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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5시 반 워싱턴 D.C. 주재 소련 대사관에...'))
1985년 11월4일 오후 5시 반 워싱턴 D.C.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이례적으로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선별적으로 초대된 AP 통신 등 외신기자 50여 명이 모였고 미국 CNN이 생방송했다. 기자회견장에 직접 나온 유르첸코 대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 요원들에 의해 로마에서 강제로 납치되어 약물을 투여받고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미국으로 왔다. 끔찍한 3개월 동안 버지니아주 중앙정보국(CIA) 안전가옥에 갇혀 있었고 CIA가 경계를 늦춘 틈을 타서 11월2일에야 탈출할 수 있었다. 나는 결코 미국에 망명한 것이 아니다. 소련의 비밀을 CIA에 제공한 적이 없으나 약물을 투여받은 동안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그는 러시아어와 유창한 영어를 섞어 가며 당당하게 그간의 일을 말했다. 이 사건으로 비밀로 묻혀 있던 유르첸코의 미국 망명이 공개되어 버렸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납치·약물 투여 등은 “완전히 거짓이며 근거가 없다”고 즉각 부인했다.
이를 지켜본 백악관과 CIA는 깊은 충격에 빠졌다. 3개월 전에 미국으로 망명해 온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고위 간부가 소련 대사관으로 재탈출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KGB에서 25년 근무한 고위 간부 비탈리 세르게예비치 유르첸코(Vitaly Sergeyevich Yurchenko) 대령이었다. 망명 당시 50세였다.
그는 1936년 생으로 1955년 소련 해군에 입대해 잠수함 항해 장교로 근무했다. 1960년 KGB에 발탁되었고 흑해 함대 KGB 파견대에서 방첩 및 보안 업무를 수행했다. 1968년에는 이집트 해군을 지원하는 군사고문단의 일원으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파견되어 지중해에서 작전 중인 미국과 서방 국가들의 해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해외에서 여러 임무를 탁월하게 수행한 경력을 인정받아 1972년 해외공작 업무를 담당하는 KGB 제3국 3부에서 근무했다.
1975년 유르첸코는 미국 주재 소련 대사관에 파견되어 아내 자네타와 함께 워싱턴 D.C.에서 5년간 근무했다. 그는 보안담당관으로 대사관에 근무하는 모든 외교관과 정보요원들을 감시하고 미국 및 서방 정보기관들의 침투 공작을 막는 방첩 업무를 지휘했다. 이때 대사관 무역담당관의 부인인 스베틀라나 데트코바와 사귄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금발의 미인인 소아과 의사였다. 캐나다로 발령 난 남편 때문에 그녀가 워싱턴을 떠나자 유르첸코는 방첩 업무를 빙자해 국경을 넘어 수시로 토론토를 드나들며 데트코바와 밀애를 나누었다.
1980년 유르첸코는 모스크바로 돌아와서 내부의 이중 스파이와 누설자를 색출하는 일을 포함한 여러 가지 업무를 담당하는 KGB 해외정보총국 내 방첩전담부서의 책임자가 되었다. 1985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해 미국과 캐나다를 담당하는 해외정보총국 제1부의 정보작전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업무상 미국과 캐나다 등에 침투한 KGB 요원과 협조망을 다 파악하고 있었다.
1985년 7월24일 유르첸코는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하여 도시 외곽에 있는 소련 대사관에 머믈렀다. 그가 로마에 온 것은 4월에 스페인에서 실종된 소련의 핵과학 전문가인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 사건과 관련한 회수 공작 임무 때문이었다. 7월28일 아침 유르첸코는 바티칸 박물관에 다녀오겠다고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미국대사관으로 향했고 망명을 신청했다. 그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CIA는 KGB 파괴 작전이 절정에 오른 양 대환영했다. 반면 KGB는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신뢰했던 핵심간부의 망명은 KGB 보안시스템에 중대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 크나큰 위기였다.
유르첸코는 버지니아주 비엔나에 있는 CIA 안전가옥으로 이동해 심문을 받았다. 심문 도중 그는 전 CIA 요원인 에드워드 리 하워드와 전 국가안보국(NSA) 분석가인 로널드 펠튼을 KGB의 스파이로 지목하는 등 엄청난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수십 개의 미제 간첩사건을 해결토록 하였고 KGB의 최신공작 수법도 알려 줬다. 예를 들면 모스크바에서 활동하고 있는 CIA 요원들에게 의도적으로 방사성 스파이 먼지를 뿌려 그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수법 등이다. 이례적으로 윌리엄 케이시 CIA국장은 유르첸코를 여러 번 만나 브리핑을 들었고 두 차례나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유르첸코는 망명 직후 캐나다행을 요구했다. 캐나다 주재 소련대사관 무역담당관의 부인인 연인 데트코바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유르첸코는 알렉스(Alex)라는 코드명으로 활동하며 미국 여권을 가지고 CIA 요원들의 보호 아래 토론토에 가서 그녀를 만났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과 두 딸을 떠나 유리첸코와 결합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와의 안정적 결합을 위해 부인과 16세 아들까지 버리고 망명까지 단행했던 그는 절망했다. 이때부터 유리첸코의 심리 상태는 매우 불안정했다.
유르첸코는 11월2일 워싱턴 D.C.의 조지타운에 있는 프랑스 레스토랑인 오 피에 드 코숑(Au Pied de Cochon)에서 CIA 담당요원과 저녁식사를 했다. 그 요원은 불과 며칠 전에 배치된 젊은 요원이었다. 그는 자신이 5년간 워싱턴 D.C.에서 근무해서 잘 아는 식당이라며 그곳에서 식사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식사 중 CIA 요원에게 웃으며 “내가 일어나서 나가면 어떻게 할 거야. 날 쏠 거야?”라고 물었다. 그리고 젊은 요원에게서 “아니다, 여기는 미국이다”는 대답을 듣고는 농담처럼 말했다. “15~20분 후에 돌아오겠다. 혹시 내가 오지 않더라도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야.”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나온 그는 화장실 뒤편으로 나와 몇 블록(반 마일) 떨어진 소련대사관으로 도주했다.
유르첸코가 11월6일 소련 여객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후, 미국 ABC 저녁 뉴스에서는 토론토에서 데트코바가 전날 저녁 아파트 건물 27층에서 떨어져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11월19일 소련과의 제네바 정상회담을 앞두고 전날 기자들에게 “이것이 고의적인 계략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증명하거나 반증할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유르첸코는 귀국 후 KGB에서 근무하다 퇴직하였고 아직 그의 사망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불륜이지만 사랑 때문에 망명했고 사랑이 깨져 재망명한 유르첸코는 냉혹한 스파이 세계에도 감정이 남아 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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