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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 前보건복지부 장관 긴급 시국 제언 <1>
[최광 칼럼] 尹대통령은 태평성세 이룬 唐태종 통치술 본받아야
唐태종 성공 뒤엔 측근 쓴소리꾼 위징‧황후가 있었다
武將 출신이지만 황제 등극 후엔 문민통치… 인재 발굴‧등용 치중
혁신 토지제도 ‘租庸調’‧과거제‧징병제 도입해 ‘정관의 치’ 성취
최광 필진페이지 + 입력 2024-04-15 18:22:14
 
▲ 최광 대구대 석좌교수·前보건복지부 장관
태종 이세민(李世民·598~649)은 당() 나라 2대 황제다. 이세민은 뛰어난 군사적 전략으로 수나라 말기에 혼란스러웠던 중원을 평정하고 당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형 이건성(李建成)과 아우 이원길(李元吉)이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사전에 탐지한 이세민은 형제들을 처단하는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을 일으켜 부친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으로부터 왕권을 강제적으로 양위 받아 황제가 되었다. 이세민은 2대 황제이기는 하나 실질적으로 당 건국의 주역이었다.
 
이세민은 어린 시절부터 임기과단(臨機果斷)하고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아 당시 누구도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대담하게 행동했을 뿐만 아니라 정의감이 넘치는 비범하고도 영리한 소년이었다 한다. 황위에 오르기 전에는 무장으로 재능을 발휘했던 이세민은 즉위와 동시에 무인에서 문인으로 스스로 탈바꿈한다.
 
유능한 참모들을 곁에 두고,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 양성하고, 농민에게 균등하게 토지를 나눠주고, 모두를 포용하는 정치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동돌궐을 정벌하고 중앙아시아도 정복해 당의 국토를 이전 수() 나라에 비해 2배로 확대하였다. 뛰어난 정치가·전략가·예술가이기도 했던 이세민이 사심을 내려놓고 백성을 위한 정치로 전성기를 이끌었던 재임 기간(AD 626~649)을 정관의 치(貞觀之治)라고 한다. 사심을 누르고 백성을 불쌍히 여겨 정치에 힘썼기에 역대 중국의 황제 중 최고의 성군이라는 평가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 태종 이세민은 불굴의 투지와 용기를 갖춘 용장인 동시에 변칙적인 전술에 능란한 지장이었다. 소수의 기병으로 적진을 돌파해 전세를 역전시키는가 하면 지구전을 펼쳐 상대를 기진맥진하게 만든 다음 항복을 받아내기도 했다. 장병들과 고락을 같이하는 지휘관으로 결단력과 포용력도 갖춰 모든 사람들의 신망을 받았다. 하지만 사람과 너무 멀리하지도 너무 가까이하지도 않음으로써 자신의 위엄을 유지함과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친근감을 준 황제였다.
 
태종의 시대 치세가 잘 되어 그 전까지 없었던 태평성대를 누렸는바 요인은 세 가지다. 첫째, 태종 자신이 역사에 찾기 힘든 명군이었다. 둘째, 그를 보좌하는 신하가 뛰어 났기 때문이었다. 셋째, 성군과 명신이 하나가 되어 치세에 몰입했기 때문이다.
 
이세민은 현무문의 변이 일어났을 때 상대편에 서서 자신을 공격했던 장군과 관료들을 대거 등용하는 등 능력이 뛰어나면 누구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세민은 형 이건성의 신하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위징(魏徵·580~643)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위징은 명참모로 태종을 도와 당나라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세민은 황제와 사적(私的)관계가 있는 사람은 누구도 등용하지 않았다.
태종은 신하들이 국사를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으며신하들의 건의도 매우 잘 들어 주었다. 이세민은 신하들이 아무리 독설을 퍼부어도 역정을 내지 않았고, 간언을 잘 받아들여 언제나 국가와 백성들을 위해 좋은 정책을 만들 수 있었다. 한번은 이세민이 누군가를 사형에 처하라는 조서를 내렸는데 한 신하가 형벌이 지나치다고 비판하며 반대하자, 이세민은 그 신하에게 후한 상을 주었다고 한다.
 
당 태종의 정관의 치에 더하여 중국 황제들 중 태평성대를 이뤄 ()’로 지칭되는 황제들이 있다. 이들 중 대표적 사례는 주() 나라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의 성강의 치(成康之治·BC 1017~961), 전한(前漢) 시절의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치세로 문경의 치(文景之治·BC 180~141), 남조(南朝) 시대 송() 나라 문제(文帝)의 원가의 치(元嘉之治·당 태종(太宗)을 이은 현종(玄宗)의 개원의 치(開元之治·714~741), 그리고 청() 나라 강희제(康熙帝) 옹정제(雍正帝) 건륭제(乾隆帝) 3대 황제의 130년 통치의 성세(盛世) 시기 등이다.
 
정관의 치로 대당(大唐) 성대(盛大)를 열다
 
정관의 치(貞觀之治·627~649)는 당나라 2대 황제 태종 이세민이 통치하던 시기의 태평성대(太平聖代)를 말한다. 태평성세(太平聖歲)라고도 하는데, 이는 정치적으로 혼란이 없고 백성들이 풍요롭게 사는 평화로운 나라라는 의미이다. 당 태종이 통치한 24년 동안 정치·경제·문화·예술·군사 등 여러 방면에 대단한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는 황금시대를 맞았다. 중국 역사상 가장 번영했던 시대 중 하나였다.
 
당 태종 이세민은 방현령(房玄齢)·두여회·위징 등 유능한 재상들과 더불어 안으로는 조용조(租庸調) 제도를 마련하고 과거제를 정비하여 당나라가 번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세민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주고 조용조 제도를 도입하였다. 조용조는 토지를 받은 사람은 국가에 곡물을 바치고 1년 중 20일은 국가를 위해서 일을 해야 하며 가구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이다. 조용조를 도입하면서 당나라는 풍족해지고 민생은 안정되었다. 또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였고, 군사 제도는 부병제인 징병제를 택하였다. 당나라는 나날이 번창해져 갔으며 백성들은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현무문의 변에서 목숨을 걸었던 창업동지들끼리 손잡고 위세부리며 계속 군림하는 것에 대해 태종은 매우 경계하였다. 그래서 줄곧 새로운 인재의 발굴을 강조했다. 단순한 새로운 인재가 아니라 최고의 실력 있는 인재의 발굴과 천거를 태종은 수없이 강조하였다.
 
정관의 치가 이룬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이었는가? ‘상인이나 여행객이 벽지에서 투숙하더라도 강도를 만나지 않았고, 천하가 다스려졌기 때문에 감옥은 언제나 텅텅 비었다. 말과 소는 도적맞을 일이 없으므로 산과 들에서 방목하고, 외출할 때는 몇 개월씩이나 집의 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다. 해마다 계속된 풍작으로 쌀값 또한 모두 쌌다. 여행자를 위한 길이 잘 정비된 데다가 가는 곳마다 식량이 공급되므로 여행객은 무겁게 커다란 짐을 지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산동지방의 촌락에서는 여행자를 후하게 대접할 뿐 아니라 심지어 선물까지 주는 경우도 있었다.’(‘정관정요(貞觀政要)’ 2권 제14)
 
쓴 소리의 황제’ 위징을 중용한 참 리더십
 
태종 주위에는 면전에서 감히 황제의 뜻을 거스르는 발언을 하는 소위 범안감간(犯顔敢諫)하는 신하가 많았다. 그 중의 으뜸이 위징이었다. 위징은 당나라의 정치가다. 위징은 태종의 형 이건성의 측근으로 이건성에게 이세민을 죽이라고 건의했던 인물이다. 현무문의 변에서 승리한 이세민은 위징을 심문했다. 위징은 자신은 이건성의 신하였으므로 당연히 계책을 내놓아야 했기 때문에, 이건성에게 이세민을 제거하라고 충언을 했는데 듣지 않아 살해당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이세민은 위징의 정직함과 담력·식견을 알아보고 간의대부(諫議大夫) 벼슬을 주고 곁에 두었다.
 
당 태종이 정관의 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황제의 비위를 거스르면서 목숨을 걸고 직언을 서슴지 않은 위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위징은 수나라가 망하게 된 원인은 세금 부담이 크고 부역이 너무 많아 민생이 피폐해진 데 있다고 보고 조세와 부역을 가볍게 하고 민생을 돌볼 것을 건의했다. 이것이 정관의 치의 기초가 되었다. 위징은 진나라와 같이 가혹한 형벌을 반대하고, 법을 집행할 때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정확하고 관대하게 처리할 것을 주장했다.
 
위징은 태종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독하면서 간언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태종이 남산으로 사냥을 나가려고 수레와 말을 준비했다가 취소한 일이 있었다. 위징이 이유를 묻자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원래 사냥을 나가고 싶었는데, 그대에게 야단맞을 일이 두려워 포기했소.”
 
태종이 화가 나서 신하를 주살했을 때 위징은 이를 비판했고, 태종이 아끼던 신하가 뇌물을 받은 것이 드러났는데도 옛정을 생각해서 죄를 용서하려고 하자 위징은 바로 직언했다. 위징은 상을 내릴 때는 관계가 소원한 사람도 잊지 말아야 하고, 벌을 내릴 때는 측근과 귀족들에 대한 정리(情理)를 염두에 두지 말아야 한다. 모든 상벌은 공정과 인정을 원칙으로 해야 사람들을 설복할 수 있다고 간언하였다. 태종은 굽힐 줄 모르는 직언으로 자신을 괴롭혔던 위징을 믿고 끝까지 등용하였다.
 
위징은 이세민의 평소의 행실까지 지적하면서 300회 이상의 간언을 올렸다고 한다. 이세민은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 위징을 두고 그의 충언이 자신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라고 오해를 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조회 후 화가나 이세민이 장손황후(長孫皇后)에게 그 시골촌놈이 조회에서 또 나에게 대들었다. 이 시골뜨기를 죽이지 않으면 내 마음 속의 원한을 풀 수 없을 것 같다고 하며 위징을 죽이려 했다. 이에 평소 훌륭하게 참모 역할을 하고 있던 황후는 평복(平服)을 조복(朝服)으로 갈아입은 후 이세민에게 축하한다고 하였다. 이세민이 왜 이러냐고 물었을 때 황후는 사서에 보면 임금이 성군일 때 신하들이 충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폐하가 성군이시니 위징과 같은 인물이 직언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천하에서 이른 성군을 얻었으니, 폐하의 가까운 사람으로서 제가 어찌 축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황제 이세민의 입장을 올려줌으로써 위징의 목숨을 살려낸 장손황후의 기지와 영특함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실제로 장손황후는 의견을 제시할 줄 알았을 뿐 아니라, 의견을 잘 제시하는 고급 참모였다고 한다. 훌륭한 신하에 더하여 영민한 황후까지 곁에 있었으니 황제 이세민은 인재 복을 타고났었던 것 같다.
 
리더십의 진수(眞髓) ‘정관정요(貞觀政要)’
 
정관정요(貞觀政要)’는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정치철학을 기본으로, 군주의 도리와 인재 등용 등의 지침을 적어 놓은 치세 관련 명저다. 감히 말하건데 리더십의 진수를 전하는 책이다. 여기서 정관은 태종의 연호이고, 정요는 정치의 요체라는 뜻이다. 당 태종이 신료들과 정치에 대해서 주고받은 대화를 엮은 책으로서 예로부터 제왕학의 교과서로 여겨져 왔다. ‘정관정요는 태종이 사망한 지 4050년이 지난 후 현종 때의 학자이자 사관 오긍(吳兢)이 집필하여 4대 황제 중종에게 바쳤다. ‘정관정요는 모두 104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관정요는 군주의 도리·인재 등용·간언의 중요성·도덕·학술과 문화·형벌과 부역·조세 등 당나라 초기의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정관정요는 당나라 태종과 그를 보좌한 방현령·두여회·위징·왕규 등 45명의 충신들과 문답을 통해 정관의 치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가져온 치세의 요체를 다루고 있다. 태종이 후세에도 높이 평가되는 것은 지도력이 뛰어나고 현명한 군주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유능한 신하들을 믿고 신하들의 직언을 기꺼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정관정요는 당 태종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비난도 있지만, 오래전부터 국가를 이끌어가는 통치자들에게 올바른 정치관을 제시했기에 널리 읽혀 왔다. ‘정관정요는 당나라에서는 현종·문종·선종 등이 애독하였으며, 송나라의 인종·요나라의 흥종·금나라의 세종·원나라의 쿠빌라이 칸·명나라의 만력제·청나라의 건륭제 등의 군주들이 애독하였다고 한다. 정관정요는 일본에 헤이안 시대에 전해져서 호조(北條氏아시카가(足利氏도쿠가와(德川) 등 막부의 지도자들이 애독하는 필독서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와 조선에서는 과거 시험의 필수 학습 도서였다고 한다
 
19601980년대에 일본 최고경영자(CEO)들의 필독서가 정관정요였다고 알려졌는데 지금도 그러할 것이다. 일본 재계의 신()으로 불렸던 일본 일본경제단체연합회(經團聯·게이단렌)의 도코 도시오(土光敏夫) 회장도 정관정요를 애독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CEO들이 가장 존경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일본 교세라의 회장 이나모리 가즈오가(稻盛和夫)가 쓴 많은 책에서도 정관정요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제왕학과 참모학의 성전(聖典)이라 불리는 정관정요’ 10권의 내용을 살펴보면, 1권은 군주가 갖추어야 할 도리와 정치의 근본에 대해 논의하며, 2권은 어진 관리의 임명과 간언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3권은 군주와 신하가 지켜야 할 계율과 관리 선발 그리고 봉건제에 관한 것을 다루며, 4권은 태자와 여러 왕들을 경계시키는 내용을 서술하며, 5권은 유가의 인신 그리고 공평함에 대해 문답하고, 6권은 절약과 사치·겸양 등을 다루고, 7권은 유학·문학·역사 등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8권은 백성들의 생활과 관련된 농업·형법·부역·세금 등에 관해 논하며, 9권은 국외적인 문제인 정벌과 변방 안정책을 논하며, 10권은 군주의 순행이나 사냥 등에 있어서 신중해야 됨을 강조한다.
 
정관정요1군주의 도리에 나라를 다스리는 10가지 방법을 십사(十思)가 정리되어 있는데 군주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 앞에서 만족하여 자신을 경계해야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킬 때는 가능한 일만 하고, 그칠 때를 알아서 백성들이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높고 위태로운 일을 생각할 때는 겸손과 온화함으로 자신을 경계해야 자만으로 가득 차는 것을 두려워할 때는 거대한 강과 바다가 사방의 물줄기를 모두 받아들이는 것을 생각하며 유희와 사냥의 기쁨에 도취되었을 때는 선대 제왕과 제후들이 그것을 일 년에 세 차례만 했던 것을 생각하고 나태해지는 것을 두려워할 때는 시종 신중하게 일을 처리할 것을 생각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 간의 신뢰가 단절되는 것을 걱정할 때는 마음을 비우고 아랫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을 생각하며 참언과 간사한 무리를 염려할 때는 자신의 언행을 단정히 하여 간사함을 제거하려고 생각하고 상을 시행할 때는 일시적인 기쁨으로 아름다운 것을 장려하는 근거를 잃지 않도록 생각하고 처벌할 때는 일시적인 노여움으로 징벌을 남용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등이다.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국정관리에 관한 실로 대단한 완벽한 지침이다.
 
정관정요에 태종이 묻고 명신들이 답하는 주요한 장면이 수없이 많이 나오지만 창업과 수성과 관련하여 어느 쪽이 더 어려운가?” 하고 하문하였을 때 방현령과 위징은 각기 다른 대답을 한다. 방현령은 창업이 더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고 하고 위징은 새 왕조를 세우는 것은 하늘의 뜻이고 백성의 염원입니다. 그러므로 창업은 그리 어렵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두 신하의 답을 듣고 태종은 방현령은 짐과 함께 난세를 평정했고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경험 때문에 창업이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위징은 평화의 지속과 정권의 유지를 염려하고 있다. 수성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유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즉 답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현무문의 변까지 겪으며 나라를 세웠으니 목숨을 걸었던 창업이 더 힘들었을 터이지만 나라가 건국이 된 대화의 시점에서 나라를 끌고 가는 일, 즉 수성이 힘이 매우 힘들 터이니 함께 애써 잘해보자는 것이 전체를 아우르고 종합하는 태종의 의도와 판단이 묻어나는 결론이다. 태종과 두 참모 간의 창업과 수성에 관한 대화는 국가 경영에는 물론 기업 경영에도 그대로 적용되기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정관정요에 의하면 태종은 현명하고 능력 있는 신하를 선발하여 어질고 유능한 군주가 되려고 노력했을 뿐 아니라 신하들의 충고나 간언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 자신의 잘못된 행실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다. 백성의 부역과 세금을 낮추어 백성이 부유하게 살도록 하였다. 또한 문화를 중시하여 풍속을 좋게 바꾸고 농업을 근본으로 삼아 백성들이 농사철을 놓치지 않도록 했으며 군주와 신하가 서로 거울이 되어 시종여일 바른 정치를 하려고 했고, 태종 자신도 근면했고 검소했다.
 
 
▲ 당 태종 영정.
 
 
정관정요에 의하면 태종은 거울이 없으면 자신의 생김새를 볼 수 없듯이 신하들의 간언이 없으면 정치적 득실에 관해 정확히 알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세상과 민심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진 신하의 충언은 군주를 바로 서게할 뿐 아니라 천하를 태평성대로 만들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신하들이 충언이나 간언을 하지 않고 침묵하는 이유는 충성스런 간언을 할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태종은 진언하는 신하들이 위축되지 않도록 반드시 온화한 얼굴로 의견을 들었고, 신하들의 자리를 가까운 곳에 두고 교대로 궁중에 숙직시키며 진언을 들으려고 하였다. 태종은 계속되는 신하들의 진언과 충고를 매우 기뻐하고 칭찬하며즉시 수정하는 등 여느 군주들에게서는 도저히 찾아보기 어려운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통치한 태종은 재위 24(627649) 동안 정치·경제·문화·예술·군사 등 다방면에 위대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당나라는 황금시대를 맞았다. 후대 역사가들은 그의 치세를 정관의 치라고 칭송하였다.
 
인재등용과 관련하여 정관정요에서의 논의는 오늘날 경영학이나 행정학에서의 논의보다 더 핵심적인 과제를 더 명료하게 다루고 있다. 공직 사회에서 소위 좋은 게 좋다는 식풍토에 대해 태종은 관료 한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조심하면 백성과 나라가 큰 피해를 본다. 이는 나라를 무너뜨리는 정치일 뿐이다라고 적당한 인간관계로 안주하는 것을 강력히 경고한다. 자리를 채우기 위한 인사를 하지 말고 능력이 있는 인재를 찾아 배치하라고 지시한다. “매우 뛰어난 인재를 얻었다면 그에게 두 세 개의 관직을 동시에 맡기면 된다. 인재가 없다하여 무능한 사람을 채용하면 자리는 채워지나 일은 조금도 진척되지 않는다는 촌철살인의 지적이다
 
태종은 중요한 자리에는 진정으로 뛰어난 자만 등용하시오” “어느 시대나 인재가 없는 게 아니오. 짐은 실제로 뛰어난 인재가 있는데도 이쪽에서 그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되오라고 말하며 나라가 평화로워지느냐, 혼란스러워지느냐는 대부분 그 지방 장관의 수완에 달려 있다. 그러니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지방에는 뛰어난 자를 배치해야 한다는 언급에 이르면 오늘날 전 세계 어느 지도자 그리고 인사 전문가도 상상하지 못한 발상이다.
 
인재를 등용할 때는 그 사람의 본모습을 꿰뚫어봐야 하는데 이와 관련하여서 정관 14년 위징은 유명한 육관(六觀)’ 관해 이야기한다. 여섯 가지 핵심 포인트는 일정한 지위에 있는 자라면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을 발탁하는지를 보라 유복한 자라면 그 사람이 타인에게 무엇을 대접하는지, 재산의 사용법을 보라 자택에서 편히 쉴 때 그 사람이 즐겨 하는 일을 보라 모두 함께 무언가를 배울 때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지를 보라 아무리 생활이 궁핍하더라도 그 사람이 이것만은 받을 수 없다고 거부하는 것을 보라 출세에서 멀어진 자라면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주관이 확실한지를 보라 등인데 공무원의 채용이 정치적 배려에서 이뤄지는 오늘의 현실에서 크게 자괴감이 든다.
 
태종은 부정부패를 저지른 자는 사형에 처했다. 형을 집행할 때는 모든 관리들을 수도 장안(長安)으로 불러 형 집행을 지켜보도록 했다. 탐관오리만큼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렴하고 근신하는 관리사회 풍토가 조성되었다.
 
중국 고전 사상의 특징 중 하나는 전반적으로 인간 욕망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사적인 욕망은 작게, 공적인 욕망은 크게하는 식으로 욕망을 조절하는 것을 중시한다. 태종도 사적인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했는바 군주가 되는 도리는 반드시 먼저 백성을 보존하는 것인데, 만약 백성을 손상하여 자기 몸을 받들도록 한다면 넓적다리를 베어서 배를 채우는 것과 같으니, 배는 부르되 몸은 죽게 된다고 말하며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몸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태종은 즉위 후 얼마 안 가 궁녀 3000여 명에게 자유를 주었다. 궁궐에 많은 여인을 살게 하는 일을 백성의 재산을 사용하는 행위’ 요즘 말로 하면 혈세를 낭비하는 것이라 본 것이다.
 
정관정요의 끝맺음 신중한 끝맺음은 창업 초기의 마음 자세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점을 강조하며 18가지 경고를 날린다. “현재의 안정 속에서도 혼란스런 미래를 대비하라” “군주 자신의 욕망만 채우면 대업을 완수하기가 어렵다” “군주가 끝까지 신중해야 한다” “처음과 끝이 같아야 영원할 수 있다” “탐욕의 싹을 제거하라” “겸허함과 겸손함을 잊지 말라” “자신을 억제하는 것이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 하라”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경시하라” “개인적인 감정에 따라 인물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빈번한 사냥은 재앙을 부른다” “군주와 신하 간에는 예절과 충성이 있어야 한다” “겸손만이 교만과 욕망에서 구해 줄 수 있다” “군주의 정성 앞에서는 재앙도 무색해진다” “부지런히 실천하라” “이익이 된다면 아랫사람에게서도 취하라” “승리하기는 쉽지만 그것을 지키기는 어렵다” “항상 자신을 추스르며 끝까지 미덕을 지켜야한다등 실로 18가지 엄중한 경고들을 총망라해 날리고 있다.
 
당 태종이 죽은 지 50여 년이 지난 후 정관정요를 작성한 당의 역사가 오긍은 국가의 운명을 주재하는 최고 통치자의 생각이나 행동이 올바르지 못하면 백성은 물론 국가의 사직에 막대한 재앙을 초래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오긍은 태종의 동으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하게 할 수 있고, 고대 역사를 거울삼으면 천하의 흥망과 왕조가 교체된 원인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기의 득실을 분명하게 할 수 있다고 한 말을 가슴에 새기고 정관지치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관으로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방법은 당나라를 번창시키는데 필요했던 정치철학을 알려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집필하여 당의 4대 황제 중종에게 바쳤던 것이다.
 
두 가지 실수를 하다
 
태종 이세민은 당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고 정관의 치가 계속되었지만, 통치 후기로 갈수록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았고 태종도 초심을 잃은 듯 사치를 일삼고 국정 운영도 방만해 졌다. 신하들의 충언을 잘 받아들이지 않기도 하였고, 간신배들의 꼬임에 빠지기도 했다. 생의 끝자락에서 두 가지 결정적 실수를 저지른다. 하나는 방헌령의 간언을 무시하고 고구려를 침략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간신배들의 꼬임에 빠져 후계자를 제대로 선정하지 못한 것이다.
 
당나라 장안에서 고구려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고, 고구려가 수성 전술에 강한 나라라는 점을 들며 병들고 노쇠한 명참모 방현령이 강력히 고구려 원정이 불가함을 호소했지만, 호걸형 무인형 황제였던 태종은 수년간 치밀하게 준비한 후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왕을 죽이고 군권을 장악했다는 것을 명분 삼아 645년에 고구려 출병에 나섰다. 500척과 수병 5만 명, 25만 명의 육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향했다. 각종 회유책에도 고구려는 결사적으로 항거했다. 안시성 전투가 유명한데 안시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우리 역사서에는 남아 있지 않고 중국의 기록에만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라 한다. 극적인 스토리텔링은 고구려 원정에서 당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서에는 퇴각하는 길에 종기가 걸렸다고만 나온다. 당 태종은 2(647)·3(648)에 걸쳐 다시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군사를 철수하면서 안시성 성주 양만춘에게 비단 300필을 전했다고 한다. 고구려 원정의 여파로 병에 걸린 당 태종은 6495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차 원정 20년 뒤인 668년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결국 고구려는 멸망한다.
 
태종이 후계자 선정을 제대로 하지 못해 자신의 후궁이었던 무조(武曌)에 의해 당나라의 국호가 일시적으로 사리지는 변고까지 초래되었다. 이세민은 넷째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고 했으나, 원로대신들이 넷째의 비리를 거론하며 아홉째를 천거하자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처남 장손무기를 포함한 원로대신들이 넷째보다 역량이 많이 떨어졌던 아홉째를 밀었던 이유는 어린 황제 뒤에서 국정을 농단하려는 속셈 때문이었다. 태종의 뒤를 이어받은 아홉째 아들 고종(당나라 3대 황제)은 정관의 치를 유지했으나 병약한데다가 통치력이 부족해 아버지 태종의 후궁이었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전횡을 휘두를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측천무후는 황태자를 마음대로 올리고 내린 황태후로 결국 당나라 국호를 자신의 성씨를 따라 무주(武周)로 바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가 되었다. 당나라는 측천무후가 무주의 황제가 된 이후 15년 간(690~705) 국호를 잃게 된다. 측천무후는 권력을 위해 여러 자식을 죽이는 악행을 저질렀으나 나라는 잘 꾸려갔다.
 
3대 황제 고종과 황위를 다퉜던 이현(李顯)이 측천무후 이후 중종으로 다시 등장하여 나라의 기초를 다지는 필요성을 느껴 태종의 정관의 치를 되살리고자 마음은 먹었으나 역부족이었다. 6대 황제 현종이 개원의 치(開元之治)를 펼침으로서 당은 다시 융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종이 말년에 양귀비에 빠져 세상은 다시 혼란에 빠진다.
 
唐태종 이세민의 말 말 말
“중요한 자리에는 진정으로 뛰어난 자만 등용하시오”
 
천하는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며만인의 것이다.”
 
홍수와 가뭄이 고르지 못한 것은다 임금이 덕을 잃었기 때문이다짐이 덕을 쌓지 않아 하늘이 마땅히 짐을 나무라는 것인데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 그 숱한 어려움과 궁핍을 겪어야 하는가!”
 
짐은 매일 밤백성이 행복하게 사는지 심려되어 한밤중이 되어도 잠을 이룰 수 없다.”
 
짐이 매번 몸을 손상한 것은밖의 사물에 있지 않고 모두 기호와 욕심으로 말미암아 화를 부른 것이다.”
 
천자의 마음은 하나뿐인데여러 신하들은 혹은 무용(武勇)으로 혹은 웅변술로혹은 아첨으로혹은 사기술로 공격해온다천자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늦추어 그중 하나를 받아들이면 당장 나라는 망국의 길로 들어간다천자의 어려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짐은 천하를 평정했지만 이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
 
국가를 다스리는 기본은 인의와 위신이오백성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 궁핍한 상황에서 구해내는 한편 ‘이치에서 벗어나는 일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엄연한 태도로 정치를 한다면 나라는 자연스레 안정될 것이오그러니 모두 짐과 함께 이를 실천해야 하오!”
 
황제가 내린 조서 가운데 부당하여 실행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자기 의견을 견지하도록 하고잘못되었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있어 침묵을 지키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나라를 다스리는 것과 질병을 치료하는 것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소환자의 상태가 좋아졌다고 생각되면 잘 보살펴야 하오만일 다시 발병하여 악화되면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오나라를 다스리는 것 또한 그러하니 천하가 조금 안정되면 더욱 조심하고 삼가야지 평화롭다고 하여 교만하게 굴거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면 틀림없이 멸망하게 되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부단히 학문에 힘써야 하오젊었을 때는 군대를 따라 전쟁을 하느라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고정관 이래로는 손에 책을 놓지 않고 독서를 하여 교육 감화의 근본적인 방법을 알았으며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발견하게 되었소인생과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모조리 책 속에 들어 있으니 더욱더 학문에 정진해야 하겠다고 반성하는 참이오.”
 
관료라면 자기 일을 나중으로 미루고 공()을 위해 힘쓰시오올바른 도를 지키고 서슴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서로 의논하시오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부화뇌동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되오.”
 
은혜롭게도 나는 천자 자리에 있소단지 백성의 이익만 바랄 뿐이오수백만 관에 달하는 은을 채굴하여 막대한 수입을 얻는다 해도 덕망 있는 인재 한 사람을 얻는 일과 비교할 수 없소.”
 
중요한 자리에는 진정으로 뛰어난 자만 등용하시오.”
 
어느 시대나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오실제로 뛰어난 인재가 있는데도 이쪽에서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아닌지 짐은 심히 우려하오.”
 
나라가 평화로워지느냐 혼란스러워지느냐는 대부분 그 지방 장관의 수완에 달려 있다그러니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지방에는 뛰어난 자를 배치해야 한다.”
 
천하의 일에는 선()과 악()이 있는데 선인(善人)을 등용하면 국가가 안정되고 악인(惡人)을 등용하면 국가가 위태롭게 된다이후에 인재를 등용하면서 감정이나 애증에 의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내 잘못을 보거든 위징처럼 기탄없이 간쟁(諫爭)을 해야 한다.”
 
군주가 넘어지려는 데도 손을 내밀지 않고쓰러졌는데도 일으켜 세우려 하지 않는다면 이런 신하가 과연 필요한가?”
 
세찬 바람이 불어야 강한 풀을 알 수 있고판이 흔들려야 충신을 알아챌 수 있다.”
군신 간에 서로 의심하여 흉중의 생각을 다 털어놓지 않는다면 그 길로 나라에 큰 해가 될 것이다.”
 
군주는 국가를 근간으로 하고 국가는 백성을 기본으로 한다백성을 핍박해 군주를 받들게 하고 그들의 살을 잘라 배를 채우면 배는 부르겠지만 몸은 죽어지고군주는 부자가 되지만 나라는 망하고 만다세금이 무거워지면 백성은 근심하며 백성이 근심하면 나라는 위기에 처한다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군주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죽음 무릅쓰고 간언한 위징
감히ㆍ능히ㆍ훌륭하게 300번이나 지적질한 핵심 참모
 
▲ 위징 영정
 당 태종은 현무문의 변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위징이 끌려와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은 태도를 보고 그를 높이 평가하여 간의대부로 등용하였다. 하지만 위징은 태종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잘못된 점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위징의 지적은 태종의 공적인 업무에서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태종은 위징의 간언을 듣고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곧바로 반성하였다.
 
당시에는 황제의 말이 곧 법인 시절이라 황제의 비위에 거슬리는 간언을 잘못했다가는 목숨이 남아나지 못하는 세상에서 무려 300번이나 지적질을 해댄 위징은 대단한 참모였다. 위징은 목숨을 내놓고 태종을 올바른 길로 안내한 것이다. 하지만 위징이 태종에게 지나치게 사사건건 지적질을 하자 위징을 보면 울렁증이 생겨 피해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태종은 위징이 집요하고도 신랄하게 비판하자, 위징을 죽이려고 하다가도 그의 간언에 귀기울였다. 태종은 불편하고 듣기 싫은 조언도 기꺼이 수용하는 넓은 아량을 보여주었다. 위징의 간언에 심기가 불편하였지만 자신을 잘못된 길로 가지 않게 이끌어 주는 소중한 충고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종이 궁궐을 증축하고 화려한 전각을 짓고 싶어 했으나 위징의 간언으로 중단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태종은 어느 날 사냥을 가기 위해 수레와 말을 준비시켰다가 위징이 반대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취소시킬 정도였다.
 
태종의 위징에 대한 신임 또한 절대적이었다. 위징이 비서감 직을 맡고 있을 때 누군가가 이세민에게 그를 모반죄로 고발했다. 위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태종은 위징의 모반죄를 조사하지 않고 고발자를 꾸짖으며 사형에 처했다.
 
위징이 수없이 간언하여 태종으로 하여금 태평성세를 이룰 수 있게 하였기에 살아서도 죽어서도 충신으로 평가된다. 역사가들은 위징이 감히·능히·훌륭하게 간언했다고 평가한다. 주군을 6번이나 옮긴 끝에 태종을 만난 위징은 태종의 최측근이거나 가신은 아니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태종의 참된 충신이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태종의 잘못과 게으름과 나태를 꾸짖었다. 위징은 재상이라는 안락만을 추구하지 않았다. 위징은 태종이라는 위대한 군주를 만나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었다. 위징은 태종이 올바른 통치를 할 수 있게 자신의 능력과 열정을 다했다.
 
위징은 군주가 올바로 통치할 수 없게 하여 악인으로 만들고 나라를 멸망하게 하는 맹목적의 충신(忠臣)보다는 나라가 부유해져서 태평성대를 누리고 편안한 삶을 누리고 죽어서도 명성을 얻으며 후손들이 번창할 수 있는 양신(良臣)을 원했다.
 
태종에게 수없이 간언하면서 충심으로 보좌했던 위징이 63세이던 643년에 사망하자 태종의 슬픔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태종은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위징을 그리워하며, 묘비를 세우고 묘비의 조문도 직접 썼다. 조문은 동으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하게할 수 있고, 고대 역사를 거울 삼으면 천하의 흥망과 왕조 교체의 원인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기의 득실을 분명하게 할 수 있다. 나는 일찍이 이 세 종류의 거울을 구비하여 자신이 어떤 허물을 범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지금 위징이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거울 하나를 잃은 것이다!”로 되어 있는 바 스스로 잘못을 막을 거울 세 개 중 하나인 위징이 죽으니 거울 하나가 없는 셈이라고 통탄하였다
 
중국은 시의 나라이다. 중국의 오랜 시사(詩史)에서 가장 높은 성취를 이뤘다고 평가 받는 것이 당대(唐代)에 창작된 당시(唐詩). ‘당시선(唐詩選)’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시가 술회(述懷)’인데 이는 태종의 명령으로 전쟁터에 나간 위징이 지은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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