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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공격하는 데 열중해 있던 고구려군은 느닷없이 나타난 신라군을 보고 매우 당황했다. 졸지에 열세에 처하게 된 범개는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사부는 퇴각하는 고구려군을 쫓지 않았다. 금현성주 흥막(興幕)은 고구려 군사들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신라군을 맞아들였다.
“이렇게 구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방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사부는 그러고는 웃는 낯으로 심중에 있는 얘기를 꺼냈다.
“당분간 저희가 이 성의 수비를 맡는 게 좋을 듯합니다. 고구려군이 다시 쳐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말은 부드럽게 했지만 금현성을 차지하겠다는 뜻이었다.
흥막도 어리석은 자는 아니었기에 이사부의 속셈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건 우리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소장이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흥막은 상대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거부의 뜻을 표했다.
그런다고 호락호락 물러날 이사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백제 왕께 전령을 보내 물어보시지요. 그때까지는 저희가 방어를 맡겠습니다.”
이사부가 막무가내로 나오니 힘이 없는 흥막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성은 신라군의 치하에 놓였고 성주 흥막은 볼모나 다름없는 신세가 됐다.
금현성을 장악한 이사부는 지체하지 않고 도살성으로 나아갔다.
도살성을 지키고 있던 백제 장수 달사도 신라군이 당도하자 별다른 의심 없이 성문을 열어 맞아들였다. 금현성의 사정을 모르고 있던 달사로서는 신라군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성 안에 들어선 신라 군사들은 다짜고짜 달사를 포박했다.
이사부는 포승에 묶여서 끌려온 달사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무 노여워하지는 말게나. 우리는 동맹을 맺은 사이가 아닌가. 고구려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 신라가 이 성을 지키는 것이 좋을 듯하여 이러는 걸세. 말로 하면 그대가 우리의 순수한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 본의 아니게 이런 방법을 썼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게나.”
달사는 신라군을 믿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이사부가 달사의 포박을 풀어 주며 일렀다.
“장군은 이 길로 사비성으로 돌아가서 백제 왕께 도살성과 금현성은 신라군이 지킬 테니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하시게.”
달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도살성을 떠나야 했다.
돌아온 달사의 보고를 받은 성왕은 분연히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부르짖었다.
“어찌 이리 신의를 저버릴 수 있단 말인가. 내 이놈들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상좌평 사오가 극구 말렸다.
“잠시 분을 참으소서. 신라와 싸우는 것은 고구려를 돕는 일입니다. 이번 사태는 불문에 부치고 좋은 말로 타이르십시오. 일단은 고구려를 물리친 후에 신라의 죄를 따져도 늦지 않습니다.”
성왕은 상좌평의 말을 듣고 냉정함을 되찾았다. 주변 상황을 따져 보면 사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성왕은 분을 삭이고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우리 폐하께서는 이번 일을 불문에 부치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양국이 힘을 합쳐서 고구려를 쳐야 할 때니까요.”
진흥왕 역시 당장 백제와의 전면전을 펼칠 생각은 없었기에 사은의 뜻을 표하고, 사신을 융숭하게 대접한 후 돌려보냈다.
이로써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싸우는 상황을 이용해서 힘들이지 않고 한수 상류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야말로 어부지리를 얻은 셈이었다.
이듬해 신라에서는 식도 태후가 섭정에서 물러나고 진흥왕이 친정을 하게 됐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진흥왕은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치고 나라의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전국을 순행했다.
진흥왕은 각 고을을 돌며 지방 관리들을 감찰하고 백성의 생활을 살폈다. 그런 과정에서 백성을 착취하여 잇속을 챙기거나 고을의 일을 소홀히 한 관리를 엄히 다스리고 관창을 열어 어려운 이들을 구휼토록 했다. 이 때문에 온 나라에 젊은 임금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진흥왕은 백성을 위무한 후에 신하들과 고구려를 칠 계획을 상의했다.
상대등 이사부가 나서서 아뢰었다.
“고구려는 내우(內憂)에 시달린데다가 한수 이북까지 치고 올라온 백제군을 신경 쓰느라 죽령(竹嶺) 쪽은 미처 방비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죽령 이북을 쳐서 북진의 교두보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진흥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누구를 보내는 게 좋겠습니까?”
“거칠부는 학문뿐 아니라 군사를 다루는 데도 조예가 깊습니다. 그에게 맡기시면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진흥왕은 이사부의 말에 따라 거칠부에게 1만의 군사를 주어 죽령 너머의 고현(高峴) 지역을 공격하게 했다. 왕은 출전하는 군사들을 응원하기 위해 친히 낭성(娘城)으로 나아갔다.
낭성에 도착한 진흥왕은 성주부에 임시 행궁을 마련했다.
밤이 되자 낮에 숨죽였던 봄꽃들이 마음껏 향기를 발산했다. 진흥왕은 꽃내음에 취하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던 왕의 귀에 낯선 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나비가 날 듯이 경쾌하고 부드럽던 선율이 어느새 슬픔을 끌어올리는 두레박처럼 둔중하고도 느릿하게 흘렀다.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교차하며 마음속에 자리한 어둠이 한순간에 정화되는 듯했다.
어느 순간 소리가 끊기자 진흥왕은 정신을 차리고 시위인 밀봉(密奉)을 불렀다.
“저 황홀한 선율을 들었느냐? 도대체 어떤 악기가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단 말이냐! 내 이제껏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선율이다.”
시위가 알 리 없었다.
“송구합니다만 소신도 처음 들어 봤습니다.”
“당장 알아보고 오너라!”
왕명을 받은 시위는 소리의 출처를 찾으러 나갔다.
밀봉은 수하들을 이끌고 행궁을 나와 음악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헤맸다. 성벽을 따라 핀 봄꽃이 달빛을 받아 화사하게 출렁였다. 야경을 도는 군사들의 딱따기 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렸다.
시위는 음악 소리가 다시 들릴까 하여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바람을 타고 악기 소리가 들려왔다. 샘에 물방울이 떨어지듯 맑은 선율로 시작해서 거센 파도 소리로 변해 가더니 급기야는 한바탕 폭풍우가 쓸고 지나가는 듯 광기(狂氣)로 치달았다. 행궁에서 들을 때와는 달리 격동적이었다. 마치 한바탕 악몽을 꾸고 일어난 듯했다.
밀봉은 지엄한 왕명을 수행해야 했기에 정신을 가다듬었다. 군사들이 흩어져 악기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성 전체에 깊고도 넓게 퍼져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들이 밤새 진원지를 찾아 돌아다니는 동안 음악은 그쳤다가 다시 들려오기를 반복했다.
밀봉은 새벽까지 고생하다가 간신히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을 찾아냈다. 성 외곽에 자리한 작은 오두막집이었다.
밀봉이 주인을 불렀다.
“게 아무도 없소?”
밀봉의 목소리가 들리자 집 안에서 한 청년이 문을 열고 나왔다. 마치 선계(仙界)에 속한 사람처럼 해맑으면서도 고고한 기품이 풍기는 모습이었다.
“어인 일이신지요?”
청년의 출중한 모습에 넋을 잃고 있던 밀봉은 그의 깊은 맑은 목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이 온 이유를 떠올렸다.
“청량(淸涼)한 가락을 쫓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됐소.”
시위는 청년의 정체를 캐내기 위해 짐짓 신분을 숨겼다.
청년은 정겹게 웃으면서 밀봉 일행을 맞아들였다.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문(尼文)이라고 합니다. 지금 연주하시는 분은 저의 스승이신 우륵(于勒) 선생이십니다.”
밀봉은 우륵이라는 인물에 대해 호기심이 일었다.
“선율을 듣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소. 스승님을 꼭 만나 뵙고 싶구려.”
이문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 스승께서는 한번 가야금(伽倻琴) 연주를 시작하시면 며칠 밤낮을 탄주(彈奏)에만 빠져 계십니다. 이럴 때는 누구도 방해할 수가 없습니다.”
“스승께서 연주하는 악기가 가야금이란 것이구려. 도대체 어찌 생긴 악기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오?”
이문은 가야금 얘기가 나오자 금세 얼굴이 환해지면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가야금은 대가야의 가실왕(嘉悉王)께서 거문고를 변형해 만든 악기입니다. 저희 스승님께서는 가야금을 위한 곡을 만들라는 왕명을 받고 가야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악곡을 정리하여 12곡을 만들었습니다.”
밀봉의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그대들이 가야에서 왔단 말이오?”
이문은 쓸데없이 말이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밀봉은 물러설 마음이 없었다.
“스승님을 꼭 만나야겠소. 매우 중요한 일이니 여쭈어 주시오.”
이문은 시위의 채근에 못 이겨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이문은 한참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밀봉은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청년의 말에 따르면 그와 스승은 가야인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가야의 간자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밀봉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음악이 그쳤다. 갑자기 세상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무거운 정적을 깨고 발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께서 안으로 모시라 하셨습니다.”
이문은 시위를 집 안으로 인도했다. 밀봉은 두리번거리며 뒤를 따라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한 사내가 고요하게 좌정하고 있었다. 중년의 나이에 긴 수염과 깊고 맑은 눈, 그리고 온화한 미소가 눈길을 끌었다. 선학(仙鶴)을 타고 내려온 듯 선인의 풍모가 느껴졌다.
사내의 옆에는 길이가 다섯 자 정도 되는 악기가 놓여 있었다. 오동나무로 만든 공명판(共鳴板)에 명주를 꼰 12개의 줄을 세로로 걸고, 기러기발로 버티어 놓은 것이 신기해 보였다. 이것이 바로 가야금이라는 악기였다.
사내는 예를 갖추어 맞아들였다.
“저는 우륵이라 합니다.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밀봉은 우륵을 대면하고 나서 그가 간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렸다. 그는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저는 신라 국왕의 시종인 밀봉이라 합니다. 폐하께서 선생의 가야금 연주를 들으시고 감명을 받으셨는지 저에게 반드시 선생을 모셔 오라 명하셨습니다. 저와 함께 가시지요.”
국왕이 찾는다고 해도 우륵은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우륵이 잠시 생각하더니 마침내 말문을 연다.
“임금님께서 미천한 이 몸을 찾으신다니 당연히 가 봐야지요. 다만, 지금은 음악의 묘(妙)를 찾는 중이라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며칠 후에 수련이 끝나면 직접 찾아뵐 테니 그리 말씀드려 주십시오.”
우륵은 기가 죽거나 비굴하지 않았다. 예를 지키면서도 당당하게 뜻을 밝혔다. 권력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주유(周遊)하는 도인의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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