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12월3일 계엄으로 시작된 4개월 간의 체제 전쟁이 대통령 파면으로 일단락되었다. 비록 헌법재판소 판결로 일차 전투는 종료되었지만, 분위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것 같다. 탄핵을 주도한 더불어민주당과 좌파 진영은 환호하지만, 탄핵을 반대했던 시민들은 지난 주말에도 비가 내리는 광화문 광장에서 역전의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어쩌면 잠시 휴전 상태라고 볼 수도 있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승복해 국민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은 그냥 말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폭력 사태나 충돌은 없었지만 탄핵을 둘러싼 두 진영 간의 갈등의 골은 내면화되어 더 깊어진 듯하다. 비록 완전히 기울어진 선거판이지만 두 달 뒤에 있을 차기 대선은 양측 모두 사활을 건 총력전이 될 것이다. 특히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보수 진영은 배수진을 치고 백병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다.
대중 정치를 비판했던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는 (원래) 시끄러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정치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간의 합의나 동의를 만들어 내는 절차로, 절대 조용할 수도 없고 조용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다운 행동이며 그것은 곧 인간의 복수성(plurality)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논리에서 보면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한의 충돌은 지극히 당연한 정치적 갈등이라 할 수도 있다. 또한 정치를 ‘말의 잔치’라고 한다면 지난 몇 달간 이어졌던 대규모 탄핵 관련 집회들은 민주주의 정치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많은 언론이 공정성·객관성 같은 전통적 규범을 벗어나 편향된 목소리를 낸 것 역시 무조건 비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한국 정치 상황은 민주주의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정치 영역에서 절대 진리란 존재할 수 없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고 한 아리스토텔레스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지금의 우리처럼 자신들의 생각만이 절대 진리라고 믿게 되면 대화나 설득 같은 정치적 행위들이 설 자리가 없게 된다. 절대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합의를 도출하는 정치는 실종되고 도그마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지금의 정치적 충돌은 정상적인 하나의 정치 현상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정치권은 물론이고 언론, 그리고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고 하는 사법부까지 자신들의 생각을 절대 진리로 믿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정치적 진리에 대한 반대를 거짓·불법 심지어 미친 소리로 매도하고 있다. 어쩌면 철저하게 한 쪽 주장들로 도배한 헌법재판소 탄핵 판결문이 그 절정을 보였다 할 수도 있다.
이미 갈라파고스가 되어 버린 정치권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정파성에 매몰된 기성 언론들의 굴절된 보도 행태는 정치를 더욱 실종시키는 주범이 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적 선택의 주체는 미디어 수용자인 국민 개개인이다. 언론은 정치적 진리를 결정하는 주체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을 보여주어 정치적 합의나 동의를 형성하는 매개체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국회나 사법부·헌법재판소 심지어 선거조차도 정치적 합의나 동의를 만들어 내는 민주적 절차로서의 정당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 기구들의 판단이나 결정이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항상 의혹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은 정치적 갈등이 극단적 충돌로 변질되는 것을 막는 완충제가 되어야 한다. 지난 300년간 언론이 권력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의 비폭력적 합의 절차, 즉 공론장 역할을 해 온 것처럼 말이다.
지금 한국 사회의 모든 권력기구는 자신들만이 정치적 진리를 전유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대통령의 계엄 선포·국회의 탄핵 의결·헌법재판소 판결을 통틀어 그 어떤 정치적 행위도 충분한 국민적 동의를 받지 못하고 있다. 두 달 후에 있을 대통령 선거 또한 국민의 신뢰를 상실한 왜곡된 한국 정치의 단면을 재차 확인시켜 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은 세상을 시끄럽게 할 수 있지만, 거짓 선동이 난무하는 싸움판을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시대착오적 패권주의에 매몰된 정치 영역과 그 정치에 예속된 사법 영역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생존에 매달리고 있는 언론을 상대로 그런 모습을 기대한다는 것이 덧없어 보인다. 하지만 언론에 실낱같은 기대를 걸어 볼 수밖에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니 서글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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