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제국의 꽃’ [57] 거의 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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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형 연재소설

충의의 의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애통의 조칙을 내리노라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3-28 08:13:28

별입시 이범진이 다녀간 곳은 춘천 남면에 사는 고흥 유씨 유인석의 집이었다. 유인석은 이항로의 문인으로 위정척사파였다. 그는 이범진이 떠나자마자 6촌 형제인 유홍석의 집으로 서둘러 향했다. 심은 지 10년 남짓한 어린 느티나무가 입구에 서 있는 소박한 집이다. 이 집에는 유홍석과 외아들 유제원, 그리고 며느리 윤희순이 살고 있다. 유인석은 얼른 사랑으로 들었다.

“형님, 전하의 밀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유인석이 방에 앉자마자 말했다. 6촌 형제인 그들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고 공부한 허물없는 사이다. 나이도 비슷했지만 홍석이 한 살 많았다.

“아우님, 밀지라니? 그것이 사실인가!”

홍석이 놀라 물었다.

유인석이 품에서 조심스레 편지를 꺼내 받들었다.

“전하의 별입시 이범진 대감이 방금 다녀갔습니다. 보시지요.”

홍석은 일어나 절한 후 밀지를 받들었다. 고종의 밀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오호! 슬프다. 내 죄가 크고 악이 가득하여 황천이 돕지 않아 나라의 운세가 기울어지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도다. 이로 인해 강성한 이웃나라는 틈을 엿보고 역신들이 정권을 농단하고 있다. 하물며 나는 머리를 깎고 면류관을 훼손했으니 4천 년 예의의 나라가 나에 이르러 하루아침에 견양의 땅으로 변해 버렸다. 불쌍한 억조창생이 함께 그 화를 당하게 되었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하늘에 계신 열성조의 영혼을 뵙겠는가? 형세가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죄인인 나 한 사람의 실낱같은 목숨은 천만 번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다. 하지만 종묘사직과 백성을 생각하매 혹시 만에 하나라도 보전될 수 있을까 하여 그대 충의의 의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애통의 조칙을 내리노라. 영의정 김병시를 도체찰사로 삼아 중외를 진정 무마시키고...(중략)...처음 의병을 일으킨 선비를 모두 소모사에 임명하면 비밀병부는 당연히 (별입시 밀사에게) 소지시켜 보낼 것이다...(중략)...서울경기 일로는 순의군으로 삼고 나는 사직을 위하여 죽을 것이니 중외 의사들은 내 뜻을 체득하라. 오로지 마음을 하나로 하여 종사와 백성을 생각할 것이다. 이를 포고하니 지실하라.’

밀지를 읽고 난 홍석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전하, 불초한 소신이 전하의 애통한 뜻을 받들겠나이다!”

가슴 깊은 곳의 분노와 탄식이 응어리진 음성이다.

“아버님, 소녀이옵니다.”

며느리 윤희순의 음성이다. 그녀는 작은 주안상을 차려서 직접 들고 왔다.

“재당숙님, 평안하신지요!”

윤희순이 사뿐히 절을 올렸다.

“너도 게 앉거라.”

시부인 홍석이 며느리를 동석시켰다.

“자네도 알지만 이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라오. 국모께서 돌아가셨을 때 ‘왜놈대장 보거라’ 하고 왜놈들 꾸짖는 격문을 적어서 붙인 아이 아니오!”

유인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집 온 날 불이 났는데 열여섯 밖에 안 된 새색시가 불을 끄겠다고 족두리와 장삼을 벗어던지고 물동이를 나르지 않았습니까! 형님은 자부 복이 뛰어나십니다.”