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가쁘다. 대통령의 계엄선포·국회의 탄핵 소추·헌법 재판·대규모 탄핵 반대 집회·시시각각 움직이는 인접국가들…. 문학인들·국문학자들 사이에서 “해방 공간 같다”는 말이 심심찮게 오간다.
그러고 보면 올해는 해방 80주년이다. 우리는 이 10년 주기의 뜻깊은 해에 과연 우리에게 해방은 어떤 의미를 가졌던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문학사에서는 8·15 해방과 관련하여 가장 문제적인 인물로 프롤레타리아 시인이자 신문학사를 쓴 임화(林和·1908∼1953)를 손꼽는다. 그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KAPF)의 서기장으로 경기도 경찰국에 해산서를 손수 제출하기도 했다. 이 임화는 일제 말기에 ‘전향’했던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임화는 실상, 전향하지 않았다. 일제 말기에 임화는 왕년의 동지 백철에게 “이런 시대에는 보호색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제에 협력하는 포즈를 취하면서도 실제적 협력은 최소화한 가운데 해방의 빛살을 맞이하고자 했다.
자기 외부의 압력에 의해, 잡히고 두들겨 맞아서 하는 전향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내부적 성숙에 따른 사유체계의 변화에서 오는 전향은 사상가·실천가를 위해서는 오히려 더없이 긴요하다. 전향 없이는 새로운 생각을 가질 수도 없고, 변화하는 현실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몸이 어린아이에서 어른으로, 노인으로 변모해 가는 것과도 같다.
임화의 시대에 전향이란 사회주의자가 사회주의 사상을 버리는 것을, 여기서 더 나아가 천황제 파시즘에 귀의하는 것까지를 가리켰다. 카프 해산이라는 외부의 탄압은 한편으로는 전체주의 마르크시즘의 의미와 한계를 깊게 따져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임화는 실제로 사상적 기초를 새롭게 닦아 보고자 하는 시도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괴테의 ‘파우스트’ 같은 고전들을 읽었고 ‘민족’에 대해 새로운 사고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으로는 변화하지 않았으며 내연하는 마르크시스트로서의 신념을 품고 일제의 노예가 된 조선인들의 현실을 고통스러워하며 일제 말기를 보냈다.
이렇게 내부적으로는 ‘비전향자’였던 임화는 해방 직후 박헌영 중심의 조선공산당이 재건된 1945년 9월12일을 기념하는 시를 쓴다. 이 시 ‘9월 12일’의 마지막 연에서 임화는 “원컨대 용기이어라”라는 말로 자신을 채찍질하는 소망을 피력했다. 어째서 그는 ‘조선공산당(조공)’ 재건의 날을 제목으로 표나게 내세우는 시를 쓴 것일까. 그날 그 자신이 ‘조공’의 당원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가파른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1947년 11월 마침내 월북을 감행한다. 서울 종로6가에서 출생한 그에게 월북은 ‘낯선 곳’을 향한 여정이었다.
북으로 간 임화, 그는 그러나 자신이 뜻했을 법한 이상 속의 실천적 삶을 살아갈 수 없었다. 서울에 있을 때 임화는 박헌영을 위한 헌시를 썼고, 이 남로당계의 낙인이 찍힌 몸으로는 북로당이 지배하는 체제에서는 변두리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6·25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임화는 해주에 거점을 두고 남로당의 남한에서의 투쟁을 지휘·고무하는 활동을 한다. 일종의 선전 선동이었고, 이를 위한 시를 쓰기도 했다. 6·25 전쟁 중에는 인민군 점령하의 서울에 나타났고, 옛 문학인 친지들을 만났으며, 낙동강 전선에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임화의 말로는 처참했다. 6·25 전쟁 막바지에 남로당 계열의 박헌영·이승엽·이강국 등이 미제국주의(미제)의 스파이로 처형당하는 과정에 임화도 일제 때부터 당국과 타협하고 해방 후에는 미제의 끄나풀이 되었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1953년 8월6일 불과 44세의 나이로 처형당하고 만다.
이 비극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임화는 해방 후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나뉘고 좌익과 우익이 극한 대립하는 정국 속에서 북한을 이념의 조국으로 의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믿은 마르크시즘은 전체주의 그 자체였고, 북한 체제는 스탈린 치하의 소련과 마찬가지로 어제의 ‘동지’들을 오늘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처형해 버리는 살육장이었다.
문학 쪽에서 오늘 벌어지는 숨가쁜 일들이 해방 정국을 연상하게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임화의 비극에서 마땅히 배워야 할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를 1987년 ‘6월 혁명’의 주인공이라 믿는 이들이 오늘 대통령의 탄핵 인용이 민주주의를 위한 길이라 믿는다면, 그 민주주의는 ‘6월 혁명’으로 획득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해방 정국 속에서 임화가 ‘귀의’하고자 했던, 전체주의적 마르크시즘의 민주주의 바로 그것이다.
임화의 비극을 문학하는 이들은 늘 ‘아름답게’ 여기지만 이 비극미 속에는 전체주의 마르크시즘의 ‘민주주의’를 진짜 민주주의로 착각했던 의식의 지체와 전도가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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