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56]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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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3-05 06:30:20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도망자 신세가 된 기분이었다. 절름거리는 발로는 멀리 갈 수가 없었다.

설마 도망갔다고 절름거리는 학생을 잡아가겠나 싶어 인문관 앞으로 돌아 나오는데 경찰에 잡힌 한 학생이 목덜미가 잡힌 채 바닥에 다리가 닿은 상태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연행된 학생 수가 몇 백 명이었다. 회의가 밀려왔다. 치열하게 공부해서 들어온 학교였다. 툭하면 휴강이고 학교 안은 크고 작은 소음으로 몸살을 앓았다.

내로라하는 석학들의 수업을 기대했지만 그들이 가진 지식은 큰 감흥이 없었다. 성의 없이 시간만 때우는 건 아닌가 싶은 교수가 있었고 이게 대학 수업에서 들을 만한 내용인가 할 정도로 낮은 수준의 커리큘럼에 실망이 쌓여 가던 나날이었다. 그마저도 시위로 허구한 날 휴강이라 학교 가는 게 짜증 났다.

수업 못 한 날이 많은 상태에서 술이라도 마시려 근처 곱창집이나 순댓국집, 중국집에 모이면 경찰이 포위했다며 연행하기 일쑤였다. 변태섭이 발을 절뚝거리며 선배들과 순댓국집에서 술을 마시는데 경찰이 들이닥쳤다. 타는 목마름으로 한 곡 부른 게 연행 사유였다. 학번·학과명·이름을 쓰고 사진까지 찍혔다. 다신 불순한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 불법 집단행동 안 하겠다는 반성문을 쓰고서야 새벽에 훈방됐는데 나오면서 분노가 치밀었다. 밤새 발목 통증이 깊어진 상태라 분노는 더욱 커졌다. 에이, 씨발!

희숙은 변태섭을 본 지 대여섯 달이 지났는데 어제 만난 사이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전화로 목소리 듣기 전에 가슴이 뛰었던 것처럼, 만날 시각이 다가오자 가슴은 두 배로 뛰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처음 그를 봤던 날을 떠올렸다. 그의 뒷자리에 앉아서 찬송가를 부르는데 큰 목소리가 거슬렸는지 그가 몸을 돌려 힐끗 돌아봤다. 그는 희숙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은혜가 넘쳐 눈을 감고 두 팔 벌려 찬송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던지. 변태섭도 희숙도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확인했다. 변태섭은 몇 주 연속 예배에 참석했다가도 몇 주씩 불참하기도 했다. 이후로 예배 시간만 되면 희숙은 슬며시 변태섭이 예배하러 왔는지 확인하곤 했다. 변태섭은 희숙과 눈이 마주칠 때면 눈을 찡긋거리며 아는 체를 했다. 희숙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걸로 맞인사를 했다.

희숙은 부산이 아닌 서울에서, 교회가 아닌 카페에서 그를 보자 익숙한 얼굴임에도 낯설게 느껴졌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만났건만 변태섭은 희숙에게 밥은 먹었냐고 물었다. 밥은 먹었냐, 는 한마디에 조금 전 낯선 느낌은 오래된 사이처럼 이내 편안해졌다. 변태섭의 하얀 얼굴은 여름에 봤던 것보다 까칠해져 있었다. 짐작건대 그는 평범한 대학생이 아닌 게 분명했다. 비장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그랬다. 희숙이 선배라고 불러도 되냐,고 물었다. 당연하지, 선배 맞잖아. 변태섭 얼굴에 그의 대답처럼 짧고 간결한 미소가 스쳤다. 변태섭이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봤다. 바쁜 일이 있으면 가셔도 된다, 했더니 변태섭이 뜬금없이 물었다.

터미네이터 봤어?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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