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이은 방송통신위원장 탄핵으로 국민의 주목을 받고 있는 국회 상임위원회가 있다. 흔히 ‘과기정통위원회’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다. 우선 명칭부터가 지나치게 많은 분야를 한 상임위에 모아 놓은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그 시작은 2008년 이명박정부가 출범하면서 방송·통신 융합을 명분으로 만든 방송통신위원회였다.
방송·통신 융합은 21세기 디지털 미디어 시대를 여는 거대 담론이었다. 특히 1995년 미국 의회가 방송과 통신사업 겸영을 허용하는 통신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며 이 담론이 본격화되었다. 1920년 라디오 출범 이래 엄격히 구분되어 존재해 왔던 두 영역이 디지털을 기반으로 한 영역으로 통합된 것이다. 이러한 기술적 진보와 사업자 융합에 대응하는 법·제도적 융합이 방송·통신 규제기구 통합이었다.
미국의 연방통신위원회(FCC)를 벤치마킹해 만든 한국의 방송통신위원회는 매우 이질적인 두 영역 간의 규제철학 차이로 처음부터 갈등의 요소가 내재돼 있었다. 무엇보다 정치 논리가 지배하는 방송규제는 기술적 합리성과 네트워크 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통신 영역과 쉽게 통합되기 어려웠다. 하지만 디지털화와 방송·통신 융합이라는 ‘기술적 정명성(technological imperatives)’에 의해 규제기구 통합이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실제 규모 면에서 통신 시장의 7분의 1에 불과한 방송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에 통신 정책이 매몰된다는 지적은 출범 초기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아니 이제는 통신 정책 자체가 완전히 실종되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지난 15년간 방송·통신 융합을 상징하는 정책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해 준다.
물론 2009년 IPTV(인터넷TV)를 상용화한 것은 나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성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하지만 기존에 유료 방송을 주도하고 있던 케이블TV를 통신사업자가 운영하는 IPTV로 대체했을 뿐이라는 지적이 크게 틀리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IPTV 도입 이후에도 유료방송시장 구조나 메커니즘은 크게 변한 게 없다. 글로벌 OTT(Over The Top·인터넷을 통해 드라마나 영화 등 미디어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 공세에 한없이 무기력한 것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여야의 정치적 안배로 구성되는 방송통신위원회는 정책 비효율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박근혜정부는 독임제 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를 설립하게 된다. 하지만 추상적 명칭에서 보듯이 업무 영역 자체가 애매했다. 방송·통신정책과 관련해 방송통신위원회와 크게 중첩된 것은 물론이고 과학기술, 심지어 교육부 일부 업무까지 끌어다 붙이면서 정체성 자체가 애매해졌다.
심지어 야당 시절 이를 비판했던 문재인정부도 ‘과학기술정보통신부’라고 이름을 바꿔 그대로 존치시켰다. 현재 국회 상임위원회 명칭이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 논리에 매몰되어 있는 방송통신위원회와 정체성이 애매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관장하면서 사실상 정책의 본질에 집중하기보다는 정쟁의 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국회는 정치 논리와 갈등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더구나 여야 모두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기방통위원회)엔 정파성과 전투력이 강한 의원들을 포진시키고 있다. 방송을 정치적 전리품 혹은 도구로 생각하는 정치문화에서 기인하는 현상이다. 당연히 방송 정책은 물론이고 기술적 합리성과 전문성을 요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 관련 정책은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같은 정쟁과 갈등 속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 정보·통신 분야에 관련된 정책은 몇 년째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기술 변화에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법 지체 현상이 구조화되어 버린 것이다. 10년 넘게 글로벌 OTT와 플랫폼 사업자의 공세를 우려하면서도 관련법은 고사하고 규제 원칙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다. 또 여야 모두 점점 심각해지는 가짜뉴스를 규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정작 이와 관련해 법이 만들어진 적은 없다.
방송·통신 융합이라는 거대 담론에 밀려 통합 규제기구들이 만들어졌지만, 고질적인 한국 정치의 낙후성에 함몰되어 방송은 물론이고 정보·통신 같은 첨단 영역까지 황폐화시키는 부메랑 효과가 고질병이 되었다. 최근 방송 영역과 다른 영역을 분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는 것은 비록 기술 변화 추세에는 맞지 않지만 과기방통위원회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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