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이 View] 우리는 제발 ‘남’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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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구 기자페이지 + 입력 2023-08-30 00:02:40

1992년 12월11일 대통령 선거를 불과 1주일 앞두고 부산 지역 기관장들이 복집에 모였다.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을 비롯해 시장과 교육감·검사장·지방경찰청장·국가안전기획부 부산지부장 등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거물급 인사들이었다.

이 자리에선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관권 선거를 벌이자는 내용의 대화가 오갔다. 그때 도청된 내용이 알려지면서 유명해진 말이 바로 ‘우리가 남이가!’였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일명 ‘초원복집 사건’이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은 너와 나는 가족이나 친형제 못지않게 하나로 똘똘 뭉쳐져 있다는 의미의 경상도 사투리다. 회식 자리 건배사에서 가끔 들리는 이 구호는 참가자 모두 하나가 되고 끈끈한 정을 쌓으며 가족처럼 지내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실 ‘우리’라는 말은 외국과는 달리 대한민국에선 ‘나’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우리 와이프’나 ‘우리 집’이 그 한 예인데, 와이프나 집이 상대방과 공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에도 한국에선 우리가 바로 ‘나’이고 내가 곧 ‘우리’인 셈이다.

과거 초원복집 사건에서 보듯 연고주의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것만은 아니다. 같은 직장에 다녔던 사람들 또한 연대감이 각별하다. 특히 정부기관이나 공사·공단에서의 연고주의는 더 끈끈하면서도 폐해 또한 극심하다. 이것은 공직에서 한솥밥을 먹었단 이유로 서로 밀고 당겨 주는 전관예우(前官禮遇)로 발현이 된다.

한국인 특유의 정(情)을 살려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거야 뭐라 간섭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부작용과 피해가 일반 국민에게 돌아간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오죽했으면 범죄조직 마피아에 빗대 ‘관피아’란 말까지 생겨났을까?

전관예우는 과거의 지위나 업적을 인정받아 현재도 특별한 대우나 존경받는 상황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과거의 지위를 인정하고 그에 따라 특별한 대우를 하는 것은 인간관계나 사회 내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얼핏 보면 그럴듯하지만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우려는 늘 잠재돼 있다.

법관 출신의 변호사가 전관예우를 앞세워 수십억 원의 변론비를 받고 변호를 맡는 게 대표적이다. 공공기관에서 퇴직한 사람이 감사를 받거나 공사를 수주해야 하는 민간기업에 재취업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최근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발주한 아파트에서 ‘철근 누락’ 사실이 무더기로 확인되면서 LH의 ‘부실 관리·감독’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문제가 발생하게 된 이면에는 LH의 전관예우 관례가 숨어 있었다. LH 출신이 설계와 감리 업체에 다시 취업하는 구조에서 부실공사라는 결과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경실련이 밝힌 2015~2020년 LH 설계용역 수의계약 536건, 건설사업관리용역 경쟁입찰 290건에 대한 수주 내용 분석을 보면 LH 전관 영입업체 47곳이 용역의 55.4％(297건), 계약 금액의 69.4％(6582억 원)를 몰아갔다고 한다. 공공기관에서 전관예우가 얼마나 관행처럼 이어져 왔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 아파트 철근 누락 사태의 원인으로 지목됐던 LH의 전관 특혜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년 전에도 혁신안이 나와 퇴직자의 사옥 출입을 제한했지만 실제로는 전관들이 월 8회 넘게 사옥을 드나들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명분은 퇴직자의 ‘안부 인사’차 방문이지만 공사 수주나 관리감독 시 ‘무사통과’를 위한 작업이 이뤄졌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공식적인 방문이 이 정도인데 비공식 방문과 외부에서의 접촉까지 합친다면 이루 셀 수조차 없을 것이다.

정부기관에서의 전관예우 관행 또한 LH 못지않다. 최근 3년간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으로 이직한 금융감독원 퇴직자가 10명이 넘었다. 특히 금감원의 검사·감독 대상인 금융기관으로 이직하는 퇴직자의 사례가 늘고 있다. 이전에는 금융권과 상관없는 기업이나 비영리기관으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올해 재취업을 승인받은 퇴직자 22명은 은행·금융지주·보험사·카드사·증권사·저축은행·회계법인 등 모두 금감원의 감독 대상 기관으로 재취업했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몸값’을 하기 위해 전관을 이용해 로비를 하고, 전관을 채용한 기업은 이를 통해 이득을 얻는 시스템이 자리잡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공공기관의 전관예우를 통한 이권 카르텔을 없애기 위해선 현재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규제책이 필요하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로 전관을 이용해 장난질하고 이득을 얻으려는 것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인식시켜 줘야 한다.

설계 공모나 경쟁입찰에 응할 때 전관이 있는 회사는 아예 경쟁입찰에서 배제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공공기관을 퇴직한 고위급 인사들이 관련 업무에 재취업하는 경우 취업제한 기간이나 관련 업무 제한 규정도 더 폭넓게 확대해야 한다.

우리가 남이가? 그렇다. 우린 제발 남이어야 한다. 최소한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거나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우려가 있는 공적인 업무를 맡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안전하고 투명한 대한민국을 위해 이젠 정부와 국회가 나설 때다.

김준구 jkkim@skyedaily.com 기자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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