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57] 단성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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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3-06 06:30:05

어머니 살아계실 때 가족과 ‘벤지’라는 영화를 보고, 중학교 때 단체로 ‘죠스’, 친구와 ‘라붐’을 본 게 전부였다. 희숙의 청소년기는 어머니를 대신해 가족을 챙기고 공부에 매진하는 것 말고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은 전부 호사였다. 변태섭은 영화를 보러 가는 동안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구간마다 짧게 설명했다. 여긴 아현 사거리야, 충정로야, 서소문이야, 광화문이야. TV에 제일 많이 나오는 곳이지. 다음이 종로, 우린 종로 3가에서 내릴 거고. 변태섭은 버스가 흔들릴 때, 버스에서 내릴 때, 두 번 희숙의 손을 잡았다.

감정은 없고 배려뿐인 접촉이었지만 희숙은 그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변태섭이 영화 보는 중간에 희숙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뿌리치는 건 맘에 없는 짓이고 가만히 놔두는 건 헤퍼 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뿌리치면 변태섭이 무안할까 봐, 다신 희숙을 만나려 하지 않을까 봐 손을 그에게 맡겼다. 영화가 끝나고 변태섭은 희숙을 데리고 단성사 옆 중국집으로 데려갔다. 여기가 서울에서 물만두랑 옛날짜장이 가장 유명하다는 곳이야. 특히 물만두가 다른 집이랑 달라. 입에서 터질 때 나오는 육즙이 끝내 줘. 단무지에 식초를 듬뿍 뿌리면서 그가 말했다.

짜장면이 나와 희숙은 긴 머리칼이 음식에 닿지 않도록 머리칼을 돌돌 말아 위로 올렸다. 익숙하게 젓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고정했다. 변태섭은 희숙의 귀 옆으로 긴 머리카락 흘러내린 몇 가닥을 쓸어 귀 뒤로 넘겼다. 영화관에서 잡은 손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손길이 닿자 희숙의 심장이 미세하게 떨렸다. 변태섭은 중국집을 나와 종로 2가 쪽으로 내려갔다. 그를 졸졸 따라다니는 희숙의 모습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는지 변태섭은 희숙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종로 2가 골목 어딘가로 가더니 변태섭은 희숙의 손을 잡고 황금장이란 간판이 걸린 건물로 들어갔다. 변태섭은 황금장 프런트에서 열쇠를 받은 뒤 다시 희숙의 손을 잡고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갔다. 길을 걷다가 골목으로 빠졌고, 거기서 모텔을 발견하곤 열쇠 받아 2층으로 올라가기까지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이었다. 게다가 변태섭의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희숙이 따져 묻는다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흰 침대와 맞은편에 놓인 TV, 그 옆에 작은 화장대가 보였다. TV 앞에는 물통이 있었고 수건과 일회용 칫솔이 놓여 있었다.

변태섭은 멀뚱하게 서 있는 희숙의 코트를 벗겨 주며 말했다. “괜찮아, 그런 거 아니야, 어제 잠을 못 자서 피곤했어. 잠깐만 쉬었다 가자” 안심해도 된다는 눈빛을 보였다. 희숙은 여전히 신발을 벗지 못하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보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변태섭이 피식 웃으면서 계속 거기 서 있을 거야? 입가에 흐르는 미묘한 그 미소는 분명 ‘촌스럽다’는 형용사를 동반한 일종의 야유였다. 변태섭은 엉거주춤 신발을 벗고 들어온 희숙의 손을 낚아채듯 당기더니 침대 위로 앉혔다.

“촌스럽게 왜 이래.”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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