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서도 수정은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승연은 수정의 방문을 노크하고 밥 먹으라고 말하려다 방 안에서 수정의 움직임이 있는지 확인하려 방문에 귀를 대었다. 아무 인기척이 없는 걸 보니 자는 게 분명했다. 수정은 귀가 후 저녁 식사 전에 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 저녁을 먹고 30분쯤 동네 한 바퀴 산책 후 돌아와 새벽 두세 시까지 공부한다.
루틴이 그러니 집에 들어오자마자 승준 엄마한테 들었다며 따지듯 뱉어 냈던 언행과 상관없이 수정은 자기 일상의 스케줄을 소화하려는지도 모른다. 평소 같으면 저녁 찌개는 뭔지, 자기가 좋아하는 햄 요리는 있는지 물어봤을 텐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승준 엄마한테 들은 얘기의 진위와 엄마의 변명으로 혼란스러워 하는 건 아닌지. 아냐, 내가 한 말을 분명히 들었을 거야. 엄마 말은 안 믿고 남의 말을 믿을 애가 아니야. 승준 엄마한테 사과받고 잘못 얘기한 거라고 단속해야지.
승연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방문을 두드릴까, 망설이는 사이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남편이다. 딸 수정과 달리 남편의 귀가는 요란스럽다. 헛기침은 그의 귀가를 알리는 신호였고 구두는 제멋대로다. 반듯했던 현관의 질서는 언제나 남편에 의해 깨진다. 현관 질서뿐이 아니다. 현관에서 헛기침을 하면 아내가 달려와 외투를 받아 들어야 했다. 시어머니가 만든 배씨 집안의 규칙이었다. 어떤 여자가 시집와도 당신의 아들은 존중하고 떠받들어야 하는 게 시어머니 불문율이었다. 시부모가 계신 데선 남편에게 언성을 높일 수 없었다. 그 시절의 시어머니가 대개 그렇듯 당신의 아들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귀한 존재였다.
게다가 아들 넷에 딸 둘인 여섯 남매 중 경찰대에 진학한 첫째를 빼고 아들 셋 전부를 서울대에 보낸 시어머니는 자식들이 일류 대학에 간 건지 자신이 대학을 간 건지 헛갈릴 정도로 프라이드가 엄청났다. 승연은 서울대 출신 남편을 배우자로 맞는 대가로 시어머니의 자부심을 보상해야 했다. 시어머니는 시부모 형제자매는 물론 사돈의 팔촌까지 혼수 리스트를 작성해 내밀었다. 없는 집에서 아들 셋을 모두 명문대에 보낸 어머니 마음을 모르진 않았지만, 있는 집 며느리한테서 한밑천 잡겠다는 심사가 아니고선 그럴 수 없었다.
남편은 대학 4학년 때 회계사 자격증을 획득해 유명 회계사 사무실에 스카우트된 상태였다. 승연은 혼수 리스트를 받아 든 후 펄쩍 뛰었다. 굴욕적인 결혼은 할 수 없다고 남편에게 통보했다. 남편은 결혼을 거부하는 승연과 타협점을 찾았다. 어차피 결혼하고 나면 따로 살 거니 혼수만 참아 달라며 애원했다. 부모를 모셔야 하는 부담도 없으니 미국 유학해서 살자는 제안도 했다.
승연은 남편의 미국 유학 계획에 귀가 솔깃했다. 잊고 싶은 과거로부터, 청춘이 유기된 대한민국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승연은 어디든 가고 싶었다. 승연은 끈질긴 남편 설득에 시어머니의 혼수 리스트를 받았다. 시어머니는 조건 하나를 덧붙였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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