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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는 어린 나이에 벌써 세상을 사는 이치를 깨달은 사다함이 대견했다. 그래서 그에게 귀당 비장의 벼슬을 내리고 궁문(宮門)을 지키게 했다.
얼마 후 이화랑은 비조부(比助夫)의 아들인 문노(文弩)를 불렀다. 그는 격검(擊劍)에서 일가를 이루었고 의기가 드높은 호걸이었다.
“사다함은 앞으로 크게 될 인물이네. 잘 가르쳐 보게.”
문노가 의아하여 물었다.
“무릇 검술은 목숨을 내놓고 싸울 때 필요한 겁니다. 고귀한 사람이 굳이 배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 한 몸 스스로 지키지 못한다면 어찌 능히 만인(萬人)을 거느릴 수 있겠는가. 사다함이 호협(豪俠)을 좋아하여 따르는 무리가 많다고는 하지만 적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다. 자네가 옆에서 돕도록 하게나.”
호걸끼리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었다. 문노는 이화랑의 속내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사다함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사정이 그렇다면 문노도 거절할 수 없었다.
문노가 사다함 옆에서 보필하게 되니 그의 수하 낭도들도 따르게 됐다. 사다함의 세력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태자 동륜(銅輪)이 장성하자 주위에서 그를 시기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진흥왕은 태자의 신변이 걱정되어 은밀히 이화랑과 상의했다.
“태자를 해하려는 자가 있을 것 같구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보호해 줄 자가 필요하다. 적당한 사람이 있겠느냐?”
이화랑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저의 부제로 있는 토함이 적임입니다. 그는 지혜가 뛰어나고 무예가 출중합니다. 게다가 태자와 나이도 비슷하니 의기투합할 겁니다.”
진흥왕도 태후에게서 토함에 대해 여러 번 들었던 터라 흔쾌히 승낙했다. 이리하여 토함은 태자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게 됐다.
부제의 자리가 공석이 되자 이화랑은 사다함을 그 자리에 앉혀서 자신을 돕게 했다.
그 후 이사부가 진흥왕의 명으로 대가야 정벌에 나섰을 때 사다함은 치솟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전장에 나가고자 했다. 왕은 사다함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참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다함이 왕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무릇 신하 된 자는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고, 백성 된 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소신이 비록 나이는 어리나 폐하의 신하이자 신라의 백성입니다. 전쟁터에 나가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게 저의 소원입니다. 저를 출전시켜 주소서.”
진흥왕은 사다함의 충심에 감격했다.
“네 심중의 깊이는 나이로 측정할 수 없구나. 짐이 너의 의기를 꺾는다면 누가 이 나라를 위해 싸우겠느냐. 대장군을 보필하여 이름을 드날리도록 하라.”
이런 연유로 사다함은 무관랑을 비롯한 1천여 명의 낭도를 이끌고 이사부의 군단에 합세했던 것이다.
사다함이 별동대를 이끌고 일리성을 치겠다고 했을 때 이사부는 전쟁 경험이 일천한 점을 걱정하여 만류했다. 젊은 혈기에 무턱대고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다함은 요지부동이었다.
“소장은 반드시 승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자신이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소년 장수의 눈이 이글거렸다. 백전노장인 이사부조차도 그처럼 확신에 찬 눈을 본 적이 없었다.
이사부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이 입고 있던 갑옷을 벗어 주었다. 이것은 가야의 전설적인 장인 야로가 만든 보물로, 지난날 가실왕이 신라에 화친을 청하면서 진흥왕에게 선사했던 것이었다. 진흥왕은 대장군 이사부의 공을 치하하는 뜻으로 갑옷을 내렸고, 이사부는 전쟁에 나설 때면 언제나 이를 착용했다.
야로의 갑옷은 넓은 철판을 잇댄 다음에 몸에 맞추어 통으로 만든 것으로, 수백 개의 쇳조각을 이어 만든 신라의 갑옷과는 달리 창칼로도 뚫기 어려웠다.
사다함은 공손히 갑옷을 받아 입었다. 등판에 목가리개가 붙어 있고 어깨 부위에는 초승달 모양의 부속이 있어 목을 뒤와 옆에서 보호했다. 가슴 부위에는 화려한 태양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군장을 갖춘 사다함의 모습은 천마를 타고 하늘을 달리던 천신이 하강한 듯했다.
사다함은 무관랑과 함께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진영을 빠져나와 일리성으로 나아갔다. 이 중에는 사다함을 따르는 낭도 1천여 명도 포함돼 있었다.
성벽을 지키고 있던 설추는 사다함의 군사들이 나타나자 잔뜩 긴장했다.
성문 앞에 도착한 사다함이 군사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우리는 여기서 목숨 걸고 싸울 것이다. 고향에 두고 온 부모·형제·아내와 자식들을 잠시 생각하라. 그 후엔 모든 것을 잊고 성을 함락시키는 데만 전념한다. 가족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대들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나는 늘 그대들 앞에 서 있겠다.”
사다함은 무관랑과 설성에게 각각 2천의 군사를 나눠 주며 지시했다.
“지금 우리의 병력으로는 성의 여러 곳을 한꺼번에 공격할 수 없으니 일단 성의 가장 취약한 지점인 전단문(栴檀門)을 번갈아 공격하는 게 좋겠소. 나는 그 틈을 타서 낭도들을 이끌고 남쪽 성벽을 오르겠소.”
무관랑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전단문으로 다가갔다. 신라군이 움직이자 설추는 군사들에게 방어 태세를 갖추게 했다.
무관랑의 군사들은 성문으로 접근하면서 화살을 쏘아 올렸다. 일리성에서도 이에 질세라 화살 세례를 퍼부었다. 화살이 마치 메뚜기 떼처럼 온 하늘을 까맣게 뒤덮었다. 양편의 병사들은 낫에 베인 벼처럼 쓰러졌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무관랑은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설성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갔다. 설성의 군대는 당차를 밀며 성문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신라군이 다시 성문으로 다가오자 대가야 군사들은 돌덩이와 끓는 기름을 퍼부었다. 연이어 횃불을 던지자 성 아래에서 화광이 충천했다. 공격이 여의치 않자 설성은 군사들을 뒤로 물렸다.
간헐적인 공방전이 이어졌다. 무관랑과 설성이 번갈아 공격을 거듭하자 성벽 위의 대가야군은 점점 지쳐 갔다.
해가 산봉우리를 넘어가자 어둠이 대지를 뒤덮었다. 성 위의 군사들은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사다함은 드디어 때가 왔다 여기고 망대 아래 집결해 있는 낭도들에게 외쳤다.
“이제 우리의 힘을 보여 줄 때가 왔다. 준비됐느냐?”
낭도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각오가 돼 있었다. 그들은 화랑의 결기에 함성으로 화답했다. 수하들의 의지를 확인한 사다함은 그들과 함께 남쪽 성벽으로 달려갔다.
대가야군은 전단문으로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기에 남쪽에는 대적할 군사가 없었다. 들불처럼 무섭게 달려드는 신라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설추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신라군의 깃발이 성벽 위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사다함이 성문을 열자 성 밖에 있던 무관랑과 설성의 군사들이 삽시간에 밀려들어 왔다.
전단문이 신라군에 의해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실왕은 처소에서 목을 맸다. 이로써 대가야의 왕조는 최후를 맞이했다.
한편, 설추는 포박당한 채 이사부 앞으로 끌려갔다.
“네놈이 왕을 부추겨 황음무도에 빠뜨리고, 권력을 이용해 백성들의 고혈을 빨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오늘 그들을 대신해 너를 심판하겠다.”
이사부가 무서운 눈초리로 쳐다봤지만 설추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장군의 말은 틀렸다. 내 죄라고 한다면 힘이 없어서 나라를 지키지 못한 것뿐이다.”
적장의 당당한 태도에 이사부는 할 말이 없었다.
“욕 보이지 말고 어서 죽여라!”
이사부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설추의 기상에 감복했다.
“내 그대를 오해했구려. 예를 갖추어 목숨을 거두겠소.”
이사부는 사다함에게 명해 설추를 데려가 참하도록 했다.
사다함은 적장을 끌고 형장으로 갔다.
“그대는 장수로 불릴 만한 자격이 있소. 고통이 없도록 날이 잘 선 칼로 베어 주리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소?”
설추는 사다함을 유심히 보더니 혀를 찼다.
“내 관상을 조금 볼 줄 안다. 너도 얼마 안 있어 나의 뒤를 따를 것이다.”
이제 겨우 16세가 된 소년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저주였다.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무관랑이 발끈했다.
“저자는 죽는 순간까지도 험담을 늘어놓는군요.”
사다함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살고 죽는 것은 모두 하늘의 뜻이거늘, 어찌 이런 말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겠소.”
소년 장수의 의연한 태도에 설추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
“영웅의 기상이로고!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저런 인물을 나에게 보내신 건가.”
설추는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았다.
일리성을 차지한 진흥왕은 신라에 피신해 있던 도설지(道說智)를 대가야의 허수아비 왕으로 봉하고 주변 소국들을 차례로 병합해 갔다.
도설지는 이뇌왕과 신라의 왕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가야가 백제의 세력 밑으로 들어가자 신라로 망명했었다.
당시 진흥왕은 도설지를 따뜻하게 맞아들이고 월광(月光)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그러고는 급찬의 관등을 내리고 추문촌(鄒文村)의 당주로 삼았다. 훗날, 신라의 군대가 죽령을 넘어 남한수 유역을 공격할 때 많은 공을 세우자 사찬(沙飡)으로 승급시켰다.
도설지는 신라의 대가야 정벌 이후 민심을 수습하는 역할로 잠시 왕위에 올랐으나 주변 소국들까지 모두 병합된 이후로는 일개 촌주로 강등됐다. 이후로는 한적한 시골에서 쓸쓸히 말년을 보냈다.
5백 년을 이어 온 대가야는 핏빛으로 물든 낙조에서 지는 해처럼 처연히 사라졌다.
이사부가 대가야를 평정하고 귀환하자 진흥왕은 크게 치하했다.
이사부는 국왕에게 사다함의 공을 상세하게 아뢰었다.
진흥왕은 사다함에게 넓은 식읍을 하사하고 많은 포로를 노비로 내렸다. 그러나 사다함은 포상에 조금도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국왕에게서 받은 논밭을 모두 낭도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노비들은 그 적을 없애서 양인(良人)이 될 수 있게 했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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