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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331년, 고구려에서는 미천왕이 세상을 뜨고 그의 아들인 사유(斯由)가 왕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제16대 임금인 고국원왕(故國原王)이다.
이 무렵 서방에서는 유총이 재위 8년 만에 죽고 혼란한 틈을 타서 족제인 유요가 정권을 잡았다.
유요는 장안을 수도로 정하고 국호를 한(漢)에서 조(趙)로 바꿨다. 이에 반발한 유총의 측근 석륵도 양국(襄國)에 근거지를 두고 스스로 조왕(趙王)이라 칭했다. 사람들은 둘을 구분하기 위해 전자를 전조(前趙), 후자를 후조(後趙)라 했다.
전조와 후조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인 끝에 석륵이 유요를 죽이고 화북의 패권을 차지했다. 갈족(羯族)인 석륵은 통치 체제를 공고히 하는 한편 한족을 끌어안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후조는 석륵의 뛰어난 지도력 아래 전대를 뛰어넘는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석륵이 죽고 나자 후조 역시 내분에 휩싸였다. 이처럼 서방의 정국이 혼란스러울 때 요서 지방에서는 선비족 모용황이 족인(族人)을 그러모아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연(燕)이라 했다.
서력 342년, 연왕 모용황은 중원을 도모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도성을 용성으로 옮겼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중원으로 출진할 기회를 엿보고 있을 때 건위 장군 모용한(慕容翰)이 연왕에게 품했다.
“중원을 도모하기에 앞서 배후에 있는 고구려를 쳐야 합니다. 뒤가 불안하면 대사를 그르칠 위험이 큽니다.”
“예전부터 고구려와 엮여서 잘된 일이 없었다. 공연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게 아니겠는가?”
연왕은 고구려와 싸우는 게 마땅치 않았다.
“폐하 말씀처럼 무턱대고 고구려와 싸우면 이기기 어렵습니다. 저들은 전장에서 물러서는 법이 없습니다.”
“좋은 계책이 있는가 보군. 말해 봐라.”
“고구려로 가는 길은 양 갈래가 있는데, 북쪽은 평활(平闊)하여 왕래가 편한 데 비해 남쪽은 좁고 험해 교통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측에서는 북쪽 길은 굳게 지키지만 남쪽 길은 소홀히 취급하고 있습니다. 일부 병사를 북쪽 길로 보내 고구려군의 눈을 속인 후 남쪽으로 정예병을 이끌고 나간다면 어렵지 않게 환도성을 수중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머리를 베면 몸도 자연히 죽는 것처럼 고구려 왕만 잡으면 군민은 자연히 항복할 겁니다.”
“너의 계책대로만 된다면 고구려 왕이 내 앞에 무릎 꿇을 날도 멀지 않았구나.”
연왕은 모용한의 진언을 받아들여 고구려를 먼저 공격하기로 했다.
모용한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은 연왕은 한수(韓壽)·모여니(慕輿泥) 등의 장수들과 함께 군사 4만을 이끌고 남쪽 길로 나아갔다. 장군 왕우(王寓)에게는 1만 5천의 군사를 주어 북쪽 길로 나아가게 했다.
연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고국원왕은 신하들과 대책을 의논했다.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소?”
왕제 무(武)가 나서서 씩씩하게 아뢰었다.
“저들은 이 땅의 지리에 밝지 못합니다. 분명 평활한 북쪽 길로 쳐들어올 겁니다. 소신이 가서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저들을 물리치겠습니다.”
득의만만한 왕제와 달리 대사자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모용황은 간계가 뛰어난 자입니다. 모두가 북쪽의 평탄하고 넓은 길로 올 거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것을 노리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험하고 좁은 남쪽 길을 택할 겁니다. 그러니 남쪽의 방비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왕제가 반박하고 나섰다.
“저들은 먼 길을 달려오고 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일전을 치르고 싶을 텐데, 어찌 일부러 험한 길을 택하겠습니까. 지금은 역량을 집중시켜야 할 때입니다.”
대사자도 물러서지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모용황의 본대가 남쪽 길을 택한다면 도성까지도 위태로워질 겁니다.”
둘의 의견이 팽팽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고국원왕이 입을 열었다.
“저들의 움직임을 살핀 후에 그에 맞춰 대응합시다.”
왕은 척후병을 보내 연군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피게 했다. 얼마 후, 국경에서 전령이 당도했다.
“연나라 군대가 북쪽 길로 오고 있습니다.”
고국원왕은 즉시 고무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는 즉시 정병 3만을 이끌고 북쪽 길로 나아가서 연군을 막도록 하라.”
아불화도가가 다급히 나서서 말렸다.
“저들의 계책일지도 모릅니다. 적은 군사로 우리를 현혹한 다음, 정작 주력군은 남쪽으로 쳐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절대 남쪽 길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척후에 따르면 연군이 북쪽 길로 온다고 하지 않소.”
고국원왕은 신중한 성격이기는 했지만 한번 뱉은 말을 되돌리지는 않았다.
왕의 뜻을 꺾기 어렵다고 판단한 아불화도가는 다시 품했다.
“그렇다면 저에게 군사 1만 명만 나누어 주십시오. 제가 남쪽의 요충지인 하곡(河谷)으로 나아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겠습니다.”
“정 그렇게 걱정이 되면 5천의 군사를 내줄 테니 데리고 가시오.”
왕은 마지못해 군사를 내주었다. 이 군사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거나 병약한 자였다.
아불화도가는 치미는 화를 억누르고 군사를 수습해 남쪽 길로 나아갔다. 하곡성에 도착한 후 연군의 침공에 대비해 목책을 둘러치고 군량과 무기를 비축했다.
한편 남쪽 길을 택한 연나라의 주력 부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낮에는 숨고 밤이 되면 달빛을 의지한 채 험하고 좁은 길을 행군했다.
십여 일이 지난 후 연군은 천신만고 끝에 산길을 지나 하곡에 이르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의 경계가 삼엄하고 방비가 견고했다. 성벽 위에서 고구려군의 깃발이 기세 좋게 날리고 있었다.
고구려군의 태세를 살핀 연왕은 모용한을 불러 물었다.
“저들이 우리 계책을 간파한 게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리 대비가 잘 돼 있나.”
“고구려에도 현명한 장수가 하나쯤은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리 염려하실 일은 아닙니다.”
모용한은 그 정도 변수는 예상했다는 듯 태연자약했다.
“저처럼 많은 깃발이 펄럭이는 걸 봐서는 상당히 많은 군사가 주둔하고 있는 게 아닌가!”
“척후를 보내 확인한 바로는 대단치 않습니다. 분명 허장성세(虛張聲勢)입니다. 당장 군사를 내어 몰아치면 한 식경이 지나기 전에 항복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연왕은 수하의 장담을 믿고 성을 치게 했다.
성안에 있던 아불화도가는 군사들을 모아 놓고 일장 연설을 했다.
“지금 저 밖에는 연나라의 대군이 당도해 있다. 그런데도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 비록 우리가 수적으로는 열세지만 나라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조건 저들을 막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우리의 땅은 저들의 말발굽에 짓밟힐 테고 우리의 부모 자식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곳에 뼈를 묻는다는 각오로 싸워라! 그러면 우리나라와 너희들의 가족이 살 수 있다!”
수장의 비장한 결의에 장병들은 함성으로 화답했다.
번뜩이는 창칼이 그들의 날선 각오를 대변했다.
연군의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성책을 타고 넘으려 애썼다. 성안의 고구려 군사들은 화살을 쏘고 돌을 던지며 악착같이 사수했다. 하루 밤낮을 싸웠지만 성은 요지부동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모용한은 공격 방법을 화공으로 바꿨다. 성을 두르고 있는 목책이 불에 약한 점을 노린 것이었다.
연나라 군사들은 성책 아래에 건초 더미와 유황 등을 던져 놓고 불화살을 쐈다. 목책 여기저기에서 시뻘건 불길이 솟아올랐다.
목책이 불타면서 무너지자 아불화도가는 군사를 이끌고 성채에서 빠져나왔다.
고구려군이 숲길에 접어들었을 때 사방에서 함성이 들리더니 매복해 있던 연군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연나라 장수 한수(韓壽)다. 순순히 말에서 내려 항복하라.”
적장의 외침을 듣고 아불화도가는 코웃음을 쳤다.
“할 수 있으면 내 창을 막아 보아라! 나를 이기면 기꺼이 내 목을 내주마!”
화가 난 한수는 아불화도가를 향해 방천극을 휘둘렀다. 아불화도가는 장창을 들어 방천극을 튕겨낸 후에 얼굴을 겨냥해 찔렀다. 그 강맹함에 놀란 연나라 장수는 황급히 몸을 뒤로 젖혔다. 창날이 흉갑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한수는 이제껏 경험한 바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방천극으로 공격하는 척하다가 상대가 움찔하는 사이 몸을 빼내 멀찍이 물러났다. 이를 본 연나라 군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상대해야 할 적의 수가 너무 많다 보니 용맹한 장수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아불화도가는 결국 창에 찔려서 말 아래로 떨어졌다. 수하들이 구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한 연군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장병 전원은 각오한 대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하곡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한 연군이 환도성으로 밀려오자 고국원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국상 저리매(猪里每)가 왕에게 다급하게 권한다.
“지금 도성에 남아 있는 1천의 병력으로는 도저히 연나라의 대군을 막아 낼 수 없습니다. 잠시 몸을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임금 된 자가 백성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이오.”
“지금은 치욕을 감내해야 할 때입니다. 폐하께서 살아 계셔야 이 나라 백성이 후일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뒷일은 신에게 맡기시고 어서 떠나십시오.”
고국원왕은 하는 수 없이 왕후를 비롯한 측근을 거느리고 성을 빠져나갔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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