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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이 이문에게 차례를 돌린 것은 신라 왕의 음악적 소양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가 만든 12곡은 가야의 정서를 담고 있는 곡들이었다. 물론 음악이란 것이 만인의 감성에 통하는 것이긴 하지만 지역의 특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무릎 위에 가야금을 비스듬히 올리고 자세를 잡은 이문은 천천히 줄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이 줄을 타고 움직이면서 산속 옹달샘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같은 가냘픈 음이 흘러나왔다. 처음엔 가늘고 경쾌했던 선율이 탄주를 거듭할수록 점점 굵어지더니 서글픈 소리로 바뀌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미소를 짓던 진흥왕은 점차 가락에 빠져들더니 마침내 눈물을 떨궜다.
진흥왕은 연주가 끝나자 간신히 감정을 추슬렀다.
“이처럼 심금을 울리는 곡조는 처음 들어 봤다. 곡명이 무엇이냐?”
이문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곡명은‘까마귀’라 합니다. 지난날, 길가에 버려진 시신 위로 모여든 까마귀 떼를 보고 느꼈던 감상을 곡으로 엮은 겁니다. 까마귀를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느끼는 정조를 표현했습니다.”
“짐의 마음이 너의 음률로 정화된 듯하구나. 제자가 이러할진대 스승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어서 우륵의 연주를 듣고 싶구나.”
이문에게 가야금을 건네받은 우륵은 조용히 앉아서 악기의 줄을 매만졌다. 그가 현을 한 번 튕기자 고인 물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선율이 돌풍처럼 점점 거세지다가 소낙비처럼 시원하게 쏟아지는가 싶더니 천둥과 번개가 치듯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가 마침내 무지개처럼 흩어졌다.
진흥왕은 마치 드넓은 초원에 서서 한바탕 쏟아지는 비를 맞은 듯한 청량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문의 연주를 들었을 때 쌓였던 슬픔이 대상이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바뀌었다. 마치 말을 타고 비 내리는 초원을 실컷 달리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진흥왕은 감았던 눈을 떴다.
“금방 일생일대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어찌 이런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이냐!”
진흥왕은 홍조를 띤 얼굴로 우륵에게 말했다.
“이렇게 좋은 음악을 우리만 누릴 수는 없지! 네가 만든 곡조를 신라의 악사들에게 전수토록 하라. 그러면 많은 사람이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륵과 이문은 행궁에 머물면서 신라의 악사들에게 가야금 다루는 법과 곡조를 전수했다.
신라군의 도발에도 고구려 쪽에서 별다른 움직임이 없자 진흥왕은 도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신라 왕의 행차가 국원의 대문산(大門山)을 지날 때 우륵이 국왕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폐하께서 명하신 대로 악사들에게 음률을 전수했습니다. 이제 그들도 가야금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여기서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진흥왕은 우륵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평범한 악사들이 교육 좀 받았다고 너의 재주를 감히 흉내라도 낼 수 있겠느냐. 짐의 곁에 머물러 다오.”
하지만 우륵의 결심은 확고했다.
“대문산은 한수와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냅니다. 이곳에 은둔하며 음률에 정진하고 싶습니다. 부디 저의 바람을 꺾지 마소서.”
국왕은 상대의 결기를 느꼈다. 무슨 수를 써도 잡아 둘 수 없겠다 싶었다.
“너와 헤어지려니 너무 아쉽구나. 마지막으로 춤을 한 사위 보여줄 수 있겠느냐?”
“여부가 있겠습니까.”
우륵은 이문의 연주에 맞춰 춤을 췄다. 마치 짝 잃은 기러기와 같은 몸짓으로 아쉬움과 그리움을 표현했다.
진흥왕은 선율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보니 석별의 아픔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국왕의 행렬이 떠난 후 우륵은 달천이 내려다보이는 대문산 중턱에 터를 잡고 머물렀다. 그는 늘 바위 위에서 가야금을 탄주했고 때때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훗날 사람들은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곳을 탄금대(彈琴臺)라 불렀다.
진흥왕은 도성으로 돌아와서도 우륵의 연주를 잊을 수 없었다. 해가 바뀌어도 그리움은 가시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움은 오히려 커져 갔다. 지난날 우륵에게서 배웠던 악공들에게 연주를 시켜 봤지만 곡조를 제대로 이해하는 자가 없었다.
진흥왕은 바위라도 올려놓은 듯 가슴이 답답했다. 당장에라도 대문산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나랏일을 팽개치고 도성을 비울 수는 없었다.
국왕은 여러 날 궁리한 끝에 차선책을 선택했다. 재능이 뛰어난 악공을 선별해 우륵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그중 누구라도 가야금의 정수를 깨우친다면 우륵을 대신할 수 있을 듯했다.
진흥왕은 즉시 악공감 주탄(奏彈)을 불러 음악에 조예가 깊은 젊은 악사를 천거하게 했다.
주탄이 아뢰었다
.
“신라금에는 대아찬 계고(階古)가 악성(樂聖)의 경지에 이르렀고, 노래에는 국창의 후계자인 아찬 법지(法知)가 제일입니다. 그리고 춤은 만덕(萬德) 대사를 따를 자가 없습니다. 이들이야말로 만인이 인정하는 출중한 인재라 할 수 있습니다.”
왕은 이들을 편전으로 들게 했다.
계고를 비롯한 악사들은 왕명을 받고 서둘러 입궁했다. 이들은 진흥왕에게도 낯이 익은 인물들이었다. 나라의 큰 행사가 있으면 항상 백관 앞에서 재주를 보이곤 했기 때문이다.
진흥왕이 이들에게 분부했다.
“너희는 지금 즉시 국원으로 가서 우륵을 찾아 음률의 진수를 배워 오도록 하라.”
국왕의 명은 세 사람의 자존심을 무너뜨렸다. 이제껏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라고 자부하던 이들에게 근본도 모르는 이방인을 스승으로 섬기라 하니 어찌 그렇지 않았겠는가.
계고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폐하께서는 저희의 재주가 그만 못하다 보시는 겁니까?”
죽음을 각오한 당돌한 태도였다. 계고는 악사로서의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자였다.
진흥왕이 계고를 타일렀다.
“너희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짐이 들으니 음률의 경지에 오르면 서로 통한다 하더구나. 너희라면 우륵의 곡조를 이해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믿는다.”
지엄한 국왕의 명이었기에 세 사람은 거역할 수 없었다.
계고가 궁을 빠져나오며 벽지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우륵이 얼마나 대단한 자이기에 폐하께서 저리 반하신 건가?”
벽지도 못마땅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게 말일세. 내 보기엔 음률도 제대로 모르는 자가 교활한 세 치 혀로 폐하를 속이고 있는 듯하네. 우리가 가서 그자의 실체를 밝히세.”
세 사람은 행장을 꾸려서 대문산으로 향했다.
이에 앞서 진흥왕은 시위 밀봉을 우륵에게 보내 자기 뜻을 전해 두었다.
며칠 후, 계고 일행이 우륵의 집에 당도했다.
“저희는 왕명에 따라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자 왔습니다.”
계고는 시늉으로 예를 갖출 뿐 눈은 계속해서 우륵의 아래위를 훑었다. 우륵은 이를 모른 척하고 범상히 맞아들였다.
“내가 무슨 재주가 있어 그대들을 가르치겠소. 그러나 폐하의 명이라니 따르지 않을 수 없구려.”
벽지는 아니꼽다는 듯이 우륵을 쳐다봤다.
“선생은 저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십니까?”
태도가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도저히 배움을 청하는 자로 보기 어려웠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이문이 발끈하여 벽지를 나무랐다.
“어찌 이리 무례하단 말이오. 그게 배우겠다는 자세요?”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만덕이 나서서 말렸다.
“긴 여정으로 많이 지치고 심사가 뒤틀려서 그러는 거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저희는 어디에 묵으면 되겠습니까?”
우륵은 제자에게 거처를 마련하게 했다.
이문은 세 사람을 잡동사니를 넣어 두는 골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을 본 계고가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런 곳에서 어찌 지낸단 말이오?”
“다른 방이 없으니 어쩌겠소. 그렇다고 밖에서 노숙할 수는 없지 않소.”
이문은 더는 말도 섞기 싫다는 듯 뒤도 안 돌아보고 물러갔다.
세 사람은 누추한 처소에 불만이 컸지만 당장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벽지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래 있어 봤자 득 될 것이 없을 듯하네. 내가 내일 기회를 보아 우륵의 콧대를 눌러 놓겠네.”
“소승이 보기엔 그자의 인물됨이 범상치 않더이다. 시간을 두고 지켜보심이 어떨는지요.”
만덕이 자제를 권하자 계고가 버럭 화를 냈다.
“그럼 그자를 순순히 스승으로 받들란 말인가. 난 그럴 수 없네. 그건 내 자존심이 용납지 않아!”
세 사람은 제각각 생각에 잠겨 낯선 곳에서 밤을 맞이했다.
날이 밝자마자 계고와 벽지가 우륵의 처소로 갔다. 그러고는 이문에게서 탄금대에 있을 거라는 말을 듣고 우륵을 찾아 나섰다.
탄금대는 우륵이 한눈에 반할 만큼 풍광이 아름다웠다. 그리 높지 않은 구릉에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운치를 돋웠다. 그 주위로 한수와 달천이 유려하게 감싸고 돌며 흘렀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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