. 29일 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회담 직전까지만 해도 협상 결렬 가능성이 점쳐졌다. 트럼프 행정부가 요구한 ‘8년간 총 2500억달러 현금 투자’는 사실상 ‘백지수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국익에 반하는 조건은 수용할 수 없다”며 단호한 선을 그었다. 막판까지 협상을 주도한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 간의 ‘핫라인 교섭’ 끝에 극적 타결이 이뤄졌다.
결과는 연간 200억 달러 상한·총 2000억 달러 현금 투자이다. 여기에 한·미 조선협력 프로젝트 ‘MASGA’(Maritime and Shipbuilding Growth Alliance)에 1500억 달러를 별도 할당하면서 정부의 직접 재정 부담도 줄였다. 이는 일본이 동일 협상에서 ‘5500억 달러 일괄 투자’를 약속한 것에 비해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 대통령은 “안보와 경제는 분리될 수 없다”며 관세 협상을 넘어 ‘안보 패키지 협정’도 병행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또 다른 핵심 의제는 핵추진잠수함(핵잠) 건조 승인이었다. 이 대통령은 “핵무기 탑재가 아닌 자주국방을 위한 핵연료 공급 협력을 요청한다”고 제안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다음 날 “한국의 핵잠 건조를 승인했다”고 공식화했다.
이로써 한국은 미국·러시아·중국·프랑스·영국·인도·호주에 이어 세계 8번째 핵잠 보유국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이 사업은 국방·외교·산업·기술을 아우르는 초대형 국책 프로젝트로 정부는 총리실 산하에 범정부 사업단을 설치해 추진할 계획이다.
지난달 30일 부산 김해공항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도 한국 외교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은 100분간의 회담 끝에 ‘관세전 확전 자제’와 ‘펜타닐 세율 10%로 인하’ ‘희토류 통제 1년 유예’ 등을 포함한 전술적 휴전(small deal)에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이 대통령이 제안한 ‘경제공동체 내 협력 플랫폼’ 구상이 양국 실무협의에 반영되면서, 한국이 미중 대립 속 ‘가교국(Bridge State)’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입증했다.
한·미 회담 다음 날, 이 대통령은 연이어 한·중,한·일 정상회담을 소화했다. 시 주석과의 회담에서는 ‘경주 APEC 계기 신뢰 복원’이 핵심이었다.
이 대통령은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중국의 건설적 역할을 기대한다”고 했고, 시 주석은 “한반도 안정 유지에 협력하겠다”고 응답했다. 양국은 ‘서비스무역·문화콘텐츠 교류 강화 업무협약(MOU)’을 체결하며 경제·문화 협력의 복원 신호탄을 쏘았다.
이어진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일본 신내각의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와 첫 회동을 갖고, “셔틀외교를 지속하고 미래지향적 관계로 나아가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 대통령은 “양국은 과거를 직시하되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고, 다카이치 총리는 “안보·경제 협력의 연속성을 유지하겠다”고 화답했다.
엔비디아·AWS 등 글로벌 기업, 한국에 14조 투자 선언
“경주선언” 채택…AI·문화창조산업·포용성 강조한 新비전
이번 회의에서 AI와 반도체는 외교와 경제를 잇는 핵심 키워드였다. 경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APEC 최고경영자(CEO) 서밋에는 젠슨 황(엔비디아)·맷 가먼(AWS)·사이먼 칸(구글)·앤서니 쿡(MS)·최태원(SK)·이재용(삼성전자)·정의선(현대차)·구광모(LG) 등 세계 주요 CEO들이 총출동했다. 특히 황 CEO는 한국 정부 및 4대 그룹과 GPU(그래픽 처리 장치) 26만 개 공급, 총 14조 원 규모의 초대형 협력을 공식화했다.
이 정부는 이를 기반으로 ‘주권형(Sovereign) AI 인프라 구축’을 추진하며, “AI 3대 강국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AWS는 인천·경기권에 2031년까지 50억 달러를 투자해 AI 데이터센터를 신설하기로 했고, 구글·마이크로소프트·메타도 협력 세션에서 각각 한국 연구소 설립과 스타트업 공동투자 구상을 밝혔다.
경주 APEC 현장은 첨단산업의 무대인 동시에 ‘K컬처 실험장’이었다. 백악관 캐롤라인 레빗 대변인이 올리브영에서 13종의 화장품을 구입한 인증샷을 올렸고, 국제통화기금(IMF) 게오르기에바 총재와 각국 정상 배우자들이 ‘K뷰티 파빌리온’을 찾아 한국 화장품을 직접 체험했다.
K푸드 열풍도 뜨거웠다. 황 CEO가 이재용·정의선 회장과 ‘치맥 회동’을 하며 “한국 치킨은 세계 최고”라고 외친 장면은 CNN과 블룸버그에 보도됐다. 라면·떡볶이·호떡·김스낵 등 한국식 간식이 APEC 미디어센터 푸드트럭의 주역이 됐고, 정상 만찬에는 단감·게살 샐러드·경주 한우 갈비찜·된장 캐러멜 인절미가 올랐다.
정상회의 마지막 날 채택된 ‘경주선언(Gyeongju Declaration)’은 이번 APEC의 상징적 결실이었다.
21개 회원국 정상들은 “AI·인구구조 변화·문화창조산업 협력”을 공동의 핵심 의제로 규정했다. 이는 미국과 중국이 모두 참여한 최초의 AI 정상급 합의문이자, 이 정부가 제시한 ‘디지털 인류공동체’ 비전의 첫 실행 문서였다.
경주선언에는 “아시아·태평양은 중대한 기로에 서 있으며, 인공지능과 문화산업이 포용적 성장을 견인할 것”이라는 문구가 담겼다. 이 대통령은 폐막 발언에서 “AI의 공정성과 문화의 다양성을 동시에 존중하는 아시아태평양 평화공동체로 나아가자”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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