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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숙의 프랑스명소산책] 비련의 남자 달랑베르와 파리 오텔드빌
달랑베르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는 곳
센 강을 바라보는 중세 양식의 웅장한 건물
최인숙 필진페이지 + 입력 2024-10-15 06:31:10
 
▲ 최인숙 문화칼럼니스트·정치학박사
달랑베르는 성공한 계몽주의 작가였다. 사생아로 태어난 그가 환경을 초월해 이렇게 우뚝 선 것은 미래 세대에게 큰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는 출생과 관련된 정신적 결핍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겉으로는 호탕한 척했지만 내면에선 부모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항상 꿈틀거렸다. 그는 일생의 대부분을 아내도 자녀도 없이 살았다. 그의 정적 예수회는 그를 아버지 없는 작은 남자라고 불렀다.
 
그는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지 못했다. 육체적 쾌락에 무감각했고 집시라는 설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 여인을 사랑했다. 여류작가 쥘리 드 레피나스였다. 1754년 어느 날 데팡 부인의 살롱에서 그녀를 만난 달랑베르는 곧 사랑의 마법에 빠졌다. 이들은 20년간 사귀었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다. 그는 볼테르에게 쥘리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결혼이 아니라 상호 존중과 우정의 달콤함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 파리 오텔드빌 2층 창문 사이에 위인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파리시청
 
달랑베르는 쥘리의 영혼에 감탄했고 무엇보다도 자신과 같은 처지인 그녀에게 깊이 공감했다. 쥘리 역시 사생아였다. 달랑베르는 부모도 없고 가족도 없는 우리 둘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버림받아 불행을 경험했고, 자연이 우리를 찾아 세상으로 데려온 것 같다고 쥘리에게 이야기했다. 그 사랑은 쥘리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쥘리는 이모인 데팡 부인의 집에서 달랑베르가 중심이 된 일종의 유사 살롱을 운영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데팡 부인은 반역죄로 조카를 추방했다. 그러나 쥘리는 이에 지체 없이 복수했다. 그녀는 1764년 데팡 부인 친구들의 지원을 받아 파리 7구의 생도미니크 거리 한 모퉁이에 다른 살롱을 열었다. 그곳은 곧 파리에서 가장 핫한 장소가 돼 최고의 지성인들이 모여들었다
 
아카데미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던 달랑베르는 그곳에서 철학자들에 둘러싸여 모임을 지배했다. 쥘리의 살롱은 아카데미로 가는 가장 확실한 통로가 됐다. 그러나 쥘리와 달랑베르는 자신들에게 은덕을 베푼 데팡 부인에 대해선 배신자였다.
 
불행히도 달랑베르와 쥘리와의 관계는 평탄치 않았다. 쥘리는 우울증과 변덕이 심했다. 건강이 나쁜 달랑베르는 이를 매우 개탄스럽게 생각하고 불평했다. 결국 쥘리는 1776523일 사망했다. 달랑베르는 마지막까지 그녀를 따뜻하게 대했다. 하지만 그녀의 서류들을 정리하다가 큰 배신감을 느꼈다. 쥘리가 사랑한 다른 두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파리 오텔드빌의 달랑베르 동상. 파리시청
 
달랑베르는 쥘리에게 이렇게 불평했다. “잔인하고 불행한 친구, 당신의 마지막 정리를 내게 맡김으로써 당신은 내게 슬픔을 더 주고 싶었던 것 같군. 나는 지난 8년 동안 내가 더 이상 당신 마음의 첫 번째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어.”
 
쥘리가 떠난 후 달랑베르는 그녀와 함께 살던 집을 떠나 아카데미에서 제공한 아파트로 이사 갔다. 루브르 박물관 안뜰 한구석에 있는 이 아파트는 불편하고 우울했다. 하지만 이곳은 곧 전 유럽인이 찾는 최신 살롱이 됐다. 러시아 황태자가 북방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방문했고, 조제프 2세나 팔켄슈타인 백작도 그의 조언을 구하러 왔다. 대사·외국인·학자와 문인·공작부인 같은 저명한 여성들이 달랑베르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림은 그는 볼테르가 창시한 저명한 교회의 가시적인 수장이다고 말했고, 세귀르 백작은 우리는 왕자의 가장 확실한 호의보다 달랑베르의 칭찬 한마디를 더 선호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달랑베르는 노쇠해 갔다. 쥘리에 이어 친구 볼테르도 죽었다. 그는 종교적 광신주의 앞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볼테르 없이 어떻게 광신도들과 싸우고 이성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까. 그는 여전히 큰 힘을 가지고 있었고 주저 없이 그것을 사용했다. 그의 명성은 엄청났고 그 영광은 비견할 데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달랑베르는 끝까지 권위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아 모든 진보에 대해 폐쇄적이었다. 이런 가혹함은 살롱에서 밝고 상냥한 손님이었던 그의 이면이었다. 달랑베르는 자신이 믿어 온 모든 것을 위협하는 세대가 부상하고 계몽주의가 쇠퇴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적들과 타협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17831029일 달랑베르는 결석증으로 세상과 작별했다. 예수회는 그가 자신이 살았던 교구에 묻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달랑베르는 갈 곳을 잃었고 그의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 지금껏 아는 사람이 없다. 그가 죽었을 때 그가 몸담고 있던 아카데미에서는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교수이자 정치인 빌맹(Villemain)은 달랑베르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는 차가운 작가였다고 말했다. 출생의 그늘로 얼룩진 그의 굴곡진 삶에 대한 사후평가는 이렇게 잔인했다.
 
다행히 파리는 달랑베르를 기억해 줬다. 파리 오텔드빌(시청) 정면에 위대한 철학자의 동상들이 있는 장소에 그를 넣어 준 것이다. 파리 코뮌 이후 재건된 오텔드빌은 파리의 역사에 족적을 남긴 저명한 인물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건물로 정면에는 수많은 과학자·예술가·정치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파리 오텔드빌은 센 강을 바라보며 수도의 중심부에 웅장하게 서 있다. 14세기부터 시 정부 기관이 자리했던 이 상징적인 건물은 중세시대 상인 회장의 집이었다. 센 강을 이용해 배로 운송된 물품을 받던 곳이라 규모도 굉장히 크고 기품이 웅장하다. 이곳은 1871년 파리 코뮌 때 대부분 파괴됐다. 그러나 187482년에 재건됐다. 이전 건물과 르네상스 양식에서 크게 영감을 받은 외관은 16세기와 17세기의 스타일을 충실히 재현해 놓아 그 아름다움을 여전히 빛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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