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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수의 新삼국사 산책
고구려 복속을 선택한 소지왕
장수왕의 세 차례 신라 공격과 파장
정재수 필진페이지 + 입력 2022-12-23 09:02:41
 
▲ 정재수 역사작가.
     
소지왕은 서기 481년과 484년, 489년 등 세 차례에 걸쳐 고구려 장수왕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는다. 장수왕은 481년(1차) 호명성(경북 청송) 등 주변 7개 성을 공략하며 내친걸음으로 경주도성 인근 북쪽의 미질부(경북 흥해)까지 밀고 내려갔다. 484년(2차) 모산성을 공략하고, 489년(3차) 호산성(경북 영덕)을 공격한다. 고구려의 공격 지역은 모두 신라의 경북 내륙지역이다. 다만 전쟁 성격은 전면전이 아닌 부분전(국지전)으로 전개됐다.
 
신라 공격의 도화선 비열홀
 
장수왕의 신라 공격 배경은 비열홀(比列忽) 점령 실패가 직접적인 도화선이다. 장수왕은 1차 공격 5개월 전인 서기 480년 11월 말갈을 동원해 신라의 비열홀 점령을 시도하다 실패했다. 비열홀은 과거 동예가 소재한 곳으로 지금의 함경도 안변이다. 신라 수도 경주에서 북쪽으로 수백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구려 영토 내에 존재한 신라의 외딴 섬이다.
 
비열홀은 시조 박혁거세의 출자와 관련이 깊다. 아버지 혁서거(奕西居)의 고향이 바로 비열홀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신라는 건국 초부터 비열홀을 중시하며 관리와 지키기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기림왕의 경우 서기 300년 2월 친히 비열홀을 순행해 몸소 나이 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곡식을 차등 있게 내려주기도 했다. 소지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비열홀이 장수왕의 공격을 막아내자 481년 2월 직접 방문해 군사들을 위무하고 군포까지 하사했다. 
 
▲ 남미질부성(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전경.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1차 호명성 공격 전개 과정
 
장수왕은 비열홀 점령에 실패하자 전격적으로 신라 공격을 명했다. 장수왕의 1차 공격에서 세 차례 전투가 벌어졌다. 첫 번째 전투에서 고구려는 신라의 호명성(狐鳴城·경북 청송) 등 주변 7개성을 공취한 것으로 끝났다. 두 번째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미질부(彌秩夫·경북 포항 흥해)까지 밀고 내려오자 소지왕은 급히 백제·가야와 함께 연합군을 구성해 고구려군을 저지했고, 세 번째 전투는 물러나는 고구려군을 뒤쫓아 니하(泥河·정선 동강)까지 치고 올라가 혈전을 벌였다.
 
‘신라사초’ <소지명왕기>이다. ‘3년(481년) 금계 신유 3월, 고구려와 말갈이 호명 등 7개 성을 약탈했다. 미질부로 진군해 오자 군주 오함(烏含)이 북로장군 벌지(伐智), 서로장군 덕지(德智), 부여(백제)장군 진로(眞路), 가야장군 산호(山戶)와 함께 길을 나누어 방어하고 패퇴하는 적을 니하의 서쪽까지 추격해 크게 쳐부수었다. 천여 급의 목을 베고 사람·말·병장기를 무수히 포획했다(高句麗末曷 掠孤鳴七城 以進軍彌秩夫 軍主烏含 與北路將軍伐智 西路將軍德智 扶余將軍眞路 加耶將軍山戶 分道禦之 賊敗退 追擊泥河之西 大破之 斬首千余級 捕獲人馬兵仗甚衆).’ 다만 기록은 니하 전투에서 신라가 천여 명의 고구려군 수급을 벤 것으로 나오나, 고구려측 기록인 ‘고구려사략’ <장수대제기>는 고구려가 신라연합군 천여 명의 수급을 벤 것으로 나와 대조를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는 ‘신라사초’ 기록을 따랐다.
 
2차 모산성과 3차 호산성 공격
 
고구려의 2차 공격은 484년 7월 신라의 모산성(母山城)을 점령하며 전투가 벌어졌다. 모산성을 ‘삼국사기’ <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은 전북 남원 운봉의 아막성(阿莫城)으로 비정하나 당시 고구려가 전북 남원까지 내려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충북 진천의 대모산성(大母山城)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확실치 않고, 경북 내륙지방에 소재한 성으로 추정된다. ‘신라사초’ <소지명왕기>이다. ‘6년(484년) 목서 갑자 7월, 덕지와 모대(동성왕)군이 고구려 병사를 모산성에서 크게 쳐부수었다(德智與牟大軍 大破麗兵于母山城).’ 신라는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군을 무찔렀다.
  
▲ 장수왕의 신라 공격 전개도. [사진=필자 제공]
  
마지막 3차는 489년 9월 호산성(狐山城) 전투다. ‘삼국사기’ 소지마립간 조이다. ‘11년(489년) 가을 9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습격해 과현(戈峴)에 이르렀다. 겨울 10월, 호산성(狐山城)이 함락됐다(高句麗襲北邊至戈峴 冬十月 陷狐山城).’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과현(戈峴)을 거쳐 신라 호산성을 함락한 것으로만 적고 있다. 과현은 지금의 경북 영주이며 호산성은 경북 영덕이다. 그러나 ‘신라사초’ <소지명왕기>는 ‘지불로가 성산, 가두 등에게 다시 공격을 명하니 고구려인이 성을 불태우고 도주했다(智弗路命 城山賈頭等 進攻复之 麗人焚城而走)’고 적고 있다. 고구려는 호산성을 점령하지만 재차 신라의 공격을 받아 패퇴했다.
 
신라 공격의 본질은 고구려 속국화
 
장수왕의 세 차례 신라 공격은 비열홀 점령 실패로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도화선이지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그렇다면 장수왕은 무슨 연유로 신라를 집중 공격하며 압박강도를 계속해서 높였을까?
 
단서는 3차 호산성 전투이후 소지왕이 취한 태도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고구려사략’ <장수대제기>이다. ‘비처(소지왕)가 사신을 보내 보옥을 바치고 옛날처럼 조공할 터이니 영원토록 생자(甥子)로 삼아 달라 청했다(毗処遣使來献宝玉 請修旧貢永為甥子).’ 생자는 사위와 아들을 말한다. 소지왕은 장수왕에게 중단한 조공의 재개를 선언하며 고구려의 사위와 아들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고구려의 속국으로서의 신라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천명한 셈이다.
 
장수왕의 신라 공격은 탈고구려화를 지향한 소지왕에 대한 응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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