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확립을 추진하던 미국은 한반도를 그에 편입시키고자 군정 실시 직후 사유재산권을 철저히 보호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등 자본주의 체제를 수립해 나갔다. 당시 초미의 현안은 농지개혁과 적산 처리 문제였다.
1946년 12월12일 과도입법의원이 개원하자 미 군정청은 농지개혁 법안을 우선적으로 취급해 줄 것을 요청하고 1947년 5월부터 농지개혁안을 기초할 한·미 소위원회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해 12월23일 농지개혁안이 본회의에 상정되었으나 입법의원의 중추 세력을 이루고 있던 지주계급 출신 의원들의 ‘농지개혁은 중요한 문제이므로 정부 수립 이후에 실시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등 반대에 부딪혔을 뿐만 아니라 갖가지 술책에 의한 심의 지연으로 입법화되지 못했다.
미 군정은 사회 안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농지 분배가 시급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1948년 3월22일 미 군정법령 제173호의 공포로 자신들이 관리하고 있던 신한공사 소유 귀속농지를 분배했다. 1946년 2월21일 미 군정법령 제52호에 의해 설치된 신한공사는 일제 치하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소유했던 전 재산과 일본인 소유의 전 재산을 관리했는데, 총면적은 남한 총경지면적의 13.4%에 달했고, 그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농가는 남한 전체 농가 호수의 27%나 되었다.
대한민국 건국 직후 농지개혁은 이승만 정권의 최우선 과업이었다. 농지개혁은 물론 시대의 대세이기도 했고 대국민 약속이기도 했지만, 이 대통령은 토지 문제의 전향적 해결을 통해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높이고 지주 계층에 기반을 둔 한민당을 약화시키려는 정치적 의도도 갖고 있었다. 지주계급이 대거 진출해 있던 초대 국회는 농지개혁을 지연시켰고 재분배 조건의 온건화를 위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6·25전쟁이 시작되기 전인 1949년 6월21일 농지개혁법이 통과되었고, 농지개혁 법안이 최종 확정되어 공포된 것은 1950년 3월10일이었다. 같은 달 25일 이 법의 시행령이 공포되었고 4월28일에는 시행규칙이, 그리고 농지분배에 관한 세부 규정과 요령을 담은 ‘농지분배점수제규정’이 6월23일에 공표됐다.
정부 수립 이전부터 농지개혁에 적극적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 덕분에 6·25전쟁이 터지기 전인 1950년 3월에서 5월 사이에 적어도 농지의 70~80% 정도에 대한 분배가 단행되었다. 당시 50석 미만을 보상받은 영세 지주가 84.2%였고 97.8%가 400석 미만을 보상받았으나 지가증권을 통해 자본가로 변신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경제활동인구의 70.9%가 농민이었음을 고려할 때 농지개혁은 큰 의미가 있었다.
우선 1950년 6월 농지개혁 실시 이후 소작지 면적이 5.1%로 크게 낮아진 반면 자작지는 94.0%로 늘어났다. 그리고 소유 형태별 농가 구성비의 경우에도 1959년의 통계를 참조하면 자작농이 80.1%로 늘어났으며 소작농은 자소작농 12.3%·소자작농 5.7%·순수소작농 1.9%로 줄어들었다.
일제하에서 식민지 권력에 의존하여 농촌사회의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던 지주계급이 농지개혁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완전히 몰락함으로써 농촌의 반봉건적 생산 관계는 해체되었다. 지주계급 몰락으로 농촌 내 계층 대립이 기본적으로 해소되었고 전후 농촌사회는 지주계급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국가의 통제에 들어갔고 광범위한 자작농의 창출은 농민을 보수화시킴으로써 자본주의적 질서 유지에 기여했다.
영세 자작농으로 구성된 농촌의 소상품 생산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에 완전히 편입되었고 전쟁의 무차별적인 파괴로 인한 빈민화는 사회적 지위에 따른 위세의 평준화를 수반하여 계층 상승의 기회 균등화로 나타났다. 기회균등의 이데올로기가 확산되고 교육열이 올라간 것은 양질의 노동력을 창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국가와 자본으로부터의 수탈에 노출된 농촌에서 광범위한 과잉 인구가 퇴적되어 언제든지 도시의 공업화에 상당의 노동력을 공급할 수 있는 저수지가 형성됐다.
따라서 6·25전쟁은 농촌공동체를 흔들어 놓을 정도의 충격을 가한데다가 사회 신분 유제를 청산하고 평등의식을 광범위하게 확산시켜 자본주의 발전에 매우 유리한 사회 의식을 창출했다. 농지개혁이 전쟁과 어우러지면서 지주계급이 몰락했고 국가를 매개로 한 신흥 자본가의 등장을 촉진했으며, 농민들을 탈(脫)정치화시켜 이승만 정권에 대한 수동적 지지 기반이 형성됐다. 소작제도가 해체되고 자작농체제가 성립되자 영세농민이 소작료 부담과 경작권의 불안정에서 해방되어 농업 발전의 길이 열렸다. 이로써 한국 자본주의 체제 발전의 근간이 마련되어 60년대 발전국가의 토대를 제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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