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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준의 뮤직세이] 역설의 미학, 바흐와 수난곡
서양음악사 최고 유산 ‘마태수난곡’의 수난
예수 개인의 감정적 내면 아리아로 표현돼
수난 통한 아픔, 역설의 잔잔한 가치로 위로
김명준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3-22 06:31:00
▲ 김명준 지휘자·스카이데일리 미국 통신원
때로 음악은 역설이다. 장조의 밝은 선율로 슬픔을 노래하는가 하면 단조의 어두운 곡조 속에서 기쁨을 노래하기도 한다.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다루는 수난곡(Passion Oratorio)은 역설의 결정체다. 죽음을 둘러싼 심연의 어두움, 그러나 그 안에 내재된 사랑과 희망은 잔잔한 메아리가 되어 우리의 삶을 위로한다. 수난을 통한 위로라니, 그야말로 역설의 음악이다.
 
1729년 서양음악사 최고의 거장이라 불리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1685-1750)는 오늘날 인류 최고의 유산이라 평가되는 ‘마태 수난곡’을 초연했다. 두 개의 독립된 합창단과 소년 합창단, 거기에 두 개의 오케스트라 편성에 연주 시간만 세 시간에 이르는 대작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것일까. 이 작품은 ‘길고 어렵다’는 청중들의 혹평 속에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걸작’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바흐가 세상을 떠난 뒤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그의 가족은 총 600페이지에 이르는 이 대작의 악보를 이름 모를 악보 수집가에게 팔아 버린다.
 
다행히도 마태 수난곡의 필사본은 훗날 독일 낭만 음악의 거장인 멘델스존에 의해 재발굴된다. 악보를 보자마자 작품의 진가를 알아본 멘델스존은 곧바로 재초연 준비에 돌입했다. 그리고 리허설에만 2년을 쏟아 부었다. 그렇게 1829년 마태 수난곡은 바흐 본인에 의해 초연된 지 꼭 100년 만에 멘델스존의 지휘로 재초연된다. 연주는 성공적이었다. 바흐에 대한 ‘역주행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잊혀 가던 바흐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다. 
 
수난 오라토리오와 ‘마태 수난곡’
 
▲ 2014년 베를린 필하모닉(지휘 사이먼 래틀)의 바흐 ‘마태 수난곡’ 공연 모습. 중앙의 지휘자를 기준으로 왼쪽과 오른쪽에서 두 개의 합창단과 두 개의 오케스트라가 각각 연주하고 있다. WSJ
 
마태 수난곡은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다룬 ‘수난 오라토리오’다. 예수가 그의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고, 로마 군인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기까지의 긴박했던 밤의 서사가 독창과 합창, 그리고 관현악의 극적인 조화로 표현된다. 대본은 마태복음서의 텍스트와 자유 서정시를 기초로 한다.
 
오페라와 달리 오라토리오에는 출연자의 연기나 무대 장치가 없다. 음악 외적인 장치의 도움 없이 오로지 음악만으로 극을 이끌어 가기 위해 ‘에반겔리스트’ 혹은 ‘복음사가’라 불리는 테너 독창자가 존재한다. 에반겔리스트는 작품 전체에 걸쳐 대사 위에 음조를 더해 말하듯 노래하는 레치타티보를 통해 극의 전개를 청중들에게 전달한다. 일종의 내레이터 역할을 하는 셈이다.
 
에반겔리스트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역할은 단연 수난곡의 주연인 ‘예수’다. 베이스 독창자에 의해 묘사되는 예수는 열두 제자·빌라도·군중 등 여타 역할과 긴밀한 호흡을 주고받으며 극에 긴장감을 더해 간다. 성서에서는 볼 수 없던 예수 개인의 감정적 내면이 자유시를 바탕으로 한 아리아를 통해 표현되기도 한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노래하는 “오라 달콤한 십자가여”가 대표적인 예다. 예수와 함께 등장하는 독창자들은 극적인 서사 한가운데서 사건을 바라보는 인물의 감정을 노래하며 정적인 위안을 선사한다.
 
수난곡의 꽃은 합창이다. 특히나 이 작품에 등장하는 두 개의 독립된 합창단은 예수를 로마군에 넘겨주며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치는 성난 군중의 모습을 노래하다가도, 수난의 아픔을 바라보는 신자의 내면을 노래하기도 한다. 독일 전통 선율에 4성부의 수직적 화성이 더해진 ‘코랄(Chorale)’의 유려한 선율과 더없이 아름다운 화성, 그리고 시적인 가사는 작품 밖 청중들을 사건의 현장으로 불러들이며 감정적 격동을 일으킨다.
 
수난의 미학
 
독일의 철학가 발터 벤야민은 “예술 작품에는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아우라가 있다”고 했다. 200년 전 멘델스존을 사로잡은 것이 바로 아우라일까. 창고에 갇혀 인고의 세월을 견뎌 낸 ‘마태수난곡’은 그 아우라에 힘입어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와 인류에게 감동을 선사해 왔다. 바흐의 수난곡은 정적이며 동시에 격동적이고, 고난을 노래하나 아름답다. 바흐는 수난을 통한 아픔을 역설의 잔잔한 가치로 위로했다. 현실에 절망하고 좌절하면서도 다시금 일어나야 하는 오늘, 바흐가 전하는 역설의 미학에 귀 기울여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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