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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들은 태후는 사다함에게 추가로 비옥한 땅을 식읍으로 내려 달라고 왕에게 청했다. 진흥왕은 태후의 청을 받아들여 옥토(沃土)를 식읍으로 내려 주려 했지만 사다함은 극구 사양했다.
“신에게 무슨 공이 있다고 이리 후대하십니까?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태후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에 국왕 역시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거부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은 왕명이다.”
왕이 이리 나오니 무턱대고 거부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개간하지 않은 황무지를 주십시오.”
진흥왕은 결국 사다함이 청한 대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알천에 있는 쓸모없는 땅을 내렸다.
사다함은 일이 없는 날에는 황무지로 나가서 땅을 개간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를 본 낭도들도 틈틈이 들러서 땅을 고르는 일을 도왔다. 그러다 보니 황폐한 땅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돌멩이만 가득했던 척박한 땅이 사다함과 낭도들의 손을 거치면서 옥토가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인근의 농부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틈틈이 황무지를 개간하려 노력했지만 실패만 거듭했던 그들로서는 경탄할 일이었다.
한 농부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사다함에게 물었다.
“그 척박한 곳을 기름진 땅으로 바꾼 비결이 뭡니까?”
“정성을 기울여 온 힘을 쏟았더니 땅도 나의 진심을 알아주었나 보네.”
이 말을 전해 들은 인근 주민은 사다함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 여기고 받들었다. 소문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서 백성 입에 그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렸다.
사다함이 눈에 띄게 성장하자 이화랑은 드디어 자신이 물러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그는 사다함에게 풍월주 자리를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풍월주로서 수많은 낭도를 이끌게 된 사다함은 아우인 설원랑(薛原郎)을 부제로 삼고 화랑도를 키우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사다함의 그림자인 무관랑은 대가야 정벌 후 우울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보다 공이 적은 장수들도 벼슬과 식읍을 받았는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약간의 비단뿐이었다. 사다함이 물심양면으로 애썼지만 그의 미천한 신분이 걸림돌이 되어 벼슬에 오를 수 없었다. 무관랑은 신분의 벽을 실감하고 좌절했다.
사다함이 이화랑의 뒤를 이어 풍월주로 임명되던 날 밤이었다. 낭도들이 이를 축하하기 위해 사다함의 집에 모였다. 성대한 연회가 벌어진 가운데 기쁨에 들뜬 낭도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집 안을 떠들썩하게 했다. 여기저기서 축하와 함께 술 권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무관랑은 조용히 술자리를 빠져나와 뜰로 나갔다. 그는 사다함의 집에서 기숙하고 있었는데, 가슴이 답답할 때면 뜰로 나가 바람을 쐬곤 했다.
무관랑은 뜰을 거닐며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의형인 사다함은 이제 풍월주가 됐으니 나라 방방곡곡에 그 이름을 떨칠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골품제로 말미암아 입신양명은 꿈도 꾸지 못하는 신세였다. 앞으로 평생을 노력한들 신분의 굴레만은 벗어던질 수 없을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비애를 느꼈다.
이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무관랑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자줏빛 두루마기가 바람에 물결치고, 곱은옥·물고기·칼·유리병·숫돌 모양의 장식이 달린 금 허리띠가 은은한 달빛을 머금고 있었다. 바람이 전해 오는 향취만으로도 그녀가 금진낭주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화사한 얼굴에는 고민의 빛이 역력했다.
무관랑은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금진낭주를 볼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뛰었다. 그러나 그녀는 주군인 사다함의 어머니였다. 그로서는 넘볼 수 없는 신분인 데다 나이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에게 향하는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무관랑과 눈이 마주친 금진낭주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금진낭주가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밤이 깊었는데 이곳에서 홀로 뭘 하고 있는가?”
“창틈으로 스며든 봄꽃 향기에 이끌려 나왔습니다.”
무관랑의 목소리가 잠자리 날개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가 정념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쳐다보자 금진낭주의 얼굴이 금세 붉게 물들었다.
무관랑의 사내다운 모습을 대하자 금진낭주의 가슴속에서 파문이 일었다. 그는 사다함의 의제(義弟)였으니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낭주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하지만 진정이 되기는커녕 심장이 더욱 맹렬하게 뛰었다.
대지가 줄어들기라도 하듯 두 사람의 간격은 점점 가까워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 머릿속에 사다함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들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불덩어리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관랑의 손이 금진낭주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농염한 체취가 손끝에 묻어났다. 낭주가 고개를 살포시 숙이자 황금 귀걸이의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격정에 휘말린 무관랑은 우악스럽게 여인을 끌어안았다.
구름 속에 숨은 달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한 쌍의 남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후로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밀회를 즐겼다. 그들은 식솔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했지만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하인들이 모를 턱이 있겠는가. 어느새 금진낭주와 무관랑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지만 본인들은 알지 못했다.
이 소문은 급기야 풍월주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사다함은 제 귀를 의심했다. 애써 부인하려 했지만 소문은 사실이었다. 그는 며칠을 두고 고민했다. 당장 무관랑을 벌하고 두 사람을 갈라놓는 게 마땅했지만 쓸쓸히 홀로 지내는 젊은 어머니를 생각하면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 지켜보기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낭도들이 소문을 듣고 사다함을 찾아왔다. 그들은 무관랑의 부정한 행실을 성토했다.
금진낭주와 무관랑의 문제는 이제 사다함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공론화됐다. 사다함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차마 의제를 해할 수는 없었다. 같은 날 같은 시에 죽자는 결의를 새삼스럽게 들추지 않더라도 그와의 의리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낭도들은 당장에라도 무관랑을 잡으러 갈 기세였다.
사다함은 그들을 황급히 제지했다.
“모두 참게.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네.”
사다함은 낭도들을 다독이는 한편 무관랑에게 하인을 보내 당장 달아나라고 귀띔을 해 주었다.
무관랑은 하인으로부터 사다함의 전갈을 받고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서둘러 집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단출하게 봇짐을 싸서 뒷담을 넘었다. 한시라도 빨리 성을 빠져나가야 했기에 걸음을 재촉했다. 날이 저물어 성문이 닫히면 꼼짝없이 성안에 갇히게 될 것이었다.
무관랑이 성문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였다. 별안간 등 뒤에서 함성이 들렸다. 놀라서 돌아보니 수십 명의 낭도가 시퍼런 칼을 뽑아 들고 뒤쫓아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관랑은 겁이 나서가 아니라 낭도들을 볼 면목이 없어 부랴부랴 성문을 향해 뛰었다. 몸이 날래서 쉽사리 따라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성문 앞에 이르러 보니 벌써 굳게 닫혀 있었다. 한번 닫힌 성문은 다음 날 첫닭이 울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열리지 않았다. 성벽은 매우 높을 뿐 아니라 성 둘레에 해자를 파 놓았기에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무관랑은 초조했다. 앞에는 높다란 성벽이 가로막고 있고, 뒤에선 무기를 든 수십 명의 장정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고심 끝에 계단을 따라 성벽 위로 올랐다. 순라를 돌던 군사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가 올라오자 제지하기 위해 달려왔다. 무관랑은 이들을 피해 성벽 위를 달렸다. 하지만 곧 길이 막히고 말았다. 그는 결국 양편에서 달려드는 사람들에 의해 포위됐다.
이제 이곳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성벽 아래로 뛰어내리는 것뿐이었다. 무관랑은 절대 잡혀서는 안 되는 처지였다. 그가 잡히면 금진낭주와 사다함이 곤란해지고 본인의 명예도 더럽혀질 것이었다. 더구나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낭도들에게도 몹쓸 짓을 시키는 것이었다.
무관랑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사내로 태어나서 천하를 호령해 보지도 못하고 가는구나.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목숨보다 소중한 벗과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은 여인을 만났으니!”
무관랑은 성벽에서 몸을 날렸다. 이대로 하늘로 날아올라 별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밤이 되면 금진(金珍)의 방 창문으로 스며들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잡아채 끌어올리려 했지만 자연의 섭리는 비정했다. 그는 해자의 시커먼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다함은 온몸이 젖은 채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 있는 무관랑의 시신을 봤다.
그는 의제를 흔들어 깨웠다.
“이보게, 눈 좀 떠 보게. 내가 왔네!”
아무 대답이 없었다. 무관랑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난 것이었다.
사다함은 의제의 시신을 끌어안고 통곡했다. 두 사람의 육신은 같이 있되, 영혼은 저승과 이승으로 나뉜 것이었다. 서글픈 현실에 주변에 선 낭도들은 눈물을 흘렸다. 사방이 괴괴한 가운데 흐느낌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무관랑이 죽은 후 사다함은 삶의 의욕을 잃고 처소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누구보다 늠름하고 심지가 굳은 그였지만 벗의 죽음 앞에서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금진낭주는 이런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본인이 혐오스러웠다. 자신의 염치없는 욕망 때문에 앞날이 창창한 두 젊은이를 망친 것이었다.
낭주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과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런 가운데도 아들이 폐인처럼 두문불출하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무관랑이 떠난 후 처음으로 사다함의 처소를 찾아갔다.
금진낭주는 아들의 수척한 모습을 보고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슬픔으로 볼이 푹 꺼진 데다가 눈이 퀭하고 초점이 없었다. 몸은 어찌나 말랐는지 앙상한 겨울나무에 옷을 걸쳐 놓은 것 같았다.
낭주는 비수로 후비는 듯 가슴이 아팠다.
“이 어미 때문에 네가 이 지경이 되었구나!”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사다함은 뼈만 남은 손을 들어 어머니를 다독였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입니다. 어찌 어머니 탓이겠습니까. 살아서 어머니께 큰 은혜를 입었으니 저세상에 가서라도 갚겠습니다.”
사다함은 병색이 완연한 얼굴에 힘겹게 미소를 띠어 보였다. 누가 봐도 그의 목숨은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금진 낭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방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하인들을 풀어 백방으로 용하다는 의원을 찾았다. 하지만 이름난 의원도 사다함의 병을 고칠 수 없었다.
며칠 뒤, 유난히 많은 별이 하늘을 가득 메운 밤이었다. 사다함은 갑자기 유쾌히 웃으며 병구완하던 하녀에게 말했다.
“저기를 봐라. 내 동생 무관랑이 나를 맞으러 왔구나. 내 이제 훌훌 털고 일어나 그와 함께 하늘에서 신나게 말을 달려 볼 것이다.”
목소리가 어찌나 생기에 넘치는지 하녀는 사다함이 병자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이날 밤, 사다함은 잠자듯이 숨을 거두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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