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배우에게 가난은 숙명처럼 따라다닌다. 최일화도 그랬다. 가뜩이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먹고사는 일도 버거운데 그는 연극을 하겠다고 덤볐다. 설상가상 제대 보름 전에 부친이 쓰러져 졸지에 가장이 됐다. 청소부, 봉제공장·라면공장 공원, 농장 일꾼 등 생활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도 그는 연극판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25년 무명 기간 동안 무대에 오른 것은 단 8번이었다. 대사가 있는 배역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배우보다 더 긴 시간을 스텝으로 일하며 버텼다. 무명배우 최일화에게 기회가 온 것은 2003년이었다. 연극 ‘서안화차’로 2003년 동아연극상 연기상과 배우협회 연기상을 받은 후 드라마 섭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2003년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와 2005년 SBS 미니시리즈 ‘패션70s’을 통해 최일화는 시청자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이후 영화와 드라마에서 비중 있는 역을 맡으며 착실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은 그는 지난 7월 사단법인 한국연극배우협회의 제11대 신임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신임 이사장으로서 그가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것은 연극배우들의 처우 개선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무명의 기간을 오래 겪었기에 연극배우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스카이데일리가 최일화 한국연극배우협회 이사장을 만나 대한민국에서 연극배우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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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일화 한국연극배우협회 이사장는 40대 이후 빛을 본 늦깎이 스타다. 늦은 데뷔로 본인 성공을 쫓기도 바쁜 그는 한국연극협회 부이사장과 한국연극배우협회 이사장을 맡아 동료 배우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더 열심히 살고 있다. 최일화 이사장의 실제 모습은 영화 ‘신세계’의 강 회장보다는 최근 출연하고 있는 KBS1 일일 드라마 ‘가족을 지켜라’의 복면가수 억만이와 더 비슷하다. 겸손하고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많은 그가 뒤늦은 나이라도 성공한 것은 당연해 보였다. [사진=박미나 기자] ⓒ스카이데일리
“35년간 연기를 하면서 25년 동안은 철저한 무명 생활을 했어요. 무명 시절 유일한 꿈은 대사가 있는 연극 무대에 서는 것이었어요. 오랜 기간 대책도 없이 연기자를 꿈꿨죠. 물론 후회를 한 적도 많았습니다. 연극을 시작한 뒤 주변 사람들에게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부모님, 동생들, 친척, 아내가 저 때문에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연극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25년을 버틴 후 비로소 연기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최일화(56) 한국연극배우협회 이사장은 배우가 되기까지 오랜 기간 무명 생활을 했다. 낮에는 연극을 하고 밤에는 막노동을 했다. 배도 타고, 탄광도 가고 생활을 위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새벽 4~5시 이전에 잠을 잤던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피곤한 생활 속에서 연습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최 이사장은 오기로 버텼다. 가혹한 세월이었지만 결국 의지는 현실을 관철시켰다. 섭외가 안 돼 걱정을 했던 최 이사장은 이제는 스케줄이 맞지 않아 출연하지 못하는 일이 생길 정도로 인정받는 배우가 됐다.
“제가 다작을 하는 이유는 제가 신선해서도 아니고, 제가 잘나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저 역시 무명 시절, 잘나가는 배우들을 보며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한 게 뭐가 있나 생각했으니 말이죠. 저는 수많은 배우를 짓밟고 올라온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연극 무대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분들이 많이 벌어서 연극 무대에 환원하라는 의미로 출연 기회를 자주 준다고 생각합니다”
최일화 이사장은 실제로 연극 배우의 처우 개선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본인이 받은 것 이상을 동료 배우에게 돌려주고 있었다. TV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돈을 조금 만지기 시작했을 때 그는 극단 혜화를 만들었다. 사비를 들여 빌라 지하를 극장으로 꾸몄다. 당시 측근들의 반대가 심했다. 이제 겨우 이름을 알리는 형편인데, 극단과 극장 운영은 시기상조라는 것이었다.
“혜화소극장 무대는 일종의 쇼케이스입니다. 무대에 설 기회를 갖지 못하는 배우들을 보다 많은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것이 목표입니다. 돈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지원해주는 것입니다. 물론 극단 ‘혜화’ 소속 연기자들도 무대에 서지만, 외부에서 섭외한 배우들이 훨씬 많습니다. 연인원 300명의 배우가 혜화소극장 무대에서 관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배우들이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데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배우는 많은데 무대는 얼마 없기 때문이다. 정규대학교 연극영화과에서 매년 9800명이 졸업한다. 이는 비슷한 학과는 제외하고 순수 연극영화과 인원으로 한정한 것이다. 정규 대학이 아닌 사립 연기 학원 등에서 매년 2만5000명이 나온다. 1년에 무려 3만5000명의 인원이 배출되지만 대학로 소극장은 채 200개도 안 된다. 당연히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없고, 성공할 기회는 더더욱 얻기 어려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 최일화 한국연극배우협회 이사장은 존경할만한 인품을 지닌 배우다. 1년에 100만원 벌기도 쉽지 않은 연극인을 위해 사비를 들여 극장과 극단을 만들어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연극배우 후원회를 조직해 지속적으로 연극인을 도울 계획이다. ⓒ스카이데일리
“졸업생은 많은데 이들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곳은 대학로로 한정돼 있습니다. 그런데 대학로에서 소극장을 운영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어떤 조사에서 봤는데 한국인 중 소극장 연극을 한 번도 보지 않는 사람이 약 95%였습니다. 보는 사람도 적은 데다가 표 역시 1장당 1만원 정도밖에 되지 않아 객석이 가득 차도 수입이 많지 않습니다. 물론 ‘혜화’에서 하루 최고 수익을 350만원까지 나온 적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보통은 월세도 감당하기 힘든 것이 소극장들입니다. 배우들 개런티는 꿈도 못꾸죠”
지난 25년 무명 시절 동안 최 이사장이 연극을 하면서 100만원 넘게 벌었던 적은 없었다. 한달에 100만원이 아니라 일년에 100만원이다. 100만원을 넘게 받는 연극배우들은 3%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최 이사장은 후배들에게 연극을 하고 싶으면 아버지, 형제 모두 다 죽이고 나오라고 말한다. 그러지 않으면 본인처럼 오랫동안 고생을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선진국들은 정부에서 소극장 배우들을 지원합니다. 연극 무대에서 30년 이상 활동한 배우들에게 우리나라 돈으로 4000만~5000만원 정도를 제공해 줍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극단에서 일을 하든지 그 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처럼 20대 배우가 분장을 하고 60~70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 든 배우가 자연스러운 연기를 할 수 있게 합니다”
원로 연극인 매월 30만원씩 종신 후원 위해 동분서주하는 배우
최 이사장에 따르면 지금 대학로는 기획자들이 좌지우지한다. 과거 극단들이 대학로를 이끌었을 때는 품격 있고 개성 있는 연극이 많이 올라왔다. 그러나 지금은 기획자들에 의해 장사가 되는 번역극들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획자들은 빠르고 말 잘 듣는 젊은 배우들을 선호하다보니 36세 이상만 돼도 캐스팅이 안 된다. 그래서 그는 중년 배우들이 점차 대학로에 설 자리가 없다고 지적했다.
▲ 최일화 이사장은 연극을 하려는 후배들에게 연극을 하고 싶으면 아버지, 형제 모두 다 죽이고 나오라고 말한다. 매년 3만5000명씩 새로운 배우 지망생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는 이 사람들 중 스타가 되는 사람은 0.1%도 되지 않는다며 그만큼 연극배우는 힘든 직업이라고 설명했다. ⓒ스카이데일리
“현재 중년 배우들이 소속된 곳은 국립극단이나 시립극단 빼고는 거의 없습니다. 드라마를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다 있는 경우가 없어요. 배역을 하나라도 줄여서 제작비를 절감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탤런트들도 노는데 연극배우는 더 하지요. 외국의 경우 국립극단 단원이 500명 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국가에서 일정 부분 이들을 책임져 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국은 워낙 돈을 써야할 곳이 많다보니 아직 이런 부분까지는 미흡합니다”
최 이사장은 연극배우 후원회를 조성하고 있다. 원로 배우들을 선정해 평생 동안 매월 30만원씩을 후원할 계획이다. 현재 명단을 작성에 선발 작업에 들어갔다. 다음달 연극인 체육대회 때 증서를 수여할 예정이다. 올해 10명으로 시작해 내년에는 30명, 그 다음해는 50명으로 늘려갈 예정이다. 최 이사장은 후원회를 조직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이사장이 된 후로는 집에 들어가는 횟수가 크게 줄었습니다. 한 달에 겨우 세 번 정도 집에 들어가는 나쁜 남편이 됐습니다. 후원회 조직도 중요하지만, 외국처럼 한국도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연기’ 과목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연기를 배우면 장점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늘고 공감 능력과 표현력이 발달됩니다”
그는 성공해서 돈을 벌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쓰고 싶다고 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연극인들이다. 그에게 성공에 대해서 묻자 한국에도 알파치노와 같은 배우가 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성공한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배우 최일화는 아직 알 파치노와 같은 세계적인 연기자는 아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그의 인품만큼은 그 어떤 스타와 견줘도 부족하지 않았다. 이미 한국연극협회 부이사장을 맡고 있는 최일화에게 연극인들이 한국연극배우협회 이사장까지 맡긴 것만 봐도 그가 동료들에게 얼마나 신망을 받고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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