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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아빠 엄마 이야기…엄마의 싸움(교육)과 아버지의 노름③
어머니, 노름하는 아버지 탓에 ‘죽을 생각도’
자식 결혼할 때쯤 완전히 손 떼고 새 삶 찾아…지금은 감사한 마음
대통합 필진페이지 + 입력 2017-04-14 15:22:02
 ▲ [사진=국민대통합위원회]
그런데 엄마는 줄지어 딸을 셋을 낳았고 그 셋째가 바로 나다. 내 동생은 아들 넷 딸 둘인데 그중에 아들(종원) 하나가 또 죽었다.
 
그 아이는 너무 많이 아파서 동네 할머니가 도랑에서 가재를 잡아와서 끓여 먹이라고 했는데 나는 동생이 아프지 않게 하겠다는 마음에 가재를 많이 잡아와서 펄펄 끓여서 그 국물을 아주 많이 먹였다.
 
그걸 먹고 난 후에는 그 아이가 열이 너무 심해서 용하다는 다른 마을 할머니한테 업고 가는 중에 엄마 등에서 영원히 오지 못하는 천국으로 가버렸다.
 
엄마는 도랑을 건너오다가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면서 손으로 땅을 짚었는데 손목이 뚝 부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엄마는 그 다친 손 때문에 밤에 잠을 잘 못 잤고 우리가 알면 마음 아플까 봐 계속 말로는 안 아프다고 하면서 억지로 아픔을 참고 이불 속에서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그때 덜렁거리는 손목을 급히 붙이느라 부러진 뼈가 잘못 붙었기에 한쪽으로 치우쳐 뼈가 겉으로 툭 튀어져 나온 채로 완치가 됐다. 자식이 아플 때는 업고 뛰어가면서 고쳐보겠다고 하더니 엄마 몸이 으스러져도 병원에 가지 않고 그렇게 아픔을 견디면서 우리를 키우셨다니 이것이 웬 복이며 은혜인가.
 
자식이 객지에 나가 공부를 할 때는 농산물을 뭉치뭉치 싸서 한 보따리를 만들어서 머리에 이고 등 넘고, 산 너머, 물 건너 그 자식과 짐 보따리를 시외버스에 실어놓고는 자식과 같이 가던 길을 혼자 돌아가서 자식한테 연락 오기를 나날이 기다리는 엄마. 그때는 전화도 없고 연락할 길은 오직 도착해서 잘 왔다는 편지 하나가 올 때까지는 애태우며 기다려야만 했던 우리 엄마….
 
이렇게 힘이 들 때도 우리 아버지는 노름했고 집에 오면 마당 쓸지 않았다고 회초리로 때리면서 우리를 괴롭혔다. 변소에 있다가도 아버지가 부르면 벌떡 일어나서 뛰어와야 하는데 좀 늦으면 맞았다.
 
어린 마음에 나는 우리 집이 싫었고 동네가 창피해서 사람들 앞을 지날 때는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죄인처럼 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면소인지 도청인지 사람들이 와서 엄마한테 효부상을 주겠다고 형편을 확인하려 누군가가 왔을 때 엄마는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이 당연한데 내가 상을 받는다는 것은 가당찮다고 하면서 받을 수 없다는 칼 같은 말로 단호하게 거절을 하셨다.
 
이렇게 살아오신 엄마 앞에 우리 팔 남매는 머리가 스스로 숙어지고 겸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엄마가 노름하는 아버지를 돌이킬 방법이 없고 집에 먹을 것이 없으니 쫄쫄 굶고 있는 시어른과 자식들을 바라보니 너무 힘들어 언덕에 떨어져 죽으면 남편이 노름을 끝낼까 하고 산 중턱쯤 갔을 때 할아버지가 뒤따라오면서 ‘야 원어마! 나 좀 봐라 너가 가면 나는 죽는다.
 
야야 가지 마라. 이 아이들이 있는데 어딜 가냐 나를 봐서 가지 마라’하는 말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할아버지의 뒤를 힘없이 따라와서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겠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시어른과 자식에 대한 사랑과 희생이 있기에 또 살아보기로 다짐했겠지. 담배 농사를 하는 엄마는 낮에는 담배 나무에서 잎사귀를 뜯고 한밤에는 담배를 새끼줄로 하나씩 엮어야 한다.
 
엄마가 졸지 않고 정신이 있을 때는 담배를 잘 엮고 있는데 잠이 와서 졸면서 엮을 때는 이때까지 엮어두었던 것을 모두 다 하나하나 빼는 작업을 하기 때문에 엄마가 담배 엮는 것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우리는 엄마의 수고가 마음에 걸리고 우리 자식들은 손을 더 빨리 놀려서 끝내려고 힘껏 돕지만, 어린것들이 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일을 끝내면 동네 사람들은 다 조용히 잠들었고 우리 식구들은 일에 묻혀 사는 것이 전부이며 오직 일뿐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엄마는 우리를 공부시키겠다고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고 남들보다 늦게 잠들었다. 
 
길을 걸어가면서 졸고 있던 우리 엄마는 고픈 배를 움켜잡고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리려고 나물 뜯어 죽을 끓이고 남들보다 백배 고생을 하면서도 얻어먹는 사람이 오면 없는 옷이지만 우리 것을 나눠주면서 섬김의 본을 보여주시고 우리에게는 바로 산 교육자였다.
 
그 옛날에 엄마가 부르던 노래는 ‘연탄 백탄 타는 데는 연기가 폴폴 나고요 오 이내 가슴 타는 데는 연기도 김도 안 난다’. 나는 지금도 이 노래를 엄마랑 함께 불러보기도 한다.
 
그 당시에는 우리가 고등학교에 가려면 도시로 나가야 했다. 엄마는 아버지와 싸워서 나를 서울에 있는 언니한테로 보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 상업고등학교를 들여보내려고 언니들과 편지를 주고받더니 결국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도 엄마랑 아버지는 싸웠다. 아버지는 가시나들은 공부시키면 안 된다고 큰소리치고 불호령을 했다. 엄마는 내가 방티 장사를 해서라도 아이들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두 사람은 맞서서 싸웠다. 나는 무서워서 벌벌 떨고 방구석에 앉아 있었지만, 엄마는 여자라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싸웠다.
 
배워야 하는 이유는 사람답게 살기 위한 것이며 예를 들자면 도둑이 집에 와서 다 훔쳐가도 머리에 들어있는 지식은 훔쳐갈 수 없으니까 머리에 든 것이 있어야 살수 있다고 했다. 나도 엄마 생각이 맞는 것 같고 아버지랑 싸웠지만 공부하고 싶은 마음으로 기뻤다.
 
엄마는 내가 서울 가던 날 신신부탁을 했다.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과 남의 것을 탐내지 말고 가지고 싶으면 열심히 해서 정당하게 내 것으로 만들어라 그런 말을 명심하고 나는 내일이면 가야 하는데 절대로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그래도 가야 한다.
 
서울에는 모든 것이 새롭고 전차 다니는 것도 겁이 날 때 엄마는 왜 나를 이렇게 위험한 곳에 보냈을까 하고 의문이 생긴다. 어느 날 처음으로 외삼촌 집에 갔는데 변소에 가야겠기에 외숙모한테 물어보니 집 안에 있는 화장실을 가르쳐 주셨다.
 
나는 이런 화장실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와 보았기에 어리둥절해서 어디에다가 변을 보아야 하는지를 몰랐다. 도대체 알 길이 없다. 그때 변기를 보니 아주 깨끗한 물이 담겨있고 세면기에는 안 될 것 같고 욕조는 볼일 보면 더욱 안 될 것 같고 아무리 찾아봐도 대변 볼 때가 없기에 나는 급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수도꼭지 밑에 보니 하수구가 있었다.
 
그 순간 아 여기에서 보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곳에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누고 난 후에 대변을 손으로 부숴서 하수구 구멍으로 밀어 넣고 물을 틀어 변을 내보내면서 아니 서울 사람들은 애 이렇게 화장실을 사용할까 도대체 변은 어떻게 하는 걸까 혼자 의문을 가졌지만
 
나는 외삼촌과 숙모한테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고 나중에 변기 쓰는 방법을 알고 난후에는 얼마나 부끄러운지 아무한테도 말할 수가 없었다. 이런 촌년을 엄마는 교육시키겠다고 사람답게 살라고 배움의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었다. 이 세상에 엄마들이 칠억 만 명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 엄마같이 위대하신 분은 한 사람도 없을 거로 생각한다.
 
내가 결혼할 때쯤에 아버지는 노름에서 손을 떼시고 확실하게 헤어나셨다. 아버지는 지난날들을 깊이 있게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계시는 내 아버지야말로 정말 멋진 분이셨다.
 
결단력은 좀 부족했지만 늦게나마 노름에서 손을 떼고 나서는 농사일도 열심히 하고 보이지 않게 잔잔한 모습으로 아버지의 위치를 회복하셨기에 나는 더 좋은 딸이 되도록 노력하고 항상 아버지를 아버지로 존경하리라 다짐했다.
 
엄마가 내 엄마인 것과 아버지가 내 아버지임을 오늘도 감사하고 그 부모님이 보여주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굳건히 살아내신 것들이 어찌 그리 좋은지요. 아름다운 것들을 내 마음에 품고 살아가려 한다. 그 어느 날 아버지 팔순 때 짧은 글을 썼는데 그것을 내가 적어 보기로 한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팔순을 맞이해 우선 팔십년 동안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팔십년 동안 그 많은 풍파를 겪으시면서 살아오시느라 얼마나 애쓰셨습니까?’
 
우리 팔 남매는 오늘 아버지께 감사의 마음으로 큰 박수를 보내 드립니다. 이 우주 공간에 단 한 분뿐이 안 계시는 우리 아버지, 아버지라는 이름만 생각해도 보고 싶었을 때가 있었던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식이지만 그래도 마음으로 지켜봐 주시고 기다려주신 우리 아버지 자식들이 때로는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적도 있었지만 그런 것들은 아버지의 마음속에 사랑으로 변했지요. 그 많은 날을 참느라고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염치없지만 시마다 때마다 감사드리며 사랑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아무런 값도 치르지 못한 채 나 스스로 세상에 태어난 것처럼 버릇없이 살아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아버지! 6.25전쟁과 보릿고개라는 이름으로 인해 배고픔으로 아주 힘들었지만, 그때에도 자식 하나 버리지 아니하시고 하나같이 키워서 막내까지 짝지어 주신 우리 아버지 감사할 일이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글로 적으려면 감사와 후회되는 일들이 끝이 없지요. 우리는 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생각하면서 나 하나 살아가는 데만 바빴기에 아버지 돌아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고마우신 아버지 널리 용서하시고 이때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변함없는 사랑으로 덮어주십시오.
 
아버지! 자식들 때문에 행여나 섭섭한 마음이 있으면 이 시간 이후로 다 털어버리시고 남은 생애를 오직 기도와 간구로 좋으신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를 많이 공경하고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넉넉한 마음으로 예수 안에서 순종을 배우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소원이 있다면 예수 잘 믿으십시오. 이 길만 이 생명의 길이며 참 평안의 길입니다. 사시는 날까지 평안하시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오늘 우리 집에서 맛있게 잡수시고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는 우리 팔 남매에게 마음껏 축복해주십시오. 생명 끊어지는 날까지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셋째 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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