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음력설인 춘절(春節) 연휴 기간(1월28일∼2월4일) 영화관 매출액이 80억 위안을 돌파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4일 현지 관영 신화통신·중국중앙티비(CCTV), 경제매체 제일재경 등에 따르면 중국 영화 예매사이트 마오옌(猫眼)은 전날 오후 7시30분 기준 음력설 박스오피스 매출(예매 포함)을 83억6000만 위안(약 1조6690억 원)으로 집계했다. 음력설 박스오피스 최고 기록인 2021년 78억4300만 위안(약 1조5600억 원)을 넘어선 신기록이다.
음력설 연휴기간 관객 수는 4일 0시 기준 1억6800만 명으로 작년 음력설 전체 관객 수를 이미 뛰어넘어 최다 관객 기록을 갈아치웠다. 장르별로 보면 판타지 애니메이션 ‘너자2’(那咤之魔童鬧海), 코미디 액션 서스펜스 영화 ‘탕탄(唐探)1900’, 전쟁 액션 판타지 ‘봉신(封神)2: 전화서기’(戰火西岐) 등 현지 국산영화들이 박스오피스 1∼3위를 차지했다.
중국에선 음력설 연휴가 섣달그믐(음력 12월31일)부터 최소 8일간이며 직장·직종에 따라 2주나 지속되기도 한다. 신화통신은 이번 설엔 주요 영화관 표를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관객이 몰렸으며 일일 박스오피스 수입이 3일까지 6일 연속 10억 위안을 넘었다고 전했다. 중국 정부가 내수 경기 부양책의 하나로 세금을 들여 극장가 활성화에 나선 게 이번 음력설 매출 증가의 배경으로 보인다. 작년 12월부터 지난달까지 영화관람에 6억 위안(약 1180억 원) 규모의 보조금이 지급됐으며 크고 작은 지방정부들 역시 이와 별도로 영화관람용 쿠폰을 제공했다.
10월 국경절 연휴와 함께 중국 극장가의 연중 최대 대목인 음력설을 앞둔 지난달 21일, 블룸버그통신은 내수 회복 노력에 필사적인 중국 당국이 극장가 활성화에 나서면서 해외영화도 모처럼 인기몰이 중인 현상을 보도한 바 있다. 블룸버그가 인용한 관영 중국영화보에 따르면 작년 상영 허가를 받은 신작 외국영화가 2019년 이후 최고치에 해당할 93편이었으며 이 중 3분의 1이 할리우드(42편)와 일본(24편) 영화였다.
또 중국의 작년 박스오피스 매출은 코로나19 기간을 제외하고 10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지만 블록버스터급 신작 외화의 중국 내 흥행 실적은 오히려 크게 좋아졌다. 작년 중국 내 영화 흥행수입이 전년 대비 4분의 1 가까이 줄어 425억 위안(약 8조3800억 원)에 그친 가운데 외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이 16%에서 21%로 상승한 것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고질라X콩: 뉴엠파이어’와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각각 작년 흥행수입 9위와 10위를 기록했다.
해외 재개봉작들 또한 인기를 끌었다.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상영관엔 주말 오후 대부분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 사이 출생)로 가득찼다는 소식이다. 시진핑정부가 최근 몇 년간 지나치게 서구적이거나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지는 영화들을 단속해 왔다. 그러나 심각한 침체에 빠진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개인소비지출 확대를 추진하면서 이런 제약의 완화 징후가 포착됐다는 게 블룸버그의 분석이다.
중국영화 전문가인 웬디 수 미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대 교수는 “중국 당국이 민족주의적 자부심과 자유주의적 세계화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면서 “경제가 심각한 침체에 빠지자 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영화 수입을 늘리려 한다”고 짚었다. 여기서 외국이란 사실상 서방, 특히 미국을 가리킨다. 영화산업의 규모와 다양성 면에서 할리우드 정도의 역사와 역량을 가진 나라는 미국뿐이다.
중국이 최근 몇 년간 공격적 전랑(戰狼)외교, 수단 방법 안 가린다는 의미의 초한전(超限戰) 전략으로 외교적 고립을 자초했다. 이게 곧장 외국자본의 유출로 이어졌으며 매년 1000만 명씩 쏟아지는 고학력자 취직길이 막혀 사회불안 요소가 되고 있다. 전기차 등 친환경 방면의 기술 및 시장점유율 약진, 우크라이나전쟁으로 증대된 러시아의 중국 의존도, 주변국을 향한 밀어내기식 저가품 공세가 중국 경제의 암울한 전망을 일부 불식시키는 요소들이지만 음력설 연후 극장가 풍경 너머로 중국의 내밀한 곤경이 엿보인다.
1990년대 중국엔 5세대 감독들이 문화혁명기 어둠을 딛고 쏟아낸 주옥 같은 명작들의 시대가 있었다. 이후 고도성장기를 맞아, 특히 지난 10여년 미국 패권에 도전하면서 국민적 연대감 고무를 겨냥한 블록버스터급 애국영화나 고대·중세사의 애국주의적 재해석, 패권적 세계관을 담은 작품들이 유행했으며 이런 경향의 기세가 꺾일 기미를 안 보인다. 아무리 막강한 인구 효과를 가진다 해도 점점 국내용에 그칠 영화밖에 못 만들게 됐다는 현실의 의미를 외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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