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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군주 김무력이 백제 북변의 보루인 한...'))
서력 553년, 신주(新州)의 군주 김무력이 백제 북변의 보루인 한성을 함락시킴으로써 한수 하류 유역은 신라의 수중에 떨어졌다.
백제 성왕은 이 소식을 듣고 소매를 떨치며 분연히 일어났다.
“이대로 신라에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받은 만큼 갚아 줄 것이다.”
성왕은 대가야와 왜에 사람을 보내 군사를 지원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있던 양국의 군대가 속속 금산(錦山)으로 집결했다.
성왕은 도열해 있는 군사들에게 외쳤다.
“우리의 목표는 간교하고 무도한 신라군을 무찌르고 빼앗긴 땅을 되찾는 것이다. 이는 하늘의 뜻이니 우리 앞에는 오직 승리만이 있을 뿐이다.”
성왕의 웅변이 끝나자 군사들은 함성으로 화답했다.
3만의 정예병은 금산에서 출발해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관산성을 지키고 있던 각간 우덕(于德)은 이찬 탐지(耽知)에게 성 밖에서 백제군을 맞게 했다.
탐지가 이원(李原)으로 나가 진을 치고 있을 때 백제의 기마군이 기치를 휘날리며 달려왔다. 이찬은 궁수를 내세워 백제군에게 활을 쏘게 했다.
신라군의 화살이 빗발치자 백제의 기병은 쉽게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탐지는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부으며 백제군의 사기가 꺾이기를 기다렸다.
백제군은 진격이 여의치 않자 방패를 든 보병을 내세웠다. 이를 본 탐지는 깃발을 흔들어 대기하고 있던 기병을 출격시켰다. 신라의 군마는 노도와 같이 백제 보병을 덮쳐 갔다. 신라군의 재빠른 공격에 백제 군사들은 허둥대며 대오를 이탈했다. 신라 장수는 이때다 싶어 군사들에게 총진격을 명했다.
백제군은 신라군이 해일처럼 진격해 오자 겁을 먹고 달아났다. 신라군은 기세를 올리며 후퇴하는 백제 군사들을 한참이나 추격했다.
백제군이 무기력하게 패퇴하자 탐지는 덜컥 의심이 일었다.
‘백제군이 이렇게 허약할 리가 없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양쪽 언덕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뒤이어 가야와 왜의 깃발을 앞세운 군사들이 몰려나왔다. 그러자 달아나던 백제군도 되돌아서서 반격을 시작했다.
탐지는 그제야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사방에서 백제·대가야·왜의 군사와 깃발이 메뚜기 떼처럼 새카맣게 몰려들었다.
탐지는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승산이 없었다. 그는 군사들에게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라고 소리쳤다. 당황한 신라군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며 무수히 죽어 나갔다.
이원에서의 싸움은 상대를 안심시킨 후 허를 찌른 전략의 승리였다. 성왕은 장군 무운(武雲)에게 5천의 군사를 주면서 적당히 싸우는 척하다가 물러나게 시켰다. 그리고 왜장 유지신(幽知申)과 대가야 장군 남주호(南朱浩)에게 각기 군사를 이끌고 언덕 좌우에 매복하게 했다.
전투가 끝나자 성왕은 호위 군사들과 함께 전장을 찾았다. 성왕이 나타나자 백제 군사들은 좌우로 갈라서며 길을 냈다. 벌판에는 신라군의 시신이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이찬 탐지는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관산성으로 달렸다. 잠시 숨을 돌리며 뒤를 돌아보니 따라오는 군사가 수백에 불과했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참패였다. 탐지는 이를 악물었다. 눈에 선 핏발이 터져서 금방이라도 피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패배하고 돌아온 이찬으로부터 전황을 보고받은 각간 우덕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는 도성으로 전령을 보냈다. 동시에 신주의 군주 김무력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때 무력은 한성을 점령해서 한수 주변 지역에 대한 정지 작업을 펼치고 있었다.
무력은 급보를 받고 남행을 하자니 북쪽의 고구려군과 매소홀에 주둔한 백제 해군이 신경 쓰였다. 동맹을 맺었다고는 하지만 빈틈이 보이면 고구려군은 언제든 한수 유역으로 치고 들어올 것이었다. 백제의 해군도 한성 수복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무력은 한성의 수비를 점검하고 정예병으로 관산성을 구원할 부대를 편성했다. 되도록 빨리 백제군을 물리치고 돌아와야 했다.
서전을 대승으로 장식한 성왕은 의기양양하게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관산성을 포위했다.
관산성주 우덕은 성을 굳게 지키며 무력의 구원군이 당도하기만을 기다렸다.
성왕은 군사들에게 일제히 성을 공격하도록 명했다. 신라군은 이원에서의 패배로 전력이 약화된 터라 관산성의 군사만으로는 백제의 대군을 막아 내기 어려웠다. 그래도 험준한 지형 덕분에 겨우 버틸 수는 있었다.
성왕은 성이 생각처럼 쉽게 함락되지 않자 장수들과 함께 대책을 의논했다.
장군 무운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이번 전투는 시간이 관건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관산성을 함락시키고 한수 유역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오히려 반격을 당할 수 있습니다.”
성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신라의 구원군이 당도하기 전에 성을 함락시킬 방법이 없겠는가?”
태자 부여창(扶餘昌)이 아뢰었다.
“지금은 남동풍이 부는 시기입니다. 산성 동남쪽에서 화공을 펼치면 저들이 혼란에 빠질 겁니다. 그때를 노려 공격하면 쉽게 적군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소자에게 맡겨 주시면 반드시 성을 함락시키겠습니다.”
태자가 굳은 결의를 보이자 성왕은 크게 기뻐했다.
성왕은 일단 성의 서쪽으로 군사를 보내 신라군의 이목을 끌게 했다. 그리고 부여창에게 3천의 군사를 주어 관산성 동쪽에 자리한 삼성산(三聖山)으로 나아가게 했다.
신라 각간 우덕은 백제군이 서쪽에서 공격해 오는 것을 보고 탐지에게 명해 서쪽의 방비를 강화했다. 그리고 군사들을 나누어 성의 남쪽과 북쪽으로도 보냈다. 동쪽은 지형이 험준했기에 십여 명의 파수병만을 배치해 뒀다.
백제군의 공격이 거세지자 성의 서쪽을 지키고 있던 군사들은 힘이 부쳤다. 탐지는 황급히 우덕에서 군사를 더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각간은 남쪽과 북쪽을 지키는 군사 중 절반을 차출하여 서쪽 성벽으로 보냈다.
관산성의 신라군이 온통 서쪽에 집중하고 있을 때 부여창은 군사를 이끌고 성의 동쪽에 면한 삼성산의 가파른 비탈을 올랐다. 백제 군사들은 기름을 먹인 천을 두른 화살과 염초·짚더미 등을 짊어지고 산길을 따라 성벽 밑으로 접근했다.
관산성의 동쪽 성벽 아래에 다다른 부여창은 군사들을 시켜 성문 앞에 염초와 짚더미를 쌓고 불을 놓았다. 나무로 된 성문은 불을 놓기 무섭게 타올랐다.
성벽 위의 파수병은 예상치 못했던 백제군의 출현을 우덕에게 알렸다. 각간은 미칠 노릇이었다. 서쪽을 막기에도 버거운 마당에 동쪽까지 신경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쪽이 무너지면 성 전체가 위험했기에 할 수 없이 북쪽과 남쪽에 남아 있는 군사를 끌어모아 동쪽 성벽으로 달려갔다.
우덕이 성의 동편에 도착해 보니 불화살이 성안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곳곳에서 불길이 일었다.
성 안벽에 잇대어 지어 놓은 건초 창고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더니 순식간에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이어서 마구간과 군사들의 막사에도 불이 붙었다.
백제군은 신라 군사들이 불을 끄느라 우왕좌왕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일제히 올가미와 사다리를 이용해서 성벽을 타고 넘었다.
신라군이 하나둘씩 백제군의 칼에 맞아 쓰러졌다. 백제 군사들은 마치 굶주린 들개 떼처럼 덮쳐 왔다. 겁에 질린 우덕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이때 우덕을 발견한 백제 군사 서너 명이 일제히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우덕은 날아오는 칼날을 힘겹게 막으면서 조금씩 물러났다. 그러다가 그만 뒤에 엎어져 있던 신라 군사의 시체에 걸려 넘어졌다. 이를 본 백제 군사가 순식간에 달려들어 우덕의 목을 베었다.
각간이 죽자 전의를 잃은 신라군은 앞다투어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서쪽 성벽에서 백제군을 맞아 싸우던 탐지는 우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싸울 의욕을 잃고 말았다. 그는 심복 몇 명만 데리고 북쪽 성문을 빠져나와 달아났다.
마지막까지 싸우던 신라 군사들까지 진압되자 관산성은 백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성왕은 태자에게 성을 지키게 한 후 군사를 이끌고 국원으로 진격했다.
백제의 성왕은 국원으로 가는 길에 삼년산군(三年山郡)에 이르렀다. 이곳을 지키던 신라 장수 허랑개(許狼蓋)는 지레 겁을 먹고 몇몇 수하 군사만을 데리고 달아났다. 덕분에 백제군은 손쉽게 삼년산성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삼년산성에 입성한 성왕은 성안 곳곳을 둘러보다가 마구간에 들렀다. 안에는 십여 마리의 말이 있었다. 성왕이 다가가니 말들이 몸을 뒤척이고 발굽으로 땅을 굴렀다. 낯선 사람이 나타나니 불안한 모양이었다.
가까이서 말을 살피던 국왕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지방 관아에 있는 군마(軍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근골이 뛰어나고 털에 윤기가 흘렀다. 왕궁에 있는 말들에 비해도 손색이 없었다.
성왕은 좌우 시위에게 당장 마방의 책임자를 찾아오라 분부했다. 명령을 받고 나간 시위들이 잠시 후 한 사내를 끌고 왔다. 비록 때에 찌든 누더기를 걸치고 있지만 깊고도 흔들림이 없는 눈망울과 굳게 다문 입술에서 범상치 않은 기상이 느껴졌다.
왕이 사내에게 물었다.
“네가 이 말들을 키웠느냐?”
“그렇습니다.”
사내는 왕 앞에서도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지 않고 왕을 똑바로 바라보자 시위 하나가 발길로 걷어찼다.
“무엄한 놈, 어느 안전이라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꾸하느냐!”
성왕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렇게 다룰 자가 아니니 나서지 마라.”
시위는 황송해 하며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성왕은 사내를 지그시 쳐다보며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사내는 귀찮다는 듯이 내뱉었다.
“고간(高干) 도도(都刀)라 합니다.”
퉁명스런 대답에 백제왕은 미소를 머금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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