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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절개와 의...'))
신라로 돌아온 급리는 왕에게 승전을 보고하고 장수들의 전공을 품했다. 홀해왕은 기쁜 마음으로 논공행상했다. 모든 장수가 자신의 공에 걸맞은 상을 받았다. 그런데 가장 공이 컸던 물계자에게는 어떤 상도 내려지지 않았다.
공을 인정받아 아찬으로 승급한 강세는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물계자를 찾아갔다. 물어물어 찾은 집은 도성 밖 산기슭에 자리한 낡고 볼품없는 누옥이었다.
물계자는 연락도 없이 찾아온 손님을 반갑게 맞이했다. 주인에게 이끌려 방 안으로 들어서니 불기 없는 바닥에 기운 이불 한 채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술상을 들고 들어온 아내의 행색 역시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강세의 입에서 탄식이 절로 나왔다.
좌정하고 나서 물계자의 안색을 살폈다. 울분을 달래고 있을 줄 알았더니 평온하기만 했다.
강세는 물계자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알기로 이번 싸움에서 네 공이 가장 컸다. 그런데 전공첩에는 기록조차 되지 않았어. 솔직히 원망하지 않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찌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는 분명 이찬이 농간을 부린 게야. 폐하께 고하여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나!”
물계자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공을 자랑하고 이름을 구하는 것은 지사(志士)의 일이 아닙니다. 저는 의당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고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습니다.”
강세는 물계자의 고결한 인품에 다시 한 번 탄복했다.
이후로 두 사람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교류하며 친분을 나누었다.
3년의 세월이 흘렀다. 골포국 거수 천영은 지난 승점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장수와 군사들을 기리는 제사를 지냈다.
천영은 제물을 태우면서 하늘을 우러러 맹세했다.
“기필코 신라를 쳐서 그대들의 한을 풀어 주겠다.”
천영은 지난날 함께 싸웠던 나라들에 사신을 보내 신라를 칠 것을 호소했다. 가락국과 인접해 있는 칠포국의 거숭과 지난 전투에서 큰 상처를 입은 후로 이를 갈고 있던 사포국의 열호만이 함께하겠다는 답을 보내왔다. 그 밖의 나라는 아직도 패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에 거병을 꺼렸다. 천영을 비롯한 삼국의 거수는 비밀리에 회합하고 앞일을 의논했다.
거숭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육로로 신라를 치기 위해서는 먼저 가락국부터 상대해야 하오. 그렇게 되면 두 나라가 합세하여 우리를 공격할 테니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소.”
열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거숭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달리 생각해 놓은 계책이라도 있소?”
“뱃길을 이용해서 기습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오.”
“저들의 간자가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소. 우리가 아무리 은밀하게 일을 진행해도 저들에게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요.”
걱정하는 천영과 달리 거숭은 여유가 있었다.
“성동격서(聲東擊西)를 하면 됩니다. 신풍성을 쳐서 시선을 끈 다음 신라의 금성으로 바로 쳐들어가는 겁니다.”
누가 들어도 빼어난 계책이었다. 천영은 열호를 보며 물었다.
“거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기대를 해 봐도 좋을 듯합니다. 제가 신풍성으로 갈 테니 두 분께서는 금성으로 가십시오.”
열호가 솔선수범하니 결론이 쉽게 났다.
사포국 거수 열호는 작전대로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가락국의 신풍성으로 쳐들어갔다. 사포군이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이 도성에 전해졌다. 이시품왕은 비언을 보내 막게 하는 한편 신라에 병란을 알렸다. 이를 듣고 내해왕은 급리에게 군사를 주어 가락국으로 보냈다. 이때까지의 상황만 봐서는 3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신라군의 출병을 확인한 천영은 선단을 이끌고 저내포로 상륙하여 갈화성으로 진격했다. 이쪽이 금성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갑작스러운 포상국의 침입에 놀란 갈화성주 상목(相穆)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일절 대응하지 않았다. 골포군과 칠포군은 양로로 성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갈화성은 도성을 지키는 요새답게 가파르고 견고해 공략하기 어려웠다. 화살과 돌덩이에 맞아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가운데도 성벽을 기어올랐지만 양국의 군사들은 결국 실패하고 물러나야 했다.
한편, 갈화성이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흘해왕은 소매를 떨치고 일어섰다.
“변방의 소국들이 겁도 없이 우리 땅을 침범하다니! 내 따끔한 맛을 보여 주리라!”
왕은 강세 등의 장수들과 함께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갈화성으로 달려갔다.
이때 물계자는 강세의 아장으로 자원 참전했다. 그는 비록 미천한 신분이었지만 군사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다. 신라군이라면 누구나 그가 뛰어난 장수이고 훌륭한 공을 세웠다는 것을 인정했다.
포상군이 고전하는 사이 흘해왕의 군대는 갈화성에서 10여 리 떨어진 굴아화촌(屈阿火村)에 당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천영은 공성을 멈추고 거숭과 머리를 맞댔다.
“우리는 이미 기습의 이(利)를 잃었소. 저들과 정면으로 부딪쳐 봤자 승산이 없소.”
거숭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계책을 써서 저들을 속여야겠소. 먼저 군사들에게 허수아비를 만들게 하시오. 아군의 수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면 저들도 함부로 공격해 오지는 못할 것이오. 나는 어둠을 틈타 신라군의 후방으로 돌아가겠소. 내가 북을 쳐서 신호를 보내면 그때 양편에서 협공하도록 합시다.”
천영은 허수아비로 허장성세를 취했다.
어둠이 내리자 칠포군은 말방울을 떼고 입에 매를 문 채 신라군 진영을 우회해 갔다.
다음 날 갈화성 앞에 이른 흘해왕이 적진을 살펴보니 적군의 수가 만만치 않았다.
왕이 장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도적의 군세가 강하니 적정을 살핀 후에 싸우도록 합시다.”
회의를 마친 강세가 막사로 돌아오자 물계자가 다가와 의문을 제기했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적군의 수가 예상보다 너무 많습니다. 이는 필시 저들의 속임수일 겁니다. 제가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물계자는 휘하의 기병을 거느리고 적진으로 달려갔다.
천영은 신라의 군마가 진영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장군 창우(昌尤)를 보내 막게 했다. 창우는 지난 전투에서 죽은 삼우의 동생으로 형의 복수를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물계자를 알아본 창우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오늘 기필코 너의 목을 끊어 형님의 영전에 바치리라!”
물계자는 당당한 태도로 응수했다.
“전장에서 목숨이란 초개(草芥)와 같은 것이다!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니 영광이라 생각하거라!”
창우는 두말하지 않고 창을 꼬나든 채 물계자에게 달려들었다. 수십 합이 오가면서 굴포 장수의 창끝이 차츰 무뎌졌다. 물계자는 쉴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창우가 물계자의 창을 피해 뒷걸음치다 보니 어느새 자기네 진영까지 밀려와 있었다. 이를 보고 있던 굴포 군사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수세에 몰린 물계자는 급히 몸을 빼내 자기 진영으로 돌아왔다.
천영은 쫓아 나가려는 군사를 멈추게 한 후 다시 대오를 정비했다. 때가 오기 전까지는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적진을 살피고 귀환한 물계자는 강세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저들은 허세를 꾸미고 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허수아비에 군복을 입혀 놓았습니다.”
“그럼 당장 쓸어 버려도 되겠구나.”
강세는 쾌재를 불렀지만 물계자는 여전히 찜찜한 게 있었다.
“그게 다는 아닌 듯합니다. 당장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위장이라면 저리 침착할 수 없습니다. 이는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겁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숨겨 놓은 일대가 아군의 후위를 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고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강세는 물계자의 우려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때를 기다리던 거숭은 해가 중천에 걸리자 공격을 개시했다. 칠포군이 북을 치면서 신라 진영으로 쳐들어가 보니 막사는 텅 비어 있고 신라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일이 잘못됐음을 직감한 거숭은 재빨리 그 자리를 빠져나가려 했다. 이때 사방에서 함성이 들리더니 매복했던 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거숭의 군사들은 죽을힘을 다해서 싸웠지만 신라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거나 항복했다.
물계자는 달아나는 적군을 추격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천영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물계자는 강궁에 화살을 메겨 거수를 향해 쐈다. 날아간 화살은 정확히 거수의 등에 꽂혔다. 천영은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졸지에 우두머리를 잃은 골포 군사들은 그 자리에서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홀해왕은 공을 세운 물계자를 관직 중 13등급인 소사(小舍)로 임명하고, 도성 남문의 수문장으로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강세는 답답한 마음으로 물계자의 막사를 찾았다.
“폐하께 청해도 소용이 없구나. 이번에도 너의 공에 걸맞은 보상은 어렵겠구나.”
물계자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웃었다.
“제가 참전한 것은 나라를 위해서지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집으로 돌아온 물계자는 아내에게 말했다.
“내 듣건대 의사(義士)는 절개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생사를 돌보지 않는다 했소. 지난 두 번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 나는 신라의 백성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소. 이제 할 일을 다 했으니 속세를 떠나 조용히 살고 싶구려.”
물계자는 머리를 풀고 평소에 아끼던 거문고를 챙겨서 사체산(師彘山)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거문고를 뜯고 노래를 부르며 살면서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물계자는 산속에서 도를 깨달아 불로장생하는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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