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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년이 지나자 세 제자는 스승이 만든 12곡을 완전히 익혔다. 이와 함께 계고와 수영의 연정도 무르익었다.
그 사이 수영의 아버지는 유명을 달리했다. 홀로 산속 오두막에 남게 된 수영은 우륵의 배려로 계고와 함께 대문산 기슭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륵은 세 제자를 불러서 일렀다.
“임금님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었다. 도성으로 돌아가 너희의 실력을 마음껏 펼쳐 보여라.”
“그동안 베풀어 주신 가르침을 평생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겠습니다.”
계고를 필두로 제자들이 우륵에게 큰절을 올렸다.
“저희가 스승님을 위해서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그동안 12곡조를 배우면서 나름 신라의 정서에 맞게 변형시켜 보았습니다. 저희의 연주와 춤을 봐 주십시오.”
그들은 탄금대로 나아갔다. 계고는 가야금을 잡고 벽지는 노래를 불렀다. 그 사이에서 만덕은 춤을 추었다. 세 사람은 자신들이 편곡한 5곡을 차례로 풀어 나갔다.
우륵은 마음속에서 희로애락이 뛰놀다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희열을 느꼈다. 어느새 그의 눈가에 맑은 눈물이 고였다.
연주가 끝나자 우륵은 멈췄던 숨을 천천히 몰아쉬며 연주에 대해 평했다.
“즐겁지만 방탕치 않으며, 애절하면서도 슬프지 않으니 가히 바르다고 할 만하다. 임금님 앞에서 이 곡을 연주해도 좋을 듯하구나.”
제자들은 스승에게 작별을 고하고 도성으로 떠났다.
계고 일행이 궁에 도착하자 진흥왕이 반가이 맞이했다. 세 사람은 이제 예전처럼 오만하지 않았다.
왕은 이들의 얼굴에서 겸양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 그동안 너희가 이룬 성과를 보여다오.”
왕명이 떨어지자 계고가 좌정하고 가야금을 고쳐 잡았다. 벽지는 나무 위에 앉은 새처럼 자연스럽게 그 옆에 섰다. 소슬바람이 불어오듯이 가야금 탄주가 시작되자 벽지는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가락 위에 노래를 실었다. 곡조가 무르익을 무렵 만덕이 날갯짓하는 두루미처럼 병창(竝唱)에 몸을 맡겼다.
연희는 한 폭의 산수화 같았다. 진흥왕은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마음이 포근해졌다가 아리기도 하고, 북받쳐 오르다가 금세 풀리기도 했다.
연주가 끝나자 진흥왕은 얼굴에 가득 홍조를 띠며 말했다.
“짐은 지난날 낭비성에서 우륵의 연주를 들었을 때와 같이 감동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너희는 앞으로 음률에 정진하여 대악을 발전시키도록 하라.”
진흥왕은 예인들에게 큰 상을 내리고 전폭적인 지원을 천명했다.
이로써 우륵의 음악은 신라의 대악으로 채택됐고, 가야금은 궁중 음악의 주요한 악기로 쓰이게 됐다. 음률에 대한 우륵의 열정이 신라에서 꽃피게 된 것이다.
백제의 성왕은 신라군이 한수 상류의 고현 일대를 공략하는 사이에 고구려의 남평양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남평양성은 황해도의 중심지로 도성인 평양에서도 멀지 않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백제군이 이곳을 점령한 것은 고구려에게 큰 타격이었다.
이때 고구려는 여전히 정국이 불안했다. 양원왕이 등극한 후에도 세군의 잔당인 환도성의 간주리를 비롯한 몇몇 지방 성주가 조정과 대치하고 있었다.
양원왕은 대대로 추운을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백제와 신라가 우리 변경을 공격하고 있소. 어찌해야 하겠소?”
“백제가 남평양성까지 함락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북상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고현까지 쳐들어온 신라군을 몰아내는 일도 시급합니다. 하지만 당장 남방 정벌에 나서려 해도 북방의 돌궐이 심상치 않은 기미를 보이고 있기에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갈피를 잡기 어려울 때는 힘보다는 계교를 써야 합니다.”
“좋은 계책이 있소?”
“신라를 이용하소서. 지금은 신라와 백제가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신라 왕은 욕심이 많은 자입니다. 백제의 도살·금현성을 가로챈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백제가 점령한 한수 이북의 땅은 누가 봐도 비옥하지만 신라가 얻은 고현 일대는 산악 지역이라 경제적 이득이 적습니다. 만일 우리가 신라에 한수 하류 유역의 땅을 보장해 준다면 그들의 창칼은 백제를 향할 겁니다.”
국왕이 듣기에 기발한 계책이었다.
양원왕은 즉시 수곡성에 군사를 보내 백제군의 북진을 제어하는 한편 신라에 밀사를 파견했다.
진흥왕은 고구려 왕의 제안을 듣고 구미가 당겼다. 고구려의 위협 때문에 백제와 손을 잡기는 했지만 한수 유역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폐기할 수 있었다. 한수 일대를 수중에 넣으면 백제를 누르고 남방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진흥왕은 고구려 사신에게 승낙의 뜻을 전하고 신하들과 백제 칠 일을 의논했다.
한편 백제의 성왕은 이런 상황은 꿈에도 모르고 수곡성을 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수곡성을 함락시키고 나아가 평양성까지 도모하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때 진흥왕의 명을 받은 아찬 김무력(金武力)이 군사를 이끌고 백제 동북변의 모현성(慕賢城)으로 쳐들어왔다. 김무력은 금관국 구해왕(仇亥王)의 셋째 아들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신라의 배신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백제 동북변의 여러 성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신라군에게 모조리 함락됐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신라의 배신에 성왕은 황급히 군사를 물려 한성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미련을 가지고 후퇴를 미루다가는 나라가 반토막 날 수 있었다.
백제군이 물러가는 모습을 본 고구려 장군 여민항(如閔沆)은 즉시 군사를 이끌고 수곡성을 빠져나와 반격에 나섰다. 고구려군은 남평양성을 비롯해 패하 이서를 수복한 후에 남진을 거듭했다.
양편에서 공격을 받게 된 성왕은 한성까지 포기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성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대책을 논의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소. 신라의 배신으로 이제껏 피 흘려 얻은 영토가 물거품처럼 사라졌소. 당장 신라를 쳐서 죗값을 치르게 하겠소.”
성왕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치 못했다. 이에 병관좌평 연회(燕會)가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고구려군은 이미 청목령성을 점령했고 신라의 군세도 자못 대단합니다. 지금은 나아가 싸울 때가 아니라 머물며 지켜야 할 때입니다. 일단 군사를 나누어 한 대는 신라군이 한성으로 진격해 오는 것을 막게 하고 다른 한 대는 한수를 지키게 해서 고구려군의 남하를 저지해야 합니다.”
“그럼 이제껏 힘들여 얻은 것을 고스란히 포기해야 한단 말이오?”
달솔 동성자막고(東城字莫古)가 간곡히 청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어쩔 수 없습니다. 후일을 기약하십시오. 이곳 한성도 위험하니 폐하께서는 당장 사비성으로 피하셔야 합니다.”
성왕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그간의 노력이 허공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고집만 피우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눈물을 흘리며 철군을 결정했다.
사비성으로 돌아간 성왕은 신라를 응징하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 번은 들었다. 하지만 고구려군이 청목령을 넘어 오목성까지 진군해 온 상황에서 함부로 군사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한성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이리하여 전황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고구려로서는 백제의 북진을 막고 대수 이북의 영토를 완전히 회복했기에 국내가 불안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남진을 계속할 필요가 없었다.
백제의 성왕은 고구려와 신라의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주변국과 힘을 합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대가야와 왜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군사 조련에 박차를 가했다.
대가야에 도착한 백제 사신 유담(愈擔)은 가실왕에게 성왕의 뜻을 전했다.
가실왕은 대가야가 힘을 잃고 백제의 속국이나 마찬가지로 전락한 탓에 의욕을 잃고 주색에 빠져 있었다. 당시 모든 국사는 대신 설추가 임의로 처리했다.
설추는 본래 백제를 위해 일하는 자였기에 즉시 지원군을 보내기로 했다. 그의 도당인 대신들 또한 이에 적극 찬성했다. 이리하여 대가야는 백제의 대(對)신라전에 참가하게 됐다.
한편 성왕은 달솔 동성자막고를 필두로 한솔 상귀·내솔 물부도를 비롯해 승려·박사·악공 등을 포함한 대규모 사절단을 왜지로 보냈다.
백제는 왜 지역에 관원을 상주시켜 정책 자문 및 교역 업무를 담당하게 했는데 이때는 내솔 동성자언(東城子言)이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왜의 흠명왕(欽明王)이 동성자언을 통해서 누차 백제의 선진 문화를 전할 승려·박사·악공 등을 요청했었기에 성왕은 참전을 요구하면서 선물로 대규모 문화 사절단을 보낸 것이었다.
왜의 흠명왕은 백제 사신단을 반갑게 맞이했다.
“먼 길 오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소. 본국의 폐하께서 항상 배려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오.”
흠명왕은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백제 사신의 노고를 위로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동성자막고가 말을 꺼냈다.
“이번에 신라가 우리와의 동맹을 깨고 고구려 쪽에 붙었습니다. 이처럼 신의를 저버린 나라를 어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폐하께서는 이번에 대군을 일으켜 그들을 응징하고자 하십니다. 때가 되면 왜에서도 군사를 보내 주십시오.”
“저들의 몰염치와 오만을 어찌 두고 볼 수 있겠소. 날짜만 잡히면 언제든 출병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소.”
평소 신라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왜의 흠명왕은 흔쾌히 승낙했다.
동성자막고는 동성자언과 교대하여 왜국 내 백제 공관에 머물면서 왜 왕과 출병에 대한 이견을 조율했다.
성왕의 신라 공략은 이처럼 철저히 준비되고 있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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