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View] ‘물로 씌어진 이름’ 이승만의 ‘선불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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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신 국제문화부장·부국장 기자페이지 + 입력 2023-08-15 11:20:36

광복절의 달 8월에 생각한다. 왜 ‘일본제국 패망의 날’을 기념하면서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을 외면할까. 아무리 값진 것이라도 거저 얻으면 귀한 줄 모른다. 우리는 대통령 탄핵 사태 이래 체제 위기를 실감하고서야 물·공기처럼 누려 온 자유민주공화국의 가치에 눈뜨게 됐다. ‘대한민국 국부(國父)’의 발견이기도 하다.

3월 우남 이승만(1875~1965) 탄신일을 맞아 4·19 대표 인사들이 처음으로 국립서울현충원 묘역을 참배했다. 역사적 화해였다. 우남은 부통령선거 부정으로 벌어진 이 사태를 인지하자 변명없이 권좌에서 물러났다. 4·19는 자유민주국가다운 일이었기에 역설적이게도 건국의 아버지로선 성공의 역사다.

독립(건국)은 해방의 당연한 귀결이 아니다. 일제가 무너질 때 이 땅의 운명은 전적으로 미지수였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앞서 파악한 소련에 넘어갈 뻔했으나 얄타회담 당시 영국·미국·소련 간 ‘밀약’의 존재를 우남이 폭로하면서 결국 공산화를 막았다. 이 사실은 최근 출간된 ‘물로 씌어진 이름’ 제1부(전 5권)에 실증적 사료를 기반으로 자세히 그려져 있다. 뛰어난 작가이자 보수논객 복거일이 7년간 월간중앙에 연재해 온 이승만 전기소설을 묶은 대작으로 암 선고를 받은 이래 항암치료도 마다한 채 몰입한 숙명의 필업(筆業)이다.

자유·법치 현대국가 체제는 18~19세기 미국 독립·프랑스혁명 등 ‘피바다’를 건너 우여곡절 끝에 성립됐다. 한반도가 체험해 보지 못한 역사의 굴곡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건국은 ‘선물’이다. 이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여긴다면 우남이 미울 수밖에 없다. 그를 분단의 원흉이라 함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통일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의 토로이며, 그런 통일을 향한 과도적 단계가 문재인정부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였다.

우리 헌정사를 ‘후불제’로 설명한 사람이 있다. 민주공화국 이름값을 나중에 치렀다는 뜻이다. 이런 주장을 하려면 ‘선불 공화국’ 즉 대한민국 출발의 의미를 먼저 짚었어야 옳다. 오늘날 우리를 선진국 시민이 되게 한 자유민주 체제는 우남의 전 생애로 ‘미리 지불’ 됐기에 가능했다. 이 ‘선불’이 없었다면 ‘후불’의 여지 자체가 생겨날 수 없었다.

우남은 자신이 태어난 중세사회로부터 단숨에 현대사회로 건너뛴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국제질서에 맵시 있게 적응하면서” “부활할 조국의 청사진을 자유민주주의의 원리에 맞게 그렸다. 그 과정이 현란하면서도 자연스러워 애벌레가 고치 속 번데기가 되는 과정을 건너뛰고 문득 나비가 되어 날아오른 듯하다.” 복 작가는 이렇게 표현하며 “그런 변신의 비밀을 끝내 캐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인류사의 기적’, 솔직히 그 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기독교인들은 ‘섭리적 현상’으로 해석하곤 한다.

얼떨결에 주어진 해방이었으나 광복절이 강조되는 가운데 항일무장투쟁만 고평가되거나 부풀려졌다. 반면 구한말 만민공동회의 스타, 정치범 사형수로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 수감돼 서구 근대문명을 집중 연구한 선각자, 미국 조지워싱턴대 학사·하버드대 석사·프린스턴대 국제법 정치학 박사, 35년차 망명 독립지사 우남의 근대성과 외교 노력은 철저히 무시되고 오해받았다.

광복 3년 만에 자유민주공화국 틀이 구축된 것은 ‘인민민주’ 내지 조만간 그것으로 귀결될 ‘중도’ ‘좌우합작’과 타협하지 않은 결과이며, 우남 개인의 지성·통찰력·뚝심 없인 불가능했을 일이다. 세계정세를 꿰뚫어 본 그가 국내·외 상황을 ‘창의적으로’ 절묘하게 주도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 모른다.

우남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은 대한민국이 성공할수록 도를 더해 가며 악마화·희화화로 이어졌다. 2012년 유포된 유튜브 영상 ‘백년전쟁-두 얼굴의 이승만’은 그 결정판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해 이승만 부정이 필수불가결했던 것이다.

역으로,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우려면 이승만을 제대로 알려야 했다. “없는 것을 보태지 않아 소설답지 않은 소설” “내면 풍경보다 시대 묘사에 집중했다”는 복 작가의 말에서 역사가의 임무를 소설가가 감당하게 된 현실의 절박함과 처연함이 느껴진다.

‘물로 씌어진 이름’이란 너무 쉽게 잊힌 우남의 ‘공’을 비유한 것이다. “1954년 3선 개헌 외엔 별다른 ‘과’가 안 보인다”고 복 작가는 우남을 총평했다. 이에 이승만학당을 이끌어 온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가 유튜브 논평을 통해 일말의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3선 개헌은 노욕이 아니라 “역사가 짊어지운 마지막 십자가”였다는 것이다.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식 낭만적 통일론 속에 좌파 중도 조봉암이 대권을 차지하면 자유민주공화국은 사라질 게 뻔했다. 그런 류의 절체절명 고비들을 넘어 여기까지 온 대한민국이다. 세계 최빈국에서 선진국 10위권 나라가 된 지금, 이제 ‘8·15’는 진정한 ‘대한민국의 생일’이었으면 한다.

임명신 국제문화부장·부국장 imms@skyedaily.com 기자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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