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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음은 부왕에게 하직 인사도 못하고 풍계를 따라 황급히 자리를 떴다. 뒷문으로 빠져나가는데 갑자기 군사들이 튀어나와 칼을 겨누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왕자께서 벌이신 일이니 책임을 지셔야지요. 이것만이 무고한 백성을 살릴 길입니다.”
풍계는 군사들에게 명해 을음을 포박하게 했다.
“내 천하를 손에 넣으려 했건만 아군에게 잡혀 포승에 묶인 신세가 되었구나. 그저 한스러울 따름이다.”
풍계는 울음을 설유에게 넘기고 투항했다.
설유는 이로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을음을 잡을 수 있었다.
설유는 주나성의 백성을 위무한 후 주나국을 고구려의 군현으로 편입시켰다.
태조왕은 편전에 끌려온 을음을 보고 크게 꾸짖었다.
“감히 대국을 기만하고 이웃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으니 이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큰 죄다. 태평성대를 위협한 것만으로도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을음은 절대 굽히지 않았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모든 난관을 이겨 낼 만큼 강하지 못했다는 것이오. 내 재주가 부족하여 이 지경이 되었으니 누구를 탓하겠소.”
태조왕은 을음을 다시 봤다. 골치 아픈 적이기는 했지만 그 기백이 마음에 들었다.
역모의 죄는 능지처참으로 다스려야 했지만 을음을 살리고 싶었다.
“그 기상이 참으로 장하구나!”
태조왕은 당하로 내려가서 손수 포승을 풀어 주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너의 당찬 기백이 마음에 든다. 짐과 함께 천하를 도모해 보지 않겠느냐?”
을음은 왕의 아량에 크게 감복했다. 자신을 괴롭히던 상대를 포용하기란 절대 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보름달 앞에서 광채를 자랑한 반딧불에 불과함을 깨닫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목숨을 다하여 폐하를 모시겠습니다.”
태조왕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주나국의 왕자를 고추가에 봉하고 곁에 두었다.
태조왕은 부여에 사신을 보내 치하하고 예물을 내렸다. 이때부터 부여도 고구려에 정기적으로 공물을 바쳤다.
서력 9년 왕망이 한나라를 멸하고 신(新)나라를 세우자 서토에서는 전국 각지의 군웅이 들고일어났다. 이때 전한(前漢) 고조의 9세손인 유수(劉秀)가 남양에서 봉기했다.
유수는 하북과 호북으로 세력을 넓히더니 급기야는 곤양에서 왕망의 군대를 격파하고 낙양(洛陽)을 수도로 한나라를 재건했다. 이가 바로 후한의 세조다. 이후로도 각지에서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십여 년간의 전쟁 끝에 내란을 평정한 유수는 나랏일에 심혈을 기울여 그 위명을 후세에 남겼다.
유수는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호족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외척이 된 호족이 전횡을 일삼음으로써 오히려 왕조에 위협이 됐다.
후한 제3대 임금인 유달이 죽고 어린 유조가 등극하자 두(竇)태후가 섭정하게 됐다. 태후는 자신의 큰오빠인 두헌(竇憲)을 시중으로 임명하여 대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두 씨 가문이 요직을 차지하게 됐다. 다른 신하들은 두 씨 세력을 두려워하여 바른말을 하지 못했다.
한나라의 혼란한 상황을 지켜본 태조왕은 신하들에게 웅대한 포부를 밝혔다.
“지금 백성은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군사의 사기도 드높소. 이제야 비로소 예전 조선의 영토를 되찾을 때가 온 거요. 한나라의 정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요동 땅을 수복하도록 합시다.”
태조왕의 말이 끝나자 좌보 을음이 거들었다.
“한주(漢主) 유조는 친정하게 된 후로 외척인 두 씨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척의 세력이 워낙 뿌리 깊어서 쉽게 결판이 나지 않습니다. 양쪽의 대립이 극으로 치닫고 있으니 당장 요동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겁니다.”
태조왕은 장군 목도루(穆度婁)에게 군사 5천을 주어 예맥 군사들과 함께 요동의 현도를 치게 했다.
국경을 넘은 고구려군은 순식간에 현도 6개 현을 점령했다. 이 소식을 들은 현도 태수 경기(耿夔)는 낙양에 고구려군의 침입을 알리는 한편 2만의 군사를 이끌고 거취성으로 이동했다.
목도루는 현도군의 군대가 움직였다는 첩보를 듣고 대량수(大梁水) 유역으로 후퇴해 진을 쳤다.
거취성에 당도한 현도 태수는 군사들을 쉬게 한 후 척후병을 보내 고구려군의 상황을 살폈다. 고구려의 군대가 대량수 건너편에 진을 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경기는 장군들을 불러 모았다.
“고구려군이 아군의 위세에 겁을 먹고 대량수까지 물러났다 하오. 기세를 올려 쳐들어가면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오.”
군사(軍師) 허오개(許悟改)는 신중했다.
“적을 앞에 두고 강을 건너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차라리 강가에 진영을 세우고 저들이 건너오기를 기다리는 게 낫습니다. 정말 사기가 꺾인 거라면 감히 강을 건너지 못하고 후퇴할 겁니다. 그때 쫓아가서 공격하면 쉽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 우리에게는 고구려군을 압살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병력이 있다. 그런데 뭐가 무서워 저들의 눈치를 본단 말이냐. 망설일 것 없이 강을 건너가서 고구려군을 격파해야 한다.”
태수는 부장들에게 뗏목을 만들라 지시했다.
강 건너에서 한나라 군사들이 부지런히 뗏목을 만드는 것을 보고 고구려 부장 평선(平善)이 걱정이 되어 목도루에게 말했다.
“한군(漢軍)이 곧 강을 건널 모양입니다. 저들의 병력이 대단하니 큰일이 아닙니까.”
목도루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유를 보이며 웃었다.
“자고로 강을 건너려면 하백(河伯)에게 통행세를 내야 하는 법이네. 저들은 큰 희생을 치러야 할 걸세.”
“어찌 대응하면 좋겠습니까?”
“저들이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포차를 동원해 바위를 날리고 불화살을 쏘도록 하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강을 건너온다면 화살을 소나기 오듯 날리면 된다.”
명을 받은 부장은 군사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며칠 후 수많은 뗏목이 준비되자 현도의 대군이 빽빽하게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선두의 뗏목이 강기슭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잠잠하던 고구려 진영에서 우는살(嚆矢)이 날았다. 긴 휘파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커다란 바위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떨어지는 바위를 정통으로 맞은 한군의 뗏목이 통째로 박살이 났다. 위에 타고 있던 군사들이 파편처럼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마치 벼락이라도 떨어진 듯했다.
연이은 포격에 이어 불화살이 날았다. 불덩이가 하늘을 수놓는가 싶더니 뗏목에 탄 현도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군사들이 방패를 들어서 막아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많은 군사가 쓰러진 가운데 뗏목 위에 불이 붙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화살과 불길을 피해 강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한참 동안 공격이 이어지면서 수천의 한나라 군사가 돌이나 화살에 맞아 죽었다. 불을 피해 강으로 뛰어든 자들도 잇따른 화살 공격에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허오개가 보다 못해 태수에게 간청했다.
“고구려군의 반격이 대단합니다. 이러다간 군사들만 죽어나겠습니다. 당장 군사를 물려야 합니다.”
“너 같은 겁쟁이만 있으면 전쟁에서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다. 기다려 봐라. 고구려군이 곧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인해전술에는 누구도 당해낼 수 없다.”
막말을 퍼붓는 경기는 마치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상관의 명을 거부할 수 없었기에 허오개는 마지못해 죽음의 강으로 들어서는 군사들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 식경쯤 지나자 고구려 진영에서 날아오던 화살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태수는 미친 듯이 웃으며 소리쳤다.
“고구려군의 화살이 바닥난 모양이구나. 이 틈을 놓치지 말고 서둘러 강을 건너라!”
수하들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기의 외침은 괴이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한나라 군사들은 다시 힘을 내서 강을 건넜다.
이런 광경이 지켜보던 평선은 초조했다.
“화살이 바닥났습니다. 한군이 계속해서 강을 건너오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수천의 군사를 덧없이 잃은 상황에서 평범한 장수였다면 진작에 군사를 물렸을 것이다. 그러나 경기는 상식이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는 자였다. 하지만 백병전을 벌이면 아군의 피해도 상당히 클 것이기에 목도루는 퇴각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군은 노약병을 필두로 질서 정연하게 물러났다. 장수들은 후위에 서서 군사들을 독려했다.
뒤늦게 강을 건넌 경기는 고구려군이 후퇴하는 모습을 보고도 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강을 건널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허오개가 의아하여 물었다.
“어찌 도망치는 적을 그냥 두고 보시는 겁니다. 당장 쫓아가서 처참히 죽어간 부하들의 복수를 해 줘야지요.”
“저들이 퇴각하는 모습을 보아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지 않으냐. 필시 우리의 추격을 예상하고 복병을 배치했을 것이다.”
“그럼 숱한 희생을 무릅쓰고 강을 건넌 이유는 뭡니까?”
“우리 군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기 위해서다. 저들이 어떤 간계를 쓴다 해도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점을 각인시켰으니 앞으로 다시는 국경을 넘을 엄두를 못 낼 것이다. 그러니 이보다 더 큰 승리가 어디 있겠느냐.”
경기의 군대는 숱한 희생을 치렀지만 승전가를 부르며 태수부로 돌아갔다.
[임동주 글, 이영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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