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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 문학의 새 장이 열렸다. 박선경 장편소설 ‘86학번 승연이’는 그동안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하고 있다. 차마 들추어내기 무서웠던 것들, 흉흉한 소문으로 들려오던 이야기들….
박 작가를 인터뷰하기에 앞서 80년대 운동권 출신 작가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진실을 외면한 것인가, 진실을 몰랐던 것인가. 당신들은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든다는 핑계로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일들을 벌였다. 당신들에게 이 책의 독후감을 받고 싶다.
40년 만에 이룬 소설가의 꿈
첫 소설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뛰어나다.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아니 그동안 왜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여고 때 국어 선생님이 저에게 ‘반드시 소설가가 되라’고 말씀하셨어요. 행동에 옮기는 데 40년이 걸렸네요. 학창 시절 친구들은 제가 당연히 소설가가 될 줄 알았어요. 저 역시 소설가로 멋있게 등단하려고 습작을 많이 했고요.”
박 작가는 이문열 작가를 롤모델로 삼았다. 그분처럼 완벽한 작품을 쓰겠다고 결심했다. 결심은 강박이 되었고 스스로 잘 썼다고 느끼기에 자신의 작품은 터무니없이 모자랐다.
그는 소설 쓰기에 대한 욕망을 ‘언젠가’로 연기하고 버킷리스트에 고이 담아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계기가 찾아왔다.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86학번 승연이’ 속 희숙의 스토리)이 여기저기 공유되면서 엄청난 화제몰이를 한 것이다. 그 글은 학창시절 교회에서 알고 지내던 운동권 여학생이 실제로 겪은 이야기였다.
희숙의 이야기가 실화라니 놀라웠다. 희숙은 운동권 애인인 변태섭으로부터 정신과 육체를 유린당한 끝에 자살로 삶을 마감한 인물이다. 변태섭은 자기 여자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리고도 일말의 반성도 없고 죄책감도 갖지 않는다.
남정욱 소설가·전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에 따르면 변태섭은 “민주를 위해 민을 겁탈하고 학살하면서 어쩔 수 없는 콜래트럴 데미지(부수적 피해)로 치부하는 동시에 자신은 그럴 권리가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부류였다.
이어 그는 “위선과 정신질환이 뒤섞인 변태섭의 정신세계는 특별히 유난한 것도 아니고 그들 세계에서는 보편이고 일상이다. 그래서 자기 여자를 상납하고 받는 자도 태연히 받아먹는 것이다”라고 운동권의 가짜 도덕을 비판했다.
도덕이 목적이 된 극단적 사례가 1991년 문을 닫은 볼셰비즘이고, 크메르 루주의 집단 학살 사태이다. 그 시절 우리나라 운동권도 민주주의를 선취한다는 이름으로 태연하게 비윤리적인 행동을 일삼았다.
취재에만 1년 세월 투여
희숙의 이야기와 관련해 엄청난 제보가 들어오면서 박 작가는 직접 취재에 나서기로 했다. 그러나 소설 속 희숙과 같은 투사 여학생들을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거에 나 운동권이었노라, 떳떳하게 말하는 여성이 없더라고요. 대부분 강윤희처럼 운동 전력을 감추고 새 신분으로 살지요. 누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을 폭로하려 하겠어요. 숨기고 싶은 과거일 뿐이죠. 자신한테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일 수도 있고요.”
다행히 운동권에 몸담았던 선배·지인의 도움으로 취재를 이어갈 수 있었다. 박 작가는 소설 속에 나오는 현장은 전부 찾아다녔다. 세월이 흐른 만큼 대부분의 장소가 80년대와 매우 달라져 있어 본인의 기억이나 자료에 의지해서 쓴 게 많다.
“운동권을 이해하기 위해 공부해야 할 자료가 방대했어요. 하나의 사건 뒤에 따라오는 다른 사건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어요. 대학 땐 읽지 않았던 사회과학 서적도 탐독하고 아카이브는 거의 다 찾아봤지요. 취재에만 1년이 넘게 걸렸어요.”
그는 가장 애정이 가는 캐릭터로 희숙을 꼽는다. 동시에 안타까운 인물이기도 했다.
“제가 소셜미디어에 썼던 동네 은지 언니가 희숙의 실제 모델이었어요. 신앙심 깊고 착하고 예뻤던 언니였어요. 파국으로 끝난 그 언니의 삶을 보면서 민주화가 무엇이길래 개인의 삶을 저리 철저하게 망가뜨리나, 운동 전력을 전리품 삼아 권력을 쥐고 사는 누구누구도 있는데….”
사회악으로 자리매김한 586
누구누구란 현 좌파 정권을 장악한 이들일 것이다.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80년대 학번들이 자라 586세대가 되었다. 그들이 저지르는 온갖 구역질 나는 행태는 차마 눈뜨고 못 봐 줄 정도다. 이들의 행동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나라의 기강을 흔들어 댄다. 그러고도 더 꼴불견인 것은 자기 동정·자기연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여전히 피해자·약자 코스프레에 여념이 없다는 것이다.
“승연의 남친으로 나오는 태주도 애착이 많이 가는 캐릭터예요. 태주는 제가 아는 선배를 모델로 썼어요. 독자들은 승연과 저를 동일시 하더라고요. 자전적 소설인 줄 아는 분들이 더러 있어요. 아마 등장인물이 나오는 학교 배경 때문인 것 같은데 저는 운동권 근처에는 얼씬도 안 했어요. 다만 승연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갈등하던 모습, 첫 남자친구 석진과 지하철에서 조우하는 장면, 박철규가 수업 중인 강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와 시위에 동참하라 외치던 장면 등 몇 가지는 제 이야기 맞아요. 승연을 빌어 묘사하긴 했죠.”
박 작가가 차마 책으로 다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80년대는 여성에게 보수적인 윤리 기준이 적용되던 시절이었어요. 신혼여행 가서 아내가 처녀가 아니란 걸 알고 착잡한 마음에 호텔 베란다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댄 신랑이 있다더라, 이런 말이 나오던 시절이었거든요. 지금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가 막혀 비웃겠지만 그땐 그랬어요. 그만큼 정조는 여성이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었죠.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운동권 여학생들에게 성적자기결정권을 주입시켰으니 얼마나 혼란이 컸겠어요.”
성적자기결정권이라는 이름의 만행
그가 취재한 운동권 여성들도 그런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한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웠으나 혁명에 참여해야 했기에 명령(?)을 따랐다고. ‘자발적으로 벗어 던지라’는 주문이 있었지만 결코 자발적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하는 것처럼 여자도 남자들처럼 성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하라, 성은 거추장스러운 거다, 처녀성을 버려야 여성이 진정으로 인생의 주권을 찾는 것이다, 라고 주입식 사상교육을 받았대요. 그땐 그러는 게 맞다고 생각했대요. 그래서 운동권 여학생들치고 임신·낙태를 경험하지 않은 여학생이 드물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가 취재한 내용 중에 가장 충격적인 증언은 운동권 남학생들에게 윤간당한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술집을 전전하다 마약까지 손댄 여학생 이야기였다. 또 어떤 이는 자괴감에 못 견뎌 일본으로 건너가 성매매하며 살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떻게 성 착취가 이루어지는지 소설에 자세히 썼다가 삭제했어요. 제가 감당 못 하겠더라고요. 취재하면서 분노하고, 글을 쓰면서 분노하고… 감정을 자제하고 객관화하는 작업이 필요했어요. 활자는 냉정해야 해요. 작가가 감정을 절제해야 독자가 편해지거든요. 저는 선동을 싫어해요. 그게 글이든 스피치든 선동하려면 감정이 이입되어야 해요. 그걸 잘하는 집단들이 있죠.”
그는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번의 소설 작업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박 작가는 더 이상 운동권 전력을 삶의 수단으로 삼는 이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40년간 충분히 누리고 즐겼으므로 586은 이제 시대의 중심에서 사라져야 한다.
“겉으로 민주열사인 척하지만, 속은 탐욕에 젖은 부패한 불한당 같은 존재들은 이제 정치권에 발 못 붙이게 해야 해요. 국민도 586의 악령에서 벗어날 때가 됐어요. 민주화 유공자란 이유로 국가의 발전이나 비전을 막아서는 행동을 더 이상 두고만 보아선 안 돼요. 그들 손아귀에 국가의 흥망성쇠가 결정되어서는 안 돼요. 물론 운동했던 모든 이들이 추악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니고요.”
586세대 이제는 물러나야
앞으로 그가 어떤 소설을 쓸지 궁금했다.
“어쩌다 보니 ‘86학번 승연이’가 사회고발 소설이 되었어요. 첫 소설 장르를 이렇게 시작하려 했던 건 아닌데… (웃음) 이왕 이렇게 된 거 차기작도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쓰고 싶어요. 물론 취재에 어려움이 있고 시간도 걸리겠지만 제가 사회정의에 기여했다는, 역사를 바로잡는 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은 남겠죠?”
그는 ‘86학번 승연이’를 쓰고 나서 소설가로서 책임을 느꼈다고 한다. 지금 그에게 가장 간절한 바람은 ‘86학번 승연이’가 더 많이 읽히는 것이다. 세대교체의 작은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 이유는 하나의 죽음이 천 개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세대교체를 위해 ‘86학번 승연이’가 나섰다. 이 작은 소설이 천 명 만 명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면 그가 그토록 원하는 세대교체의 날도 올 것이다. 박선경 작가의 차기작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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