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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 전투에서의 패배와 성왕의 죽음으로 백제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더불어 신라에 대한 적개심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로써 60여 년을 지속해 온 나제동맹은 무참히 깨져 버렸다. 이후로 양국은 견원지간처럼 극단적으로 대립하게 됐다.
서력 554년, 도성으로 돌아온 부여창은 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백제 제27대 임금인 위덕왕(威德王)이다.
귀족 세력을 힘으로 눌렀던 성왕의 죽음은 왕권의 약화를 초래했다. 위덕왕은 제때 구원군을 보내지 않은 백협 일당을 엄하게 벌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
위덕왕은 분했지만 왕위에 오르는 것부터 귀족들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타협과 공생을 모색해야 했다.
위덕왕은 신라에 대한 원한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일 뿐 아니라 끊임없이 백제를 위협하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제 백제의 주적(主敵)은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였다.
백제 왕은 신라와의 접경 지역에 군사를 집중적으로 배치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쳐들어갔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기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양국의 싸움은 국지전(局地戰)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진흥왕은 관산성 전투에서의 승리로 한강 유역을 차지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삼국을 통일하고 천하에 신라의 위엄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런 국왕의 심중을 헤아리고 있던 신하들은 내친김에 사비성까지 공격하자고 한목소리로 주청했다. 이에 신라 왕은 때가 아니라고 반대했다.
진흥왕은 신하들을 데리고 한성으로 향했다. 새롭게 얻은 한수 유역의 땅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한성으로 가는 길에 적성(赤城)에 들렀다.
적성은 죽령 너머 적산에 있는 산성으로 신라의 북방 개척을 위한 전초기지였다. 이 성이 완공되기까지는 순탄치 않은 과정을 겪어야 했다.
신라군이 죽령을 넘어 적산 땅을 점령했을 때 진흥왕은 한수 유역으로의 진출을 염두에 두고 이 지역에 산성을 쌓게 했다.
적산현은 오랫동안 고구려의 영토였기에 주민은 신라의 지배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신라군이 적산에 산성을 쌓는다고 하자 대놓고 반발했다.
이때 적산현의 토호인 야이차(也爾次)가 중재에 나섰다. 그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성을 축조하는 데 필요한 자금까지 내놓았다.
우여곡절 끝에 축조에 들어간 산성이 완공될 즈음 뜻하지 않은 사고가 터졌다. 야이차가 성벽 위에서 떨어진 바위에 깔려 죽은 것이다. 이 일로 적산 주민이 동요하자 진흥왕은 교지를 내려 민심을 수습했다.
“야이차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에 힘쓰다가 안타깝게 저세상으로 떠났다. 우리는 그의 공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짐은 그의 식솔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고 합당한 보상을 하겠다. 그리고 공적을 기리는 비를 세워 그의 충절을 널리 알리도록 하겠다. 앞으로 야이차처럼 나라를 위해 애쓴 사람에게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그에 걸맞은 포상을 할 것이며 그 후손까지 우대하겠다.”
진흥왕의 교시를 들은 적산 사람들은 다시 힘을 내어 성을 쌓았고, 마침내 완공했다. 국왕의 발 빠른 조치는 새로이 편입된 지역의 백성에게 신라에 대한 충성심을 심어 주었다.
적성은 이처럼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축조되었기에 신라 왕에게 더욱 뜻깊은 곳이었다. 진흥왕은 적성이 완성되자 친히 행차하여 고생한 백성을 위무하고 이를 기념하는 비를 세우게 했다.
몇 년 만에 다시 적성을 찾은 진흥왕은 주변의 백성을 위로하고 한성으로 나아갔다.
한성 군주 죽부(竹父)가 반갑게 맞이했다.
“폐하께서 몸소 왕림해 주셔서 군민의 사기가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진흥왕이 인자하게 물었다.
“고생이 많구려. 서북변의 상황은 어떠하오?”
“고구려군은 아직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쳐내려올 수 있기에 북한산 너머 독산성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해 두었습니다.”
진흥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전선을 둘러보도록 합시다.”
죽부의 얼굴에 기쁜 빛이 떠올랐다.
“폐하께서 친히 군사들을 위로하신다면 용기백배할 겁니다.”
다음 날, 진흥왕은 한성 군주의 안내를 받아 독산성을 비롯한 여러 요새를 돌아보고 그곳의 군사들을 위로했다. 그들은 크게 감격하여 너나없이 국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진흥왕은 주변을 한눈에 둘러보기 위해서 북한산에 올랐다. 이 산은 온조왕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도읍으로 정할 땅을 찾기 위해 올랐던 곳으로, 한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요충지였다. 백제의 개로왕도 이곳에 산성을 쌓았고, 삼국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진흥왕이 산을 오르다가 위를 올려다보니 바위로 이뤄진 봉우리가 마치 애를 업은 아낙처럼 보였다.
국왕은 호기심이 생겨 한성 군주에게 물었다.
“산의 형세로 볼 때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품고 있는 것 같구려.”
“그렇습니다. 이 산은 세 봉우리가 우뚝 솟아 하늘의 정기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풍광까지 수려해서 도를 닦는 사람이 많이 찾아옵니다.”
죽부의 얘기를 듣고 나니 진흥왕은 산의 풍경을 구경하고 싶어졌다.
“산성으로 가기 전에 주변을 둘러보고 싶구려.”
이리하여 국왕 일행은 산성으로 이어진 길을 벗어나 험한 바위를 타고 봉우리로 올랐다.
한참동안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오르는데 앞서 가던 군사가 달려와서 아뢰었다.
“저 위에 커다란 석굴이 있습니다. 안에 사람이 거처하는 듯합니다.”
죽부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얘기했다.
“아마 석굴 안에 수도자가 있을 겁니다. 이 근처에는 그런 자가 많습니다.”
진흥왕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그 석굴에 들어가 보고 싶군.”
신하들이 만류했지만 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석굴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진흥왕이 석굴에 당도해 보니 입구는 두세 사람이 너끈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왕이 거리낌 없이 석굴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안위를 걱정한 죽부가 앞장을 섰다.
석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통로가 좁아지더니 급기야는 한 사람이 지나기도 어려울 정도가 됐다. 안쪽은 빛이 닿지 않아 몹시 어두웠다. 죽부는 등골이 오싹하여 돌아가고 싶었지만 왕이 걸음을 재촉했기에 계속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를 들어갔을까? 앞에서 빛이 어른거렸다. 죽부는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구부러진 통로로 들어섰다. 따스한 빛과 함께 넓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빛에 익숙해지자 죽부의 눈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도인이 보였다. 그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여전히 참선에 빠져 있었다.
뒤를 이어 진흥왕이 빛 속으로 들어섰다. 그는 도인을 지그시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죽부는 도인에게 진흥왕의 왕림을 알렸다.
“폐하께서 납시셨으니 예를 갖춰라!”
도인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폐하라 하시면 백제의 임금이십니까?”
순간 죽부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무엄하구나! 이 분은 대신라국의 국왕 폐하이시다. 어서 예를 갖춰라.”
도인은 호령을 듣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나는 제대로 된 인간만 상종합니다. 함께 장사했는데 이익을 독차지하려고 친구를 죽였다면 올바른 인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영토를 얻기 위해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성왕을 죽인 진흥왕을 대놓고 비난하는 것이었다.
죽부는 도인이 국왕을 능멸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칼을 빼 들었다.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게로구나!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망발을 일삼느냐!”
진흥왕이 손을 들어 만류했다.
“물러서시오. 내 직접 이야기를 해 보겠소.”
죽부가 마지못해 물러나자 국왕은 도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으냐?”
도인은 껄껄 웃더니 진흥왕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승과 저승이 다르지 않거늘, 두려울 게 뭐 있소.”
태연자약한 모습에 진흥왕은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직감했다.
“내 어리석어 눈이 있어도 선인을 알아보지 못했소. 부디 용서하시구려.”
진흥왕은 공손히 옷깃을 여미고 예를 갖췄다. 도인은 가만히 앉아서 답례했다. 이는 하대나 다름없었지만 진흥왕은 개의치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도인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신라국 왕은 그릇이 큰 인물이라 하더니 헛소문은 아니었구려. 내 그대를 믿고 천기를 알려 주겠소. 지난밤 천문을 보니 북두칠성이 스러지고 남두육성이 기운을 더해 가더이다. 이는 고구려가 쇠하고 신라가 크게 일어날 징조요. 부디 하늘의 뜻에 부응하여 자신을 닦고 백성을 제 몸과 같이 돌보시오. 그러면 머지않아 신라가 삼국을 품게 될 것이오.”
진흥왕은 삼국을 아우른다는 말에 내심 기뻤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나와 함께 내려가십시다. 곁에서 부족함을 일깨워 주시오.”
도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미 속세와 인연을 끊었소. 볼일이 끝났으면 돌아가시오.”
도인은 다시 눈을 감더니 내면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진흥왕은 아쉬웠지만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돌아갑시다.”
석굴 안은 다시금 어둠으로 뒤덮였다.
서북변 순행을 마친 진흥왕은 동북쪽 변경으로 사찬(沙飡) 성종(成宗)을 파병했다.
성종은 고구려와의 국경을 넘은 뒤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안변까지 점령했다. 신라 왕은 그곳에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성종을 군주로 삼았다. 이듬해에도 신라군의 북진이 거듭됐지만 고구려는 간주리의 반란 사건으로 군사를 보낼 여력이 없었다.
진흥왕은 신주를 폐하고 감문주(甘文州)와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함으로써 백제·고구려와의 접경 지역을 정비했다. 그리고 국원에 소경(小京)을 둠으로써 변방의 군사 활동을 지원하게 했다.
이로써 신라는 역사상 유례없는 방대한 영토를 지닌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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