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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8·15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美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美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CIA와 대한민국’을 지면에 연재한다.
황장엽이 떠난 뒤
황장엽 사후 이명박정부가 그의 국립현충원 안장을 위해 힘쓴 것은 황장엽 자신을 위해서도 의미있는 일이겠지만 북한을 탈출하고자 하는 인사들에 대해서도 아주 중요한 메시지 역할을 했다. 과거에 북한에서 아무리 충성을 다한 고위급 간부라 할지라도 일단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면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고 대한민국을 위해 충성하면 죽어서 국립묘지에도 묻힐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실례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일은 탈북을 꿈꾸는 많은 관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전달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떠나느냐 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마지막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황장엽은 마무리를 잘했고 복을 받은 셈이다.
황장엽은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북한에 남겨 두고 홀로 남쪽으로 왔다. 가족의 안전보다 북한의 참상을 서방세계에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가 탈출하지 못하면 어차피 숙청당할 것을 예감하고 가족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난 것이다.
훗날 출간한 회고록에서 황장엽은 애절한 사연을 소개하며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의 생명보다는 가족의 생명이 더 소중하고, 가족의 생명보다는 민족의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그의 가족은 부인 박승옥과 두 딸, 아들 황경모와 장성택의 조카딸인 며느리,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손자 둘이 있었다.
그가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후에 당이 아들과 며느리를 강제 이혼시켰고, 남은 가족은 1998년 중반까지 가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1998년 여름에 부인과 아들이 미화 9만8000달러를 소지하고 평양을 이탈해 중국으로 도피하려다가 평북 용천 부근에서 체포돼 1999년에 처형되었으며, 딸과 손자들은 제14호 수용소에 보내졌다.
황장엽이 서울에서 사망했을 당시 그에겐 호적에 입적된 수양딸 68세의 김숙향과, 49세의 동거녀 엄모 씨,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11살 된 아들이 있었다.
황장엽은 비참하거나 비겁하게 떠나지 않고 고독하게 떠났다. 민족 분단의 고통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자유를 위해 몸부림치던 그는 아무도 없는 욕실에서 반신욕을 하다가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실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거나 6·25전쟁 등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업적 등이 없기 때문에 현충원에 묻힐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숨을 거두고 이틀 뒤인 10월12일 정부에서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등급의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해 주었다. 이어서 국가보훈처에서 그의 현충원 안장을 결정해 2010년 10월14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My goose is cooked!
1993년인가 1994년경의 일이다. 당시 나는 무려 9년에 걸친 장기 해외 근무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만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7월 말, 날씨가 너무 더워 사람들이 지쳐서 헉헉거릴 때였다. 점심 식사 후 오후 2시 지나서 나는 컴퓨터를 켜 놓고 보고서를 쓰다 말고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두 다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잠시 눈을 감고 쉰다는 게 그대로 낮잠으로 이어져 버린 것이다.
밖에 있던 비서 낸시가 나중에 들려준 말에 의하면 내가 근무시간에 코를 골면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어른께서 무슨 일로 오셨는지 당신을 만나러 방에 다녀가셨습니다. 당신이 곤하게 잠들어 있는 것을 보시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오시며 그냥 자도록 두라고, 일어날 때까지 문을 열지 말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낸시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이코, 난 이제 죽었구나!(My goose is cooked!)”
그러고는 엄한 질책이나 징계 처분을 각오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나의 상사들이나 동료 직원은 물론 비서인 낸시도 그 일에 대해 일언반구의 말이 없었다. 나는 나대로 매일같이 업무에 충실했다. 그리고 그해 가을에 나는 진급을 했다.
한 마리 작은 비둘기가 되고 싶소
1995년 6월27일, 나는 장기 해외 근무를 마치고 워싱턴 본부로 돌아갔다. 한 달간의 휴가 후에 사무실에 가 보니 새로운 일들이 벅차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한 관계 전문지식 때문에 나는 정부 부처 간 협력이 필요할 경우에 자주 동원되었다. 국무성·국방성·국가안전보장국(NSA)·FBI에 파견근무를 했고 감사장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매년 6개월 이상 해외출장을 갔고 2000년 2월29일 은퇴할 때까지 4년 8개월 동안에 무려 5개의 훈장을 받았으며 1999년 3월14일에는 GS-15급으로 진급을 했다. GS-15급은 군의 준장과 대등한 계급이다.
은퇴 직전 한 달간 60여 명의 은퇴자들이 기밀 보안유지 규정·은퇴 후 신변 안전·건강 관리·재정 관리·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 요령·여행 정보·주거 비용의 축소 등을 내용으로 하는 특별 교육을 받았다.
나는 은퇴란 삶을 살아가는 한 과정의 마감을 뜻할 뿐 출구가 곧 새로운 현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생각하면서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인생을 그려 보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젊음과 정열을 다 바쳐 헌신한 소속 기관을 떠나려니 홀가분하면서도 말할 수 없이 허탈했다.
그때 느낀 심정을 말하자면 인생은 결코 영광스러운 것도 비애스러운 것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저 조용히 왔다가 겸허하게 떠나는 것이다. 굳이 허무하다는 표현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인생 말엽에 나만을 위한 나의 시간과 내가 선택한 형식의 자유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런 선택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이 땅에 왔다가 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행복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허세를 부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 또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이 인생 종말에 이르러 그것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
나의 은퇴식장에는 많은 상관과 동료 직원이 참석했고, 동료 한 사람이 내가 쓴 은퇴 고별시를 낭송할 때 마음이 여린 여자 직원 몇 사람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그때 내가 쓴 고별시의 제목은 ‘비둘기(pigeon)’였다.
“광장에 우뚝,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거대한 동상/ 그 부동의 위용보다 나는 하늘을 날고 보도의 모이를 쪼아 먹는/ 한 마리 작은 비둘기가 되고 싶소.// 세월이 지나면 영광도 비애도 어차피 잊혀지는 이름들/ 비바람 맞고 녹스는 동상 밑에 어느 날 내가 쓰러져 죽었을 때/ 그 행복한 죽음을 쓰레기더미에 묻고/ 한 줌의 흙으로 나를 덮어 주오.
(Looming high above the plaza/ the grand statue draws the gaze of all passing by.// But, its lifeless dignity is not for me/ I would rather be the small pigeon/ that flits the sky and picks seeds from the pavement.// Hero or martyr, all are forgotten with the passing of time.// So when I collapse beneath that rusting statue some rainy day/ just lay me on the trash heap and/ sprinkle a handful of dirt over me/ to comfort my peaceful oblivion.)”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 美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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