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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4월에서 5월로 가던 어느 봄날 수원문화재단 홈페이지를 통해 원도심 답사를 신청했다. 정확한 명칭은 ‘근대여행 골목길 해설 투어’로 수원문화재단에서 운영하고 있다.
두 개의 코스가 있는데 1코스는 구(舊) 경기도청 구관, 수원시민회관, 수원시립중앙도서관, 수원향교, 매산초등학교를 둘러보는 여정이다. 이 코스에선 근대 건축물의 구조적 특징과 일제강점기의 수탈에 맞선 저항 정신에 대한 해설을 들을 수 있다.
2코스는 인쇄골목, 구 수원문화원, 구 수원시청사, 수원 중화교회, 수원 구 부국원, 성공회 수원교회, 팔달사, 남문 로데오청소년문화공연장으로 구성되어 수원 향교에서 투어를 시작해 행궁 앞에서 마친다. 이 코스 역시 수원의 대표적인 근대 건축물과 특히 산루리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수원 근대를 걷는 ‘산루리 모-단길 투어’
필자는 인문역사문화공동체 ‘문화지평’ 회원들과 함께 오전 10시 회차를 사전 예약해 2코스를 둘러봤다. 수원문화재단은 이 지역 답사를 ‘산루리 모-단길 해설 투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산루리’와 ‘모던(Modern)’의 옛 발음을 결합한 명칭으로 수원의 근대화를 상징한다.
산루리(山樓里)는 팔달산 아래에 위치한 교동에서 매향동까지의 지역을 일컫는다. 조선 시대에는 수원화성 외곽 마을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수원역 개통과 함께 교통과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특히 일본인들 거주가 집중되면서 다양한 근대 건축물이 들어서는 등 수원의 전근대와 근대 역사가 중첩된 곳이다.
박천일 수원문화재단 문화관광해설사가 수원향교 앞에서 답사팀을 맞이했다. 수원향교는 원래 지금의 화성시 화산동 융건릉 부근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결론적으로 평하자면 깔끔하고 사려 깊은 해설로 잘 몰랐던 근대 수원의 면모를 답사팀에게 들려줬다. 평점으로 따지자면 10점 만점에 10점짜리 명 해설이었다. 문화유산과 공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이를 차분하게 전달하려는 배려를 한껏 체감한 명품 해설이었다. 지면을 빌어 다시금 감사드린다.
답사는 수원향교 앞 인쇄골목 표지판에서 시작됐다. 인쇄골목은 일제강점기 종묘상과 일본인 거주지, 일본인 학교가 있던 이곳에 수원시청이 건립되고 경기도청이 이전해 오면서 인쇄소들이 하나둘 생겨나 형성됐다. 경기도청 이전이 인쇄골목 형성의 가장 큰 방아쇠였다. 1980년대까지 호황을 누리던 이곳은 산업구조 개편과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를 겪으면서 많이 쇠락했지만 인쇄 장인들의 땀 냄새가 짙게 밴 곳이다.
구 수원문화원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중앙무진회사라는 금융지주사 건물로 지어졌다. 한국전쟁 때 수원시청사가 소실되자 임시 청사로 썼다. 1956년 시 청사를 새로 지은 후엔 별관으로 30년간 사용하다가 이후 수원문화원이 들어섰다. 지금은 시 가족여성회관 문화관으로 사용 중이다. 1층에는 일본군 위안부 용담 고 안정순 할머니를 추모하는 기억의 방이 꾸며져 있다.
문화관 옆 구 수원시청사는 권선구청사를 거쳐 현재 시 가족여성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공간에서는 역사적 사실 이외에 일제강점기 벽돌조 건축물과 해방 후 초기 모더니즘 콘크리트 건축물을 비교해서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구 부국원
중국인들을 위한 아담한 수원중화기독교회를 거쳐 도착한 구 부국원(富國院)은 요즘 말로 하면 종묘상이다. 종자·종묘·비료 등을 팔던 곳으로 1923년 신축해 사용했다. 부국원의 부국은 식민지 조선이 아닌 일제의 부국을 뜻한다. 따라서 이곳은 식민지 수탈기관 중 하나였다.
해방 후 1952년까지는 비어 있었는지 연혁이 없다.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된 탓인지 이곳을 거쳐 간 발길이 다채롭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는 수원법원과 검찰청사로 사용했다. 1950년대 말부터 1963년까지는 수원교육청, 1970년대까지는 공화당 경기도당사, 1980·90년대엔 박내과의원, 2000년대에는 인쇄소 한솔문화사 건물로 쓰였다.
부국원 지하엔 한때 인권 유린의 공간이 있었다고 한다. 검찰청이 있을 때는 지하에서 고문이 자행되면서 신음과 비명소리가 들렸다는 증언이 있다. 송헌문화사 최정호 대표에 따르면 “지하실 그 자리가 없어진 게 한솔문화사 인쇄소 사장이 인수를 하면서 지하실이 필요가 없으니까 그걸 메꿨는데 과거 검찰청이 있을 때 신음소리가 들리던 건물이었다”고 회고했다.
박내과의원 시대엔 지하에 엑스레이 촬영실이 있었다. 인쇄소가 들어서고 1층에서 기계가 돌아가면서 소음이 울리자 한솔문화사 대표가 이를 시멘트로 메워 버렸다. 이후 건축업자 손에 건물이 넘어가고 빌라를 짓겠다고 하자 수원시에서 부랴부랴 인수해 부국원을 복원한 것이다. 근대건축물과 역사의 현장이 사라질 뻔한 아찔한 순간을 간직한 건물이다.
성공회수원교회, 팔달사 등 각종 종파 종교시설이 일대에 모여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그만큼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는 방증이다. 답사 도착점인 남문 로데오청소년문화공연장에서는 산루리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으로 수원 3·1운동을 주도한 김세환, 김세환을 도와 3·1운동을 이끌고 수원 신간회와 각종 사회운동을 이끌었던 김노적, 구국민단 단장으로 활약한 박선태, 수원 곳곳에 격문을 붙여 독립의지를 고취시킨 김장성, 사회주의 활동으로 세 번이나 검거됐던 차계영, 총독 암살을 계획한 조득렬, 조선 독립을 꿈꾼 강성문·김길준·차준석과 1902년 미국으로 이민 가 미주 독립운동에 나선 이병억 등 수많은 산루리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는 울림이 묵직했다.
2대 대물림 완성한 통닭거리 명물
답사를 마치자마자 수원통닭거리의 명물 ‘매향통닭’으로 향했다. 행궁입구에서 걸어서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다. 매향통닭은 수원통닭거리의 기점이 된 점포다. 골목에는 용성통닭진미통닭·남문통닭·대봉통닭·중앙치킨타운 등 지금은 내로라하는 곳이 많이 생겼지만 1970년에 문을 열어 55년째 영업을 하고 있는 매향통닭이 원조다.
1대 창업주께서는 이날 매장에 계시지 않았다. 오래전에는 2대 최용철 사장과 함께 닭을 튀기다가 얼마 전에는 지켜만 보고 계시더니 이젠 자리를 비우기도 하시다니 대물림이 완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12명이 통닭 다섯 마리를 다 먹지 못해 한 마리 정도 포장했다. 오랜만에 방문했더니 떡볶이 메뉴가 생겼다. 반가운 변신이다.
잘 만들어진 알베르 카뮈 원작 연극
다음 일정이 있어서 혼자 통닭 튀기느라 눈코 뜰 새 없는 최용철 사장과 서둘러 단체사진을 한 장 찍고 경기아트센터로 향했다. 수원을 관통해 걸으면서 도시를 알아 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경기아트센터가 있는 곳엔 나혜석거리가 조성돼 있고 중국전통공원 ‘월하원’이 있어 색다른 풍경을 접할 수 있다.
경기아트센터에서는 의미있는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제목은 ‘오월의 햇살’. 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알베르 카뮈의 원작 ‘정의의 사람들’(1949)을 우리 현실에 맞게 각색한 작품이다. 정의의 사람들은 제정 러시아를 위한 혁명가들의 딜레마와 윤리적 고뇌를 다룬 작품이다. 정치적 폭력과 인간 존엄 사이의 갈등이 큰 줄기를 이루는 작품이다.
오월의 햇살은 이를 1980년 5월 광주를 연상시킬 수 있도록 각색했다. 정의란 무엇이고 폭력이 정의를 위한 수단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뇌를 연기자들이 잘 소화한 수작이다. 알베르 카뮈의 철학적 문제의식을 광주의 현실에 차용한 극이지만 절대로 상황을 강요하지 않는 절제된 연출력이 돋보인 작품이다. 마침 23일 오후 7시30분과 24일 오후 3시 경기도 부천시민회관 대공연장 무대에 오른다고 한다.
압도적 비주얼 송탄식 부대찌개
이날 하루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극장을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대기 손님이 있는 ‘이나경송탄부대찌개’를 점찍었다. 캐치테이블에 대기를 걸어 두고 월하원을 한 바퀴 돌고 있자니 차례가 됐다는 알림이 왔다.
이나경의 송탄부대찌개는 한마디로 압도적 비주얼과 침샘이 폭발하는 맛, 이나경 사장의 살가운 스몰 토크 등 시청각과 오감을 자극하는 식당이다. 특히 원가를 무시하는 듯한 재료 사용은 식객들의 배와 마음을 풍요롭고 풍성하게 한다.
송탄식 부대찌개의 전형인 햄 중심 재료 구성은 눈을 즐겁게 한다. 미군 기지가 위치한 지역 특성상 스팸·소시지·베이컨 등 미국식 가공육이 풍부하다. 또 이를 바글바글 끓이면 끓일수록 우러나는 사골 베이스 육수의 깊고 진한 맛. 경쾌한 매운맛에 감칠맛을 더하는 다진 생마늘 한 숟가락. 그리고 반쯤 건져 먹다가 투하하는 마무리 라면 사리.
속 깊은 전골냄비를 꽉 채우는 푸짐한 양은 “건물을 올리기는커녕 아직 세 들어 장사를 하고 있다”는 이 사장의 현실을 반영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먹기 전에 일단 반 정도를 포장하는 곳이 종종 보인다. 그만큼 질은 물론 양적으로도 만족도가 높디높은 곳이다. 그날 이후 일부러 찾아가고 싶은 곳 중 하나가 됐다. 수원에서 보낸 꽉 찬 하루에 대한 조금 늦은 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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