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일수 평년의 2배 수준’ ‘서울 사상 첫 9월 폭염경보’ ‘89년 만에 가장 늦은 열대야’ ‘폭염으로 서른 명 사망’ ‘지속성 면에서 역대 최고’ 등 2024년 여름은 무더위만큼이나 폭염 관련 소식으로 뜨거웠다.
그 어떤 해와도 비교 불가능한 최악의 폭염이 한반도를 훑고 지나갔다. 폭염이 쓸고 지나간 자리는 태풍이 지난 자리 못지않게 처참하기 그지없다.
올해는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더위 때문에 야구 경기가 취소됐다. 8월2일 울산 문수구장(롯데 자이언츠-LG 트윈스) 경기가, 같은 달 4일 잠실구장(키움 히어로즈-두산 베어스)과 울산 문수구장(롯데-LG)에 이어 22일 포항구장(삼성 라이온즈-두산 베어스)의 경기가 폭염으로 연기됐다.
공연과 축제도 줄줄이 취소됐다. 특히 지난달 27일 개막 예정이었던 전남 신안 피플섬 아스타꽃 축제가 취소된 건 충격에 가까웠다. 국화는 가을꽃이기 때문에 폭염과 무관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더위가 9월 중순까지 계속되면서 꽃이 제때 피지 않았다.
신안 퍼플섬은 2021년 세계관광기구(UNWTO) ‘세계 최우수 관광마을’과 한국관광공사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되면서 연간 40여만 명이 다녀가는 신안군 대표 관광지로 자리매김했다. 피플섬의 타격은 K관광의 타격인 셈이다.
소리 소문 없이 피해를 당한 곳은 더 많았다. 그중 한 곳이 동네 소규모 점포다.
숨조차 쉴 수 없는 더위 속에서 사람들은 도보로 다니는 것을 꺼렸다. 사람들은 노상을 거니는 대신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 둔 자차를 이용해 어디론가 이동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1년 365일 쾌적한 복합쇼핑몰(백화점)이었다.
많은 사람이 약속 장소로 그리고 산책 장소로 그곳을 이용한다. 쇼핑몰까지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이동한 뒤에는 그곳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여유롭게 밥을 먹는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식당 옆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전시회장도 영화관도 병원도 모두 그곳에 있다. 쇼핑은 두말할 것 없다.
한번 들어가면 일상의 모든 용무를 처리할 수 있는 데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어느덧 국내에는 백캉스(백화점 바캉스)라는 단어가 자리 잡았다. 호캉스보다 손쉽고 북캉스보다 흥미로운 게 백캉스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역에서 잘나간다 하면 제과점이고 곰탕집이고 백반집이고 국밥집이고 할 것 없이 앞다퉈 시내 복합쇼핑몰에 지점을 낸다. 쇼핑몰에 새로이 둥지 튼 식당은 로컬음식점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세련되고 산뜻한 인테리어로 손님을 맞이한다.
친절한 직원의 안내에 따라 널찍하게 구획된 테이블에 앉으면 조금의 불편함도 느낄 수 없다. 홀은 청결하고 공기는 쾌적하며 음식은 정갈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가슴은 허전한 걸까.
지방 도시에서 만났던 그 식당은 비록 외형은 구려도 그 식당만의 멋이 있었다. 낡은 간판과 손때 묻은 테이블 그리고 그을음이 잔뜩 묻은 냄비는 그 집의 역사를 말해 주었다. 50년·70년 한결같이 식당을 운영해 온 주인장의 뚝심은 그 자체로 맛깔스러운 반찬이었다.
물론 로컬식당이 수도권으로 진출하면 좋은 점도 많다. 멀리 지방까지 내려가지 않아도 가까운 곳에서 지역 음식을 맛볼 수 있으니 넓은 관점에서 볼 때 시간과 돈이 세이브 되는 것이다. 또 쇼핑몰 내 식당은 현지 식당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어서 줄 서서 먹는 번거로움을 줄여 준다.
그러나 바로 그런 점이 아쉽다는 것이다. 지방 여행의 재미 가운데 하나가 로컬 음식을 즐기는 것이다. 비록 무더위 속에서 하염없이 자기 순서를 기다린다고 해도 그 지역을 가장 깊이 있게 경험할 수 있는 게 그곳에서 생산된 재료로 그곳 사람들이 그곳에서 만든 음식이다.
그런데 그 음식을 여행 전날 수도권 대도시에서 이미 맛보았다면? 원조집 맛이라고 특별하지 않다는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편리함의 역습이라고 할까. 이 도시에는 이제 아껴 둘 만한 게 남아 있지 않다.
‘전통’의 명확한 기준과 근거는 없다. 사회 구성원의 합의에 따라 일정 시간 이어져 온 것을 우리는 전통이라고 한다. 그것이 낡았기 때문에 타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워서 부당하다고 할 수도 없다. ‘낡음’이나 ‘새로움’은 대상의 성격일 뿐으로 그 자체로 타당 유무를 논할 수 없다.
전통은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그 모습이 아주 많이 바뀌어 왔다. 풍습과 의식주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른 게 전통이다. 사회가 바뀌면 아무리 억지로 유지하려 해도 전통은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형 쇼핑몰이 길거리 점포를 전부 빨아들이고 길은 고유의 문화를 잃은 채 창밖의 풍경으로만 남는다면…. 몇 천 년이 흘러 우리 후손이 땅 밑에서 발견하는 것이라곤 동굴처럼 깊고 별처럼 화려한 쇼핑몰의 잔해가 전부라면…. 해마다 증폭되는 무더위가 그날을 앞당기는 게 어이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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