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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양원왕 말기의 일이다. 세항은 자신의 생질인 재웅 왕자를 보위에 올리고자 장자인 양성(陽成)을 지지하는 세력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싸움에서 크게 패한 세항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행방이 묘연했다. 그를 따르던 이들도 뿔뿔이 흩어져 속내를 숨긴 채 지내야 했다.
세항의 의제였던 환도성주 간주리(干朱里)는 짐짓 양원왕에게 협력하는 척하면서 주변 세력을 몰래 끌어모았다. 장수왕의 평양 천도로 세력이 약해진 국내성 일대의 구 귀족들은 평양 조정에 반감이 컸다. 그런 이유로 간주리의 선동에 쉽게 동조했다.
평소 몸이 약했던 양원왕은 추운을 비롯한 대신들의 동의하에 왕자 양성을 태자로 삼았다. 양성은 어린 나이에도 담력이 컸을 뿐 아니라 말타기와 활쏘기에도 능했다. 여러 면에서 영웅의 기상이 보였다.
양원왕은 어릴 때부터 양성을 무척 사랑해서 종종 무릎에 앉혀 놓고 이르곤 했다.
“아비는 비록 국왕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능력이 없어 나라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지금 신라와 백제가 우리 고구려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아비의 잘못이다. 훗날 저세상에 가서 선왕들의 얼굴을 어찌 봬야 할지 모르겠구나. 네가 나중에 크면 호태왕(好太王) 폐하에 필적할 성군이 되어 우리나라를 예전처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양성은 태자의 직첩을 받는 자리에서 아버지가 늘 말했던 위대한 고구려의 부활을 위해 혼신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서력 557년, 양원왕이 위독해지자 간주리가 모반을 일으켰다. 그 소식이 각지에 전해지면서 그동안 숨어 지내던 세군 잔당이 속속 환도성으로 모여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반군의 수효는 3만을 훌쩍 넘어섰다.
태자 양성은 급히 북부 욕살 고흘을 보내 반란군을 진압하게 했다. 고흘은 돌궐의 대군을 격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명장이었다. 그의 군대는 빠른 속도로 환도성을 향해 진군했다.
간주리는 고흘이 거느린 철기의 막강한 전투력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정면으로 대적할 생각이 없었다. 더구나 환도성은 지난날 도성이었던 국내성의 산성 역할을 했던 곳으로 험준한 산을 등진 천연의 요새였다. 누구를 막론하고 성을 공격하려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간주리는 진압군이 성을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가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 격파할 생각이었다.
얼마 후 북부 욕살의 군대가 환도성에 당도했다. 고흘이 성에 있는 반란군의 동태를 살피더니 뱃속에서부터 웃음을 터뜨렸다. 성을 함락시킬 전략에 골몰하던 장수들이 의아해서 쳐다보았다,
고흘은 웃음을 거두고 좌중을 둘러보며 말한다.
“내 간주리가 병법에 무지한 자인 줄은 알았지만 이다지도 어리석은 줄은 몰랐다. 반란을 일으켰으면 시간을 지체치 말고 평양으로 내달렸어야지 산성에 칩거해서 진압군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게 가당키나 하냐. 우리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성을 공격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저들은 결국 식량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할 수 없이 투항하거나 성문을 열고 싸우러 나올 것이다. 그때 맞아 싸우면 손쉽게 이길 수 있다.”
고흘을 성 앞에 진을 친 채 한 달이 지나도록 움직일 줄을 몰랐다.
예상과는 다른 진압군의 행동에 조바심이 나는 건 간주리였다. 박작성·비사성 등 여기저기서 병력을 마구 차출했기에 군사의 수가 갑자기 늘어 식량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동원된 군사들은 자기네가 반란군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다. 간주리는 하루라도 빨리 결판을 내야 했다.
간주리는 어둠을 틈타 성 밖으로 군사를 내보내 진압군의 진영을 살피게 했다. 정탐에 나선 군사가 고흘의 진지로 침투했다. 한동안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지켜보니 군사들에게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장수의 막사에서는 술판이 벌어지는지 시끌벅적했고, 경계를 서는 보초들은 졸고 있었다.
정탐꾼은 성으로 돌아와 자신이 본 진압군의 상황을 소상히 아뢰었다.
간주리는 이를 듣고 매우 기뻐했다.
“고흘도 이제 늙었구나. 군사의 통솔조차 제대로 안 되다니. 저들이 해이한 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간주리는 장수들과 머리를 맞대고 공격을 모색했다.
젊은 장수 세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당장 군사를 이끌고 저들을 일거에 쓸어 버리겠습니다.”
지난날 추군과 세군이 충돌했을 때 세항은 만약을 대비해서 장자인 세문을 간주리에게 보냈다. 세군의 패배 이후 아버지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던 세문의 가슴속에는 양원왕과 추운에 대한 증오가 깊이 자리 잡았다.
세문은 부친의 골격을 그대로 물려받아 8척 신장에 당당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무기로는 주로 철퇴를 사용했는데, 무시무시한 힘으로 휘두르는 쇳덩이의 위력은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간주리는 지나치게 의욕적인 세문을 보고 염려가 됐다. 비록 일당백의 용장이기는 하지만 성격이 과격하고 참을성이 부족해 진압군의 계책에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간주리가 세문을 꾸짖는다.
“저들이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고 해서 고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세문은 성주의 엄한 훈계를 받고 머쓱해서 입을 다물었다.
뛰어난 용병술로 요동에서 이름을 날렸던 오골성주 마타골(馬他骨)이 잘 다듬어진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일단 일대를 보내 저들의 반응을 떠보는 게 좋겠습니다. 만일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한다면 그때 전군이 내달아 공격하면 될 겁니다.”
간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의견이 합당하구려.”
세문이 참지 못하고 재차 나섰다.
“선봉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반드시 고흘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간주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박작성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장군이 나서 주면 좋겠소.”
박작성주 하유개(荷有改)는 지난날 돌궐과의 전투에서 고흘의 휘하로 많은 공을 세웠다. 하지만 자신의 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변방의 성주로 파견되자 상관인 고흘을 원망했다.
하유개는 흔쾌히 명을 따르기로 했다.
선봉 자리를 빼앗긴 세문은 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휘하의 군사만으로도 군기 빠진 고흘의 군대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허락도 없이 야음을 틈타 수하 군사들과 함께 성을 빠져나갔다.
뒤늦게 보고를 받은 간주리는 화가 치밀었다. 이는 수풀을 흔들어 뱀을 달아나게 하는 일이었다.
환도성주는 급히 장수들을 소집했다.
“아무래도 작전을 앞당겨야겠소. 세문이 멋대로 군사를 끌고 성을 나갔다 하오. 하유개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그의 뒤를 쫓으시오.”
이렇게 해서 전격적으로 작전이 개시됐다.
성을 떠난 세문은 달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진압군의 진영으로 다가갔다. 고흘의 진영은 깊은 잠에 빠진 듯 고요했다.
세문이 신호를 보내자 군사들은 일제히 적진으로 쳐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막사는 텅 비어 있었다. 군사는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적막만이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세문은 그제야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군사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후퇴하라!”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별안간 주위에서 요란스레 북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횃불이 번뜩이더니 화살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세문의 군사들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화살 세례를 피해 도망쳤다. 그러나 많은 군사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화살 비의 제물이 됐다.
가까스로 몸을 피한 세문이 어두운 숲속을 지날 때였다.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났다. 세문은 진압군인 줄 알고 당당한 죽음을 각오했다. 그런데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하유개였다.
하유개는 세문 일행과 함께 서둘러 성으로 방향을 잡았다. 오솔길을 몇 마장이나 달렸을까? 길옆 수풀에서 함성이 들리더니 수많은 군마가 나타났다. 번쩍거리는 갑옷 사이로 고흘의 이름이 수 놓인 깃발이 펄럭였다.
하유개는 죽을힘을 다해 진압군을 헤쳐 나갔다. 그 모습이 마치 저승사자처럼 무시무시했다. 그의 험악한 기세에 눌린 진압군은 길을 열 수밖에 없었다. 난전이 벌어진 가운데 세문은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간신히 포위망을 뚫은 하유개는 환도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성 앞 벌판에 진압군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뒤를 따르는 몇몇 군사들과 함께 박작성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얼마쯤 달렸을 때였다.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한 떼의 군사가 길을 막아섰다.
우람한 체격의 장수가 군사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와서 외쳤다.
“여기서 너희를 기다린 지 오래다. 순순히 목을 내놓아라.”
복병이 나타나자 하유개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앞에 나타난 장수를 자세히 보니 의형제인 온영이었다. 온영은 장창에서만큼은 고구려 제일로 꼽히는 장수였다. 그는 고흘의 지시로 이곳에 매복해 있었던 것이다.
하유개는 이제 살았다 싶었다.
“아우님, 그간 잘 있었는가?”
온영이 놀라서 보니 의형 하유개였다.
“아니, 형님께서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하유개는 멋쩍어하며 목숨을 구걸한다.
“지금은 긴 얘길 할 때가 아니야. 자초지종은 나중에 들려주겠네. 우선 날 좀 보내 주게나. 살려만 준다면 박작성으로 돌아가서 식솔을 데리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겠네.”
온영은 어려운 시절 하유개에게서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다. 그가 장수로 등용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밀어준 은인이기도 했다. 그로서는 차마 하유개를 죽일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온영은 길을 내줬다.
“어서 가십시오. 진압군이 박작성에도 곧 들이닥칠 겁니다. 어디든지 빨리 피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하유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꽁무니가 빠지게 내달렸다. 그는 의제의 도움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일로 온영은 나중에 군법에 따라 처형을 당하게 된다.
싸움에 완패한 간주리는 더는 버틸 힘이 없었기에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고흘은 반군의 수장을 포박하여 도성으로 압송하는 한편 백성을 위로했다. 이렇게 해서 간주리의 반란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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