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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부도 혜량에 관한 소문은 익히 듣고 있었다. 불경은 물론 여러 학문과 만물의 이치에 통달한 고승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거칠부가 꼭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스님이었다.
“저도 혜량 스님의 법회에 참석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우선 세수하고 아침 공양부터 하십시오.”
방을 나서던 승려는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거칠부를 돌아봤다.
“참, 저는 명덕(明德)이라 합니다.”
밝은 곳에서 보니 명덕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거칠부는 매무시를 가다듬은 뒤에 법회가 열리는 금당 앞으로 나갔다. 많은 신도가 설법을 듣기 위해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웅성거리니 마치 수만 마리의 벌 떼가 일제히 날아오르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혜량 스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갑자기 군중의 저편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혜량 스님께서 나오신다!”
거칠부는 발뒤꿈치를 들어 올리고 목을 길게 뽑아 스님을 찾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갈라진 틈은 어느새 사람들로 채워졌다.
이때 단상 위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제히 잦아들었다.
단상 위에 선 혜량 스님은 오 척 단구에 커다란 머리·검은 피부·실처럼 가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거칠부는 실망하고 말았다. 소문에 의하면 혜량은 8척 장신에 사천왕과 같은 얼굴로 호쾌한 설법을 쏟아 낸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실제 모습은 소문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 비슷한 것이라고는 절 내에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목소리뿐이었다.
설법을 시작하자 군중의 시선은 혜량의 얼굴에 붙박인 듯 꽂혔다. 스님의 말씀에 감동한 신도들은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를 짓기도 했다.
별달리 기대하지 않고 있던 거칠부도 설법이 진행될수록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됐다.
“불법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그대들의 마음속에 있다. 눈에 보이는 부처를 섬기지 말고 자신 안에 있는 부처를 찾아야 한다.”
거칠부는 혜랑의 설법을 듣고 자신이 그동안 헛된 다리품을 팔고 다녔음을 알았다. 그가 추구했던 깨달음이란 건 만날 돌아다닌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로소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였다.
설법이 끝나자 사람들은 기쁨이 충만한 표정으로 천천히 자리를 떴다. 거칠부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스승을 만난 감격으로 온몸이 떨렸다.
누군가 거칠부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방장께서 스님을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혜량 스님이 자신을 찾는다는 명덕의 말에 거칠부는 심장이 쿵쿵 뛰고 정신이 아득했다.
명덕은 상대의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싱글거리며 팔을 잡아끌었다.
법당을 돌아서 뒤편으로 쪽문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뜰이 보였다. 그 뒤로 작은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바로 혜량 스님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스님은 조용한 곳을 좋아해서 법당에서 멀찍이 떨어진 이곳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뜰에는 기이한 모양의 소나무가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 가운데 연못이 있고, 주위에는 산국(山菊)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혜량은 가부좌를 튼 상태로 툇마루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명덕이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큰스님,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혜량은 제자의 말을 못 들었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명덕이 목소리를 높여 다시 고했다. 그래도 혜량은 요지부동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만이 주위를 맴돌았다.
거칠부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소승은 원담(元談)이라 합니다.”
거칠부는 고구려에 들어온 후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원담이라는 법명을 쓰고 있었다.
“오늘 스님의 설법을 듣고 떨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제가 나아갈 길을 찾은 듯합니다.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거칠부는 마음속에 고인 말을 서둘러 토해 냈다.
혜량은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갑자기 강풍이 몰아쳤다. 은행나뭇잎이 세찬 바람에 날려 멀리 날아갔다.
혜량은 그제야 눈을 떴다. 남빛을 띤 눈은 깊은 우물물처럼 맑았다. 그의 눈을 보는 순간 거칠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혜량이 말을 뱉어 냈다.
“네가 저 나무의 이치를 안다면 더는 이곳에 머물 필요가 없다.”
혜량은 말 한 마디를 남긴 채 방으로 들어갔다. 거칠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얼떨떨해하자 명덕이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큰스님께서 허락하신 겁니다.”
혜량이 던진 화두(話頭)를 풀 때까지는 이곳에 머물러도 좋다는 얘기였다.
거칠부는 성문사에서 고된 행자(行者) 생활을 시작했다. 절간의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서 했다. 하지만 큰스님은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
거칠부는 살갑게 이끌어 주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았다. 다만, 허드렛일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온 거칠부에게 평양의 겨울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추웠다. 식사 공양과 빨래를 하느라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고,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속을 헤집고 다녀야 하는 게 거칠부로서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명덕은 거칠부가 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게다가 나이가 엇비슷했기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흉금을 털어놓는 사이가 됐다.
동장군(冬將軍)이 떠나고 난 어느 날 밤, 거칠부는 일을 마치고 처소로 돌아와 있었다. 등불 아래서 자신의 갈라지고 거칠어진 손을 들여다보니 서러운 생각이 들어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이때 명덕이 방으로 들어섰다. 거칠부는 황급히 눈물을 훔쳤다.
명덕은 내색하지 않고 쾌활하게 말했다.
“오늘도 하루를 무사히 마쳤으니 부처님께 감사해야겠군.”
거칠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힘든 행자 생활을 하면서도 늘 명랑한 명덕을 볼 때마다 신기했다.
“항상 즐거운 걸 보니 자네는 이미 깨달음을 얻은 듯하네.”
명덕은 잠시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미소를 띠었다.
“감히 내 주제에 깨달음에 대해 말할 수 있겠나. 단지 내가 쓰여야 할 곳에 있고,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 생각하네. 그러니 어찌 만족스럽지 않겠는가.”
거칠부는 머리가 복잡해져 밖으로 나왔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경내를 서성이던 거칠부의 발걸음이 어느새 혜량 스님의 처소 앞에 이르렀다. 방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뜰의 나무를 비췄다. 거칠부는 무심코 위를 올려다봤다. 겨울을 이겨 낸 나뭇가지가 어느덧 새순을 내밀고 있었다.
그 순간, 큰스님이 던졌던 화두와 명덕의 얼굴이 겹치면서 거칠부의 마음속에 커다란 파문이 일었다.
이제까지 자신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힘들다고 느꼈던 것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뭇가지는 겨울바람에 나뭇잎을 모두 잃고 죽은 듯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싹을 틔우기 위해 움츠리고 있는 것일 뿐이었다.
거칠부에겐 그제야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인내 속에서 해탈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거칠부는 감격에 찬 목소리로 혜량에게 외쳤다.
“큰스님, 저 원담입니다. 싹이 돋은 나뭇가지를 보았습니다!”
혜량의 우렁찬 목소리가 기다렸다는 듯 흘러나왔다.
“이제 때가 되었구나. 네가 온 곳으로 돌아가거라.”
방장 스님의 음성에는 어떠한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한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거칠부는 스승의 처소를 향해서 큰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방장의 방문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
처소로 돌아온 거칠부는 서둘러서 짐을 챙겼다.
명덕이 놀라서 물었다.
“이렇게 급히 어디로 가려 하는가?”
“내가 뿌리 내릴 땅으로 돌아간다네.”
명덕은 도반에게서 깨달은 자의 여유를 발견하고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마음이 통하는 사이였기에 새삼 말이 필요 없었다.
명덕은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봤다. 그의 얼굴에선 쓸쓸한 기운이 배어 나왔다. 인연에 연연하지 않는 불자였지만 거칠부와의 이별은 못내 아쉬운 듯했다.
한밤중에 성문사를 빠져나온 거칠부는 여각에 들어 성문이 열릴 때를 기다렸다. 그가 여장을 풀고 잠시 눈을 붙이려고 할 때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한 떼의 군사가 방으로 몰려들어 왔다.
거칠부는 놀라서 이불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섰다.
“무슨 일이오?”
“수상한 자가 있다는 신고를 받고 왔다. 패찰을 보여라.”
신라인인 거칠부가 고구려의 패찰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그가 머뭇거리자 번장은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 자를 포박하여 관아로 압송하라!”
좌우에 서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거칠부를 포박했다.
군사들이 몰려온 것은 여각의 주인이 밤늦게 찾아온 승려의 거동이 수상하다고 관아에 신고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신라와 백제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었기에 평양성에 양국의 간자가 심심치 않게 출몰했다.
고구려 조정에서는 조금이라도 수상한 자가 있으면 즉시 체포하라는 영(令)을 전국의 관청에 내려두고 있었다. 특히 여각과 같은 곳은 주의해야 할 대상이었기에 수시로 검문이 이루어졌다. 여각 주인들에게도 의심스러운 자가 있으면 신고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거칠부는 관아로 끌려갔다. 경비대의 번장은 그를 옥에 가두라 명했다.
옥에 갇힌 거칠부는 내심 두려웠다. 날이 밝으면 심문을 받을 테고 자신이 신라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질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변명의 여지도 없이 간자로 몰릴 것이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겨우 깨달았는데 헛되이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날이 밝자 거칠부는 관아의 마당으로 끌려 나갔다.
남부 욕살 소항(昭恒)은 대청마루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래로는 관원들이 늘어서 있었다. 거칠부의 양옆으로 도열한 군사들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소항이 눈을 부릅떴다.
“네놈은 필시 신라에서 보낸 간자가 분명하렷다!”
“소승이 신라에서 온 것은 사실이나 불법을 구하러 왔을 뿐 다른 뜻은 조금도 없습니다.”
소항은 거칠부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저놈이 아직 실토할 생각이 없는 듯하구나. 매우 쳐라!”
욕살의 명령이 떨어지자 형리들이 몽둥이를 들고 사정없이 내리쳤다.
거칠부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형리들은 그 소리에 흥분됐는지 더욱 맹렬하게 두들겼다.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는 가운데 거칠부는 한시라도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그는 정신을 차리고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거칠부가 끝까지 버티자 소항은 초조해졌다. 끌려온 승려가 신라의 간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공을 세우기 위해서는 누구든 간자가 돼야만 했다. 그런데 이 자는 심한 매질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다. 남부 욕살 소항은 마냥 시간만 끌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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