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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제국의 꽃’ [243] 광무황제와 동학
동학을 종교로 승인했다
최문형 필진페이지 + 입력 2023-12-27 06:30:20
 
 
 
 
고종은 1895329일에 승려들의 도성 출입 금령을 철폐했었다. 고종의 구본신참론적 종교개혁의 궁극 목표는 불교·기독교·유교·천도교 등 여러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국가였다. 이 관점으로 보면 동학이야말로 대표적인 구본신참의 혁신 종교다. 동학은 서세동점의 문명 위기 속에서 국민과 민족의 형성 및 민족적 독립정신의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또한 동도동기론(위정척사론동도서기론의 존화주의(친청 사대주의)와 서도서기론적 친서방 사대주의, 그리고 일도일기론적 친일 사대주의를 모두 배격하고 극복했다. 또한 동학농민전쟁 이후 자행된 대살육을 뚫고 1907년에 무려 200여만 명에 달하는 교도를 가지고 있었다.
 
동학은 구도(舊道)’인 유··선을 근본으로 삼고 동시에 부분적으로 혁신하여 신분 해방·인간 해방·민족해방·여성해방·어린이 해방의 개벽 사상으로 재해석·재구성하고, 서학의 초월적 신비주의를 수용하였다. 또한 동학은 서학의 십일조를 성미로 변형하여 성미법을 실시했다. 성미는 훗날 3·1운동 자금의 전액을 댄 천도교의 튼튼한 재정 기반이 되었다. 또한 동학은 동아시아 보편주의 속으로 추상화되지 않았다. ‘반(反)서방보국안민에 그치지 않고 반청·반일보국안민도 천명하여 일제의 침략에 대해서는 무장투쟁도 불사했다.
 
고종은 갑오왜란 기간에 전봉준의 동학농민군과 연합했다. 하지만 종교적 동학사상을 수용하거나 인정하지는 않았다. 사상적으로 고종은 자신이 배워 온 성리학적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동학사상을 혹세무민의 이단또는 사도(邪道)’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고종이 동학을 꺼림칙하게 생각한 진짜 이유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고종은 동학교도들이 교주 최제우와 최시형을 국왕보다 높이 받든다고 오해했다. 국왕을 교주보다 더 높이 받든다는 믿음은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동학세력이 더욱 커지면 국왕을 제치고 교주를 세우는 반역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했다.
 
이 정치적 우려는 정씨왕조도래설이나 이씨왕조교체설 탓이기도 하다. 결국 1898718일에 동학교주 최시형을 교수형에 처했다. 더군다나 최시형에게 교수형을 선고한 고등재판소의 5인 판사진에는 전 고부군수 조병갑이 들어 있었다. 동학에 대한 오해와 우려를 떨쳐 내지 못하고 동학 세력과 연합하지 못한 것은 고종의 때 엄청난 사상적 실책이었다.
 
결국 광무 황제와 대한제국 정부는 동학에 대한 정치적 의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민족종교 동학을 종교로 공인하지 못했다. 나중에 광무 황제는 동학의 세력 규모가 200만 명을 넘어선 1907711일에야 최제우·최시형의 죄명을 취소하고 동학을 종교로 승인했다. 이 동학 교주 신원과 동학 공인 조치는 일제가 다시금 침략하여 전국을 무력 점령하고 난 이후인 19077월 황제를 폐위할 즈음에야 내려졌다. 광무 황제는 동학이 공인된 지 1주일 뒤인 1907719일 일제에 의해 강제 폐위를 당했다. 하지만 이렇게 공인된 동학은 10년 사이에 교도가 300만 명으로 늘어나 19193·1운동을 주도했다.
 
[글 최문형 그림 박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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