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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562년, 신라 진흥왕은 대가야와 접경한 비사벌에 사방의 군주들을 모아 놓고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다. 이는 국력을 과시함과 동시에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의 소국들에 복속을 종용하는 시위였다.
얼마 후 진흥왕은 이사부를 시켜 대가야를 들이쳤다. 지난날 백제를 도와 신라를 친 것에 대한 응징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은 가야 지역을 완전히 병합하려는 의도였다.
왕명을 받은 이사부는 3만의 대군을 이끌고 비사벌을 거쳐 대가야의 도성인 일리성(一利城)으로 쳐들어갔다.
대가야의 군신은 갑작스러운 신라의 침략에 크게 당황했다. 백제가 관산성에서 패한 후로 그들은 마땅히 기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실왕은 급히 주변 소국들에 사신을 보내 함께 대항할 것을 청했으나 신라의 위세에 겁을 먹은 소국들에선 군사를 보내지 않았다. 대가야는 홀로 신라군에 맞서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됐다. 풍류에만 빠져 있던 가실왕으로서는 정신이 바짝 날 수밖에 없었다.
다급해진 대가야 왕은 대신 설추를 불러 의논했다.
“신라군이 곧 도성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우리 군사로 신라의 대군을 막는 것은 역부족이다. 차라리 항복해 목숨을 보전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지금 와서 항복한다고 해 봤자 더욱 비참한 지경에 이를 뿐입니다. 성을 굳건히 지키고 백제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는 게 좋겠습니다. 백제가 관산성 싸움 이후로 약해졌다고는 하지만 우리를 포기하지는 않을 겁니다.”
설추는 여전히 백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가실왕은 설추의 의견에 따라 백제에 사신을 보내는 한편 군사를 정비하여 장기전에 대비했다.
이때 대가야의 성읍들은 신라군의 위세에 크게 겁을 먹어 앞다퉈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이사부는 힘들이지 않고 일리성에 당도할 수 있었다.
신라 장군 이사부는 군사를 풀어 일리성을 포위한 후 성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신라의 백성으로 대접할 것이나 저항한다면 누구도 이곳에서 살아 나가지 못하리라!”
일리성의 군사들은 신라군의 위압적인 군세에 매우 동요했다.
성벽 위에 올라 신라의 진영을 살피던 설추는 흔들리는 군사들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 외쳤다.
“저 말을 믿으면 안 된다. 성을 빼앗기 위한 술수이다. 백제의 경우에서 봤듯이 신라인은 신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성을 굳건히 지키는 것만이 우리의 살길이다.”
대가야 군사들은 설추의 말을 듣고 신라군에 투항할 마음을 버렸다.
일리성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사부는 전군에 공격을 명했다. 사기가 충천한 신라 군사들은 물밀듯이 성으로 쳐들어갔다.
치열한 공방전이 사흘 밤낮을 이어졌지만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아무리 강성한 신라군이라도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대가야군을 제압하는 건 쉽지 않았다.
일리성이 예상보다 오래 버티자 이사부는 초조해졌다. 만일 백제가 구원군을 보내온다면 전쟁은 장기전으로 흐를 수 있었다.
이사부는 장수들을 모아 놓고 지지부진한 형국을 타개할 묘책을 의논했다.
이때 한 소년 장수가 나섰다.
“저에게 군사 5천을 내주시면 반드시 일리성을 함락시키겠습니다.”
귀당(貴幢) 비장(裨將) 사다함(斯多含)이었다.
사다함은 갓 16세의 나이로, 신라 화랑(花郞)의 부제(副弟)였다. 화랑도는 촌락을 중심으로 구성됐던 청소년 수련 조직 원화(源花)로부터 발전했다. 진흥왕 대에 이르러서는 율령을 통해 화랑도를 정식으로 인정하고, 인재 양성에 적극 활용했다.
화랑 집단은 우두머리 화랑을 중심으로 몇 명의 승려와 다수의 낭도(郞徒)로 이루어졌다. 화랑 중에서도 최고 우두머리를 국선(國仙) 또는 풍월주(風月主)라고도 불렀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믿음직하며 사교성이 풍부한 성골(成骨) 또는 진골(眞骨) 귀족 중에서 낭도의 추대로 임명됐다. 낭도는 주로 도성에 사는 6부민의 자제들로 구성됐다. 이 조직에서 승려는 교육을 담당했고 지적·정신적 지주의 역할을 했다.
이들은 전국의 명승지를 돌며 심신을 수련했으며, 국가와 대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기백을 키웠다.
화랑도는 다수의 유능한 장수를 배출했고, 전쟁에 나가서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
사다함은 급찬(級飡) 구리지(仇利智)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외모가 아름다웠으며 품행이 방정하고 의를 숭상하여 많은 낭도가 따랐다.
어느 맑은 초여름날, 사다함은 자신을 따르는 낭도들과 함께 남천(南川) 가에서 천렵을 했다. 나뭇가지에서 탈출한 잎사귀가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지는 물길을 따라 헤엄쳐 갔다. 웃옷을 벗어 던진 어린 낭도들이 검게 그을린 상체를 드러낸 채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커다란 파문이 물 위의 낙엽을 저만치 밀어냈다.
코끝이 싸할 정도로 맑고 시원한 공기 사이로 낭도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다함은 따가운 햇볕을 피해 느티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청춘의 열기를 발산하고 있는 낭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눈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의 표정에선 어떤 위기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을 듯한 자신감과 누구든 포용할 수 있는 여유가 느껴졌다.
낭도들은 사다함을 쳐다보며 존경과 우정이 담긴 손짓을 보냈다. 그늘의 경계 안쪽에 있던 사다함은 순간 그들과 자신이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때 나무의 그늘이 짙어지더니 들판을 부는 산들바람처럼 시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가 국선 사다함인가?”
사다함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아름드리 느티나무처럼 건장한 사내가 서 있었다.
“자네가 버티고 서 있으니 너무 어둡군.”
사다함은 마치 오래 사귄 동무를 대하듯 심상하게 말했다.
“나는 그대가 정말로 우두머리의 자격이 있는지 알고 싶어 왔소.”
갸름한 턱선에 황소처럼 큰 눈을 가지고 있어 자칫 유해 보이기 쉬운 인상이었다. 하지만 검은 피부에 광대뼈가 튀어나와 오히려 강인한 느낌을 풍겼다.
사내는 꽃과 나뭇잎 모양이 새겨진 청색 비단 바지저고리에 가죽신을 신고, 매의 깃털이 꽂힌 관모를 쓰고 있었다. 옷차림을 보아 상당한 신분인 자가 틀림없었다.
“내 활로써 겨뤄 보고자 하오.”
사내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활을 앞으로 내보였다. 한눈에 이름난 장인이 정성 들여 만든 강궁(强弓)임을 알 수 있었다.
모름지기 궁술이란 정신과 신체가 균형을 이루어 고요함을 유지하지 않으면 목표물을 맞힐 수 없는 법이었다. 그러므로 깊이 있는 내면과 목표를 향한 열정, 그리고 강건하고 날렵한 신체를 가진 자만이 훌륭한 궁수가 될 수 있었다.
사다함이 몸을 일으켜 사내와 마주 섰다. 앉아서 바라볼 때보다 몸집이 더 컸지만 사다함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사다함이 고요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사내의 마음속에서 묘한 파문이 일었다.
냇가에서 물장구를 치던 낭도들은 괴한이 사다함에게 다가와 수작을 부리자 일제히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사다함의 신변을 걱정하기보다는 무언가 재밌는 구경거리가 벌어졌다는 표정이었다.
사내는 낭도들이 떼로 달려들지는 않을까 경계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저 구경꾼처럼 지켜보기만 했다.
낭도들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사내는 백여 보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나무의 잎사귀를 가리켰다.
“이곳에서 활을 쏘아 저 잎사귀를 먼저 떨어뜨리는 사람이 이기는 걸로 합시다.”
사다함은 아무 말 없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먼저 활을 들고 나섰다. 허리에 찬 전통에서 촉이 날카로운 화살을 꺼내 활시위에 물렸다. 긴장되는지 시위를 잡아당기면서 손가락을 파르르 떨었다. 하지만 목표물에 집중하자 어느새 떨림은 사라지고 얼굴에 평온이 깃들었다. 그는 화살 하나에 자신의 혼(魂)을 실었다.
사내의 숨이 멈춰진 순간 화살이 시위를 떠났다. 화살은 굶주린 맹금처럼 바람을 가르며 나뭇잎을 향해 날아갔다. 나뭇잎은 파르르 떨더니 화살을 맞고 바람에 날렸다. 화살은 나뭇잎을 꿰뚫고도 한참을 날아가다가 바위에 부딪혀 불꽃을 튀겼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사다함은 재빨리 사내의 활을 빼앗아 화살을 메기고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누구도 화살의 향방을 알지 못했다.
사내는 사다함의 돌발 행동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정중히 예의를 차렸건만, 그대는 상대에 대해 일말의 존중도 없구려. 정말 실망했소.”
사내는 사다함의 불손한 행동에 불쾌해 했다. 그는 자신의 쏜 화살을 찾기 위해 미루나무 있는 데로 걸어갔다.
나무 아래에 다다른 사내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나무의 둥치에 화살이 박혀 있는데, 그가 쏘아 떨어뜨린 나뭇잎이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사내는 자기 가슴에 화살이 박히기라도 한 듯 놀라움과 통증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환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사다함 앞으로 돌아온 사내는 다짜고짜 큰절을 올렸다.
“저는 북부민(北部民) 무관랑(武官郞)이라 합니다. 제가 본시 미천한 집안에 태어났으나 주변의 동무들이 저를 어여삐 여겨 무리의 우두머리로 추대해 줬습니다. 그 후로 알량한 재주만 믿고 하늘 아래 최고라 자만하며 살아왔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부디 저를 수하로 거둬 주십시오.”
사다함은 웃으며 사내를 일으켜 세웠다.
“내 재주 역시 남보다 나을 게 없네. 나도 자네와 같이 뛰어난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
뜻이 통한 두 사람은 많은 낭도가 보는 앞에서 피를 내어 섞은 술을 나누어 마신 후에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세했다.
사다함에게는 토함(土含)이라는 형이 있었다. 토함은 지혜가 출중하고, 봄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화사한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풍월주 이화랑(二花郞)은 그를 아껴서 부제로 삼았다.
이화랑은 형 못지않게 뛰어난 사다함을 눈여겨보고 있다가 태후에게 천거했다.
“토함의 아우 사다함은 어린 나이임에도 낭도를 거느렸으니, 국선이라 칭할 만합니다.”
호기심이 생긴 태후는 사다함을 궁으로 들게 하여 음식을 내렸다. 가까이서 보니 비록 눈이 시릴 정도로 빼어난 용모는 아니었지만 단단하고 옹골찬 골격과 강렬한 눈빛에서 영웅의 풍모를 느낄 수 있었다.
태후가 흡족해 하며 사다함에게 물었다.
“너를 따르는 자가 많다 하던데, 특별히 사람을 끌어당기는 비결이라도 있느냐?”
“다른 사람을 제 몸과 같이 아낍니다. 그 사람의 좋은 점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말하고, 나쁜 점은 은밀히 불러 일러 줍니다. 사람들이 주위에 모이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사다함은 태후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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